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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32)화 (132/172)
  • 132화

    이정에게 정떨어지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도 서운한 내색을 감추며 몇 마디 푸념하는 것이 고작인 여사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마음에 걸렸다. 실상을 알게 된다면 혀를 쯧쯧 찰 게 아니라 쌍욕을 해 주셨을 텐데.

    이 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이정은 뭘 하려고 오늘 이곳에 찾아왔을까.

    회장님처럼 돈 봉투라도 주려나. 아니면 협박을 할까. 설마 이대로 내 머리채를 붙잡아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여사님이 계시니 이정이 내게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미친놈과 비견되는 이정이라면 무슨 짓을 벌일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이 복잡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여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이유를 들며 이환에게 연락이 가도록 넌지시 조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딱히 여사님이 연락하지 않더라도, 이정이 대문을 넘는 순간 경호원들이 이환에게 소식을 전했으려나.

    어느 쪽이든 이환이 나타나 이 난감한 상황을 해결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아니, 해결은 모르겠고 그냥 이정만 눈앞에서 치워 줬으면 싶다.

    “해민 씨? 이쪽으로 와요.”

    이 층 발코니 쪽에서 이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쟁반을 들고 다가가자 발코니에 놓여 있던 흔들의자에 앉은 이정이 보였다.

    “여기 자리 괜찮네. 여기서 얘기하죠.”

    자리는 괜찮은데 의자가 하나뿐인 게 문제이다. 그 하나뿐인 흔들의자를 이정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두 번째 문제이고.

    이정은 의자가 하나이든 두 개이든 별 신경도 안 쓰겠지. 그 의자에 자신이 앉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본인만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는다면 남이야 허공에 앉든 바닥에 앉든 상관없을 사람이었다.

    저 흔들의자.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의자인데. 어느새 내 애착 의자가 되어 버린 흔들의자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그 애착 의자에 이정이 앉다니, 아무리 애착 의자라지만 내일부터는 앉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듯했다.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이 층에 마련된 또 다른 티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왔다.

    “그거 알아요?”

    찻잔을 이정과 내 앞에 놓아두고 쟁반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런 나를 보다 찻잔을 들어 꿀물을 한 모금 머금어 삼킨 이정이 대뜸 물었다.

    “…….”

    “나는 해민 씨가 참 마음에 들었어.”

    “……그러셨구나.”

    내가 마음에 드셨구나.

    정작 나는 이정이 마음에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존대를 해 주고, 웃으며 대화하고, 무언가를 챙겨 주려 하는 이정을 보면서도 항상 의뭉스럽고 찜찜하고 꺼림칙하다는 생각만 했다.

    “하하. 이것 봐. 해민 씨는 다른 놈들이랑 반응이 다르다니까. 다른 놈들은 내 칭찬 한마디 듣고 싶어서 설설 기어요. 내 마음에 들고 싶어서 구두도 핥으려고 한단 말이야. 그런데 해민 씨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데도 시큰둥하네.”

    “제가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서요. 속마음은 다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시큰둥하고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속마음은 시끄러웠다. 다만 그 속마음이 기쁘지 않을 뿐이지. 불쾌하고 기분 나쁜 속내를 표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상태였다.

    “해민 씨를 보고 있으면 참 재미있어.”

    “삶의 기쁨을 느끼셨다니 다행이네요.”

    이 팍팍한 세상에서 이정이라도 즐겁다니 다행이지 않나. 이정이 즐거워할수록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기분을 느끼겠지만.

    이정의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다른 사람을 손에 쥐고 휘두르며 느끼는 가학적인 즐거움에 누가 동참할 수 있을까. 피학성애자가 아닌 이상, 피곤하고 짜증 나고 기분이 더러울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재미가 없네.”

    이건 조금 듣기 좋은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조금 즐거워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역시나 이정과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없는 운명인 모양이다.

    “해민 씨가 자꾸 선을 벗어나. 길만 잘 따라가면 좋을 텐데, 왜 자꾸 탈선을 하려고 하지?”

    “그게 제 길이 아닌 모양이죠.”

    “해민 씨가 길을 못 찾고 있는 거지. 그게 너무 답답해서 요즘 재미가 없어.”

    보람차다. 뿌듯하다.

    입에 내지 못하는 감상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잠시나마 이정 몰래 즐거움을 누렸다.

    항상 참아야만 했던 나는 언제나 조용히 수긍하는 역할이었는데, 그런 나에게 나도 모르는 반항적인 기질이 있었나 보다. 이정이 즐겁지 않다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나.

    “우리 환이가 참 착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이건 친구를 잘못 사귄 거지? 그 잘못 사귄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이 되네. 친구를 개도시키거나, 아니면 친구랑 놀지 못하게 떼어 놔야 하지 않을까.”

    “서른네 살 정도 먹었으면, 누굴 사귀든 누구와 어울리든 주변에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남이면 그렇겠지만, 내 동생이잖아. 우리 착하고 말 잘 듣는 환이.”

