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31)화 (131/172)
  • 131화

    화장실 청소는 이중적인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기 전에는 더럽고 찝찝하고 손도 대기 싫은데, 막상 하고 나면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 난 뒤보다도 더 뿌듯하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변기를 보면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이 층에 있는 이환의 화장실 겸 욕실과 내가 쓰는 화장실 겸 욕실 두 개를 청소하자 땀과 물로 옷이 흠뻑 젖었지만, 뿌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이제 고작 이 층을 클리어했을 뿐, 일 층의 화장실은 여전히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젖은 손을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으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인터폰을 들고 있는 여사님이 보였다.

    “네. 잠시만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주던 여사님이 계단 끝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왜 그렇게 젖었어.”

    “이 층 화장실 청소 좀 하느라고요.”

    “아이고, 조용해서 쉬나 했더니, 이 층 올라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네. 그걸 왜 해민 씨가 해. 나중에 사람 불러 시키거나 내가 해도 되는데.”

    화장실 청소를 굳이 사람 써서 할 일인가.

    “여사님보다는 제가 하는 게 맞죠. 저 화장실 청소 잘하잖아요. 완전 광나게 닦아 놨어요.”

    “변기에 광내서 뭐 한다고. 아무튼 고생했어요. 좀 앉아서 쉬어.”

    “아직 일 층 화장실이 남아서요.”

    “그건 내가 할 테니 그냥 두고.”

    “한 김에 제가 할게요. 그런데 누구 온 거예요?”

    “아……. 큰 도련님이 오셨다네.”

    여사님의 말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며 이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여사님. 오랜만이에요, 해민 씨.”

    예상치 못한 사람의 예상치 못한 방문에 놀랐다. 당황했다. 그리고 몹시 껄끄러웠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큰 도련님. 그런데 이를 어째. 작은 도련님은 회사 출근했는데.”

    하필이면 이환이 출근하는 날 집으로 찾아왔다며 여사님이 이정의 헛걸음을 안타까워했다. 내가 보기엔 헛걸음이 아니라, 상황을 충분히 살피고 매우 적절한 시간을 골라 찾아온 듯했지만.

    “아, 그래요?”

    역시나,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웃는 이정의 모습이 내 가정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래도 바로 가긴 아쉬우니까, 오랜만에 만난 김에 해민 씨랑 이야기나 좀 할까요. 여사님, 차 한 잔 주시죠.”

    “커피? 아니면 홍차?”

    “꿀차 주세요, 꿀차. 해민 씨가 꿀차를 좋아하던데. 꿀차 있죠?”

    “당연히 있죠. 해민 씨가 꿀차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계셨대.”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여사님이 급히 주방으로 가신 탓에 거실에 덜렁 이정과 남겨졌다.

    “……저기.”

    “여사님이 차 내오면 그때 얘기합시다.”

    이렇게 된 이상 일 층 화장실 청소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듯해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차단당했다.

    여사님이 차 내오시기 전에 얼른 갈아입고 올 자신이 있었는데…….

    시무룩한 마음에 젖은 옷자락 끝을 잡고 작게 펄럭거렸다. 물에 젖은 셔츠가 살가죽에 척척 들러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트리 만들었네요?”

    주변을 둘러보던 이정이 거실 소파 옆에 세워져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로 다가가며 웃었다.

    “낯익은 사슴도 보이고.”

    트리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위아래로 훑어보던 이정이 그 옆에 늠름하게 서 있는 사슴의 정수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크리스마스라……. 환이가 많이 좋아하죠?”

    “그을……쎄요.”

    “부끄러워서 해민 씨한테는 내색을 안 했나? 환이가 크리스마스를 엄청 좋아하거든. 자기 생일보다도 더 좋아해.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서 크리스마스트리부터 보러 갔다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무슨 선물을 주고 갔을까 막 궁금해하면서.”

    과거 기억을 떠올리듯 흐릿한 눈으로 트리를 응시하며 이정이 추억을 이야기했다.

    산타클로스를 믿는 이환, 제가 준비한 선물을 산타클로스가 주고 갔다고 믿는 이환,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기 위해 12월만 되면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고 온갖 심부름을 하고 다녔다던 이환.

    어릴 적 이환의 귀여움을 자랑하듯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이정을 위한 연극이었음을 그는 여전히 모르는 듯했다.

    이환이 회장님과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인정할 수 없었던 회장님에게 나는 돈 봉투까지 받았는데.

    여전히 혼자 꽃밭에서 살고 있는 이정이었다.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뭘까. 내가 알지 못하는 이환의 과거를 저는 알고 있다는 승리감? 아니면 동화 속에서 살고 있다 생각하는 이환을 제 손에 틀어쥐고 있다고 믿는 우월감?

    이정이 무엇을 생각하든 현실은 그와 매우 다르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환이가 슬퍼할지도 모르겠어.”

    “……왜요?”

    “올해는 환이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을 수도 있거든.”

    “실장님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는데요?”

    “멋대로 출근도 안 하고, 회사도 멋대로 나가 버리고, 형 말도 안 듣고, 질 나쁜 친구랑 어울리잖아. 산타 할아버지는 그런 나쁜 어린이한테는 선물을 안 주거든.”

    이정은 이환의 동심을 이용하여 그를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컨셉에 먹혀 버린 건 이환이 아니라 이정인지도 모르겠다. 실상을 알게 되고, 이정과 이환 형제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러한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왜 그러고들 서 있어요.”

    이정이 과거에 파묻혀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며 추억을 떠올리고, 나는 그러한 이정을 바라보며 또라이를 떠올리고 있을 때. 쟁반에 찻잔 두 개를 올려 나온 여사님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크리스마스트리 구경 좀 했습니다.”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며칠 전에 만들었어요. 내가 창고에서 저 사슴 꺼내 올 때마다 뼈마디가 쑤신다니까.”

    “남의 돈 받고 일하는데 사슴이 아니라 사슴 농장이라도 만들어 줘야죠. 우리 환이 아니면 늙은 여사님이 어디 가서 일하겠습니까.”

    농담처럼 웃으며 내뱉은 가벼운 말속에 고압적이고 거만한 우월감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여사님의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나 싶어 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잊고 있었나 보다. 이환이 월급 주는 사람답지 않게, 너무 인간적으로 대해 줘서 세상의 쓴맛을 잊고 있었다.

    돈만 주면 사람의 영혼도 부릴 수 있다고 믿고,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인격을 짓밟는 짓도 서슴지 않는 족속들을 수없이 겪었으면서.

    몇 달간 꽃밭에서 살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이 층에 티 테이블 있죠?”

    어색해진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정이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쩌면 남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찌푸려지는 미간을 감추려 살짝 숙인 고개를 끄덕였다.

    “이 층으로 갑시다. 그거 들고 와요.”

    대답도 듣지 않고 저 혼자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버리는 이정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재수 없어.

    이정이 집에 방문한 손님인 것도 맞고, 내가 이 집 주인은 아니지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니 손님맞이를 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기분 좋게 할 수 있잖아. 꼭 그렇게 명령조로 말을 해야 하나. 월급 주는 고용주도 아니면서 왜 명령조로 말을 하지?

    하나부터 열까지 재수가 없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다 재수가 없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여사님에게서 쟁반을 받아 들었다.

    “어휴, 저놈의 성격.”

    여사님의 속마음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지 내게 쟁반을 건네주며 혀를 쯧쯧 찼다.

    “우리 아가씨 첫아이라고, 바닥에 등 대는 일 없이 애지중지 안아서 키웠는데. 그때 나간 손목이 아직까지도 시큰거리는고만, 그저 돈이면 만사 땡인 줄 알고. 저리 모진 성격으로 클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여사님의 푸념 아닌 푸념에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동조하지도 못한 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냥, 생각 없이 하신 말이겠죠.”

    “생각 없이 하는 말이니 더 문제지. 됐어요.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말해서 무엇 하겠냐며 여사님의 한숨이 쏟아졌다.

    “그보다 여사님.”

    “응?”

    “실장님에게 연락하셨어요?”

    “도련님한테?”

    “실장님 만나러 오신 거니까 연락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부회장님 오셨다고 하면 일찍 퇴근하실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말씀은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내가 전화해 볼 테니까 올라가 봐요. 저 성격에 기다리게 했다고 성낼지도 모르니.”

    “네. 지금 바로 연락해 보세요.”

    알겠다며 휴대폰을 꺼내는 여사님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섰다.

    솔직히 이정을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환이 없는 틈을 타 찾아온 이정이 내게 어떤 개소리를 할지 짐작이 되기도 했고, 이십 년 동안 동심에 매몰된 미친놈을 연기해야 했을 이환을 떠올리면 이정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여사님에게 무턱대고 이정을 돌려보내라 말을 할 수도 없고, 내게는 그럴 자격도 없었다. 이정이 제 동생을 만나러 왔다는데 집주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내가 그를 출입 금지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이환을 끔찍이 아끼는 여사님이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대문을 활짝 열고 이정을 반길 일이 없을 테지만. 이환은 무슨 생각인지 지금까지 여사님에게 상황을 알리지 않았고, 내게 진실을 말하고 상황을 끝내겠다고 결정한 뒤에도 여사님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며, 딱히 앞으로도 이야기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정과 이환을 자식처럼 돌봐 온 여사님이 진실을 알게 되신다면 충격을 받으리라 생각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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