    댁이 손에 쥐고 이리저리 주물럭거리며 가지고 노는 인형? 그걸 동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환이가 누굴 가장 의지하고 믿을 것 같아? 아버지? 여사님? 바로 나야. 가장 가까운 핏줄이고 가족인 나.”

    그건 그냥 이정의 희망 사항이다. 이정이 그러하길 원하니, 이환이 그렇게 보여지도록 연기한 것뿐이다.

    “해민 씨가 지금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 내가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야.”

    내가 이 집에서 일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환이 원하고 내가 원하기에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다. 그 어디에도 이정의 의견은 들어 있지 않았다.

    대체 이정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믿고 있는지, 나는 그게 참 의문이었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정의 착각은 굉장히 자유분방했다.

    “내 말 한마디면 당장 이 집에서 끌려 나갈 수도, 세상에서 지워질 수도 있어.”

    이건…… 뭐, 그럴 수 있지.

    다른 건 다 부정하지만 이번만큼은 긍정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재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사람 하나 조용히 묻는 건 일도 아니니까.

    이환이 화를 내고 막아 줄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이정이 진지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끌려가 파묻힐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잘 닦인 길이 있는데, 왜 자꾸 길이 아닌 곳으로 가려고 하지? 우리 환이랑 손잡고 짝짜꿍, 아빠 엄마 놀이하면서 얌전히 놀면 얼마나 좋아. 내가 그래서 해민 씨를 그냥 두고 있잖아. 얌전히, 착하게, 예쁘게 환이랑 놀아 주라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근본 없는 새끼를, 그래서 눈감아 준 거잖아.”

    “…….”

    “아버지한테 돈 봉투까지 받았다며.”

    내가 회장님을 만나고, 회장님에게 돈 봉투 받은 일은 어떻게 알았을까.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가서 잘 해결하고 왔으니 장남은 안심하라며 회장님이 다독이기라도 했나.

    “회장님이 놓고 가셔서, 실장님에게 드렸어요.”

    “변명은 좋네.”

    “변명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두 장 들어 있었다며. 환이한테 더 뜯어낼 자신이 있었나 봐?”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환이도 없는데 솔직해지자, 해민 씨.”

    이미 충분히 솔직한 상황이었으나 이정은 납득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회장님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처럼, 그때의 회장님과 나처럼, 이정과 나 사이에도 많은 오해와 좁혀질 수 없는 착각이 펼쳐지는 미래가 그려졌다.

    “내가 해민 씨 봤을 때 딱 느꼈어. 아, 저거 어지간한 놈은 아니구나. 웬만하면 제 주제를 알고 환이한테 엉겨 붙지 못할 텐데, 웬만하지 않은 놈이구나. 저게 진짜 가진 것 없는 놈만 보여 줄 수 있는 ‘죽기 살기’구나.”

    “그래서, 재미있으셨어요?”

    “응. 재미있었지. 환이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뿌듯하기도 했고.”

    “부회장님이 왜…… 뿌듯하세요?”

    “장난감을 사 줬는데 애가 잘 가지고 놀면 뿌듯하잖아.”

    씨발놈.

    “……뭐?”

    “아뇨, 헛기침이 나와서.”

    작게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는지 이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콜록콜록하고 억지로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우리 환이랑 잘 놀아 줘서 착해.”

    아이 친구를 만난 어미가 칭찬하듯, 그렇게 이정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토닥였다. 순간 소름이 끼쳐서 나도 모르게 이정의 손을 탁 쳐 냈다. 나도 그렇지만 이정 또한 예상하지 못했는지 밀려난 손을 보며 그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해민 씨가 재미있기는 한데, 참 건방져.”

    맞잡은 손을 배 위에 올리고 흔들흔들 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이정이 입술을 뒤틀어 말했다.

    “아버지는 해민 씨를 환이와 떨어뜨려 놓을 생각인 것 같지만, 나는 다르거든. 원한다면 계속 환이 옆에 있어도 좋아.”

    마치 제 허락이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양, 그렇게 웃으며 이정이 너그러운 얼굴로 웃었다.

    “대신 이번처럼 환이가 엇나가게 하지는 말아야겠지. 뭐라고 환이를 충동질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회사 출근시켜. 착한 내 동생으로 돌아오게 만들라고. 그러면…… 어디 보자, 해민 씨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 한탕 크게 해 먹고 뜰 생각인가, 아니면 노후까지 보장받을 생각인가. 전자라면 내가 눈감아 줄 거고, 후자라면 환이와 결혼도 뭐, 고민해 보도록 하지.”

    “…….”

    뭐가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착하게 굴면 사탕 하나 던져 주겠다는 식으로, 제 말만 잘 들으면 이환 곁에 있게 해 주고 한탕 해 먹어도 좋고 결혼도 시켜 주겠다고?

    끝을 모르는 개소리에 웃음만 나왔다. 이번에는 미처 속으로 삼키지 못한 웃음이 흘러나와 황급히 저 멀리 하늘을 응시했다. 이정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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