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28)화 (128/172)
  • 128화

    “나는 가끔 해민 씨가 요정님이 아니라 현자나 성인 그런 게 아닐까 헷갈립니다.”

    “셋 다 아닌데…….”

    작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무시하며 이환이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이렇게 작고 어리고 여린 사람이 생각도 깊고 현명하다니. 볼수록 놀랍고 감탄스러워요.”

    칭찬 그 자체도 낯설지만, 특히나 어울리지 않는 칭찬은 언제나 나를 부끄럽고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런 칭찬은 제발 그만.

    “하지만 나는 해민 씨가 욕심내 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욕심이요?”

    “나한테 예쁜 옷을 사 달라고 했으면 좋겠고, 맛있는 음식을 사 달라고 했으면 좋겠고, 비싼 보석을 사 달라고 했으면 좋겠고, 좋은 집을 사 달라고 했으면 좋겠네요.”

    요즘은 자식이 결혼해도 집 사 주는 부모가 드문 실정인데. 집값이 워낙 비싸서. 하물며 이환이 내 부모도 아닌데, 내가 왜 이환에게 집을 사 달라고 하겠는가.

    “회장님이, 길어야 이 년이래요.”

    “네?”

    “실장님이 저한테 관심 가지는 시간이요. 그리고 뭔가 뜯어내려는 기색이 보인다면 더 짧아질 거래요.”

    “아버지가 나를 아주 잘못 봤습니다.”

    “왜요?”

    “길어야 이 년이라니. 그 정도면 본인 희망 사항을 말씀하신 거죠. 내 관심은 평생을 해민 씨에게 쏟아부어도 부족한데.”

    과장된 말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웃어요? 안 믿깁니까?”

    “평생이 아니라, 실장님이 저한테 관심을 주는 지금도 사실 좀 안 믿겨요.”

    “왜 안 믿기지? 요정님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인간들에게 관심이 생기겠어요. 나는 안 믿는 게 더 안 믿기는데?”

    그러네. 요정님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인간한테 관심이 생겨. 누가 봐도 요정님이지.

    맞는 말씀이라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이환이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아버지가 아주 악담을 하고 가신 모양인데,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까? 주스라도 뿌려 주지 그랬어요.”

    “그러기엔 찻값이 너무 비쌌어요.”

    “저런.”

    작게 혀를 찬 이환이 들고 있던 돈 봉투를 대충 협탁 위에 던져 놓았다.

    “그럼 저 돈은 강남에 오피스텔 사 줄 때 보태겠습니다.”

    “네에?”

    “뭐가 ‘네에’예요? 저번에 내가 사 준다고 했잖습니까.”

    “그 가격 맞춰 줄까 보다, 라고 했지 사 주겠다고는 안 하셨어요. 막 말 바꾸지 마세요.”

    “네, 네. 생각해 보니 현금보다는 역시 부동산이라서 오피스텔을 사 주기로 했습니다.”

    “그건 아니고요!”

    “작은 거 하나 사 줄 겁니다. 나중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아무튼 나중에 혹시라도 부부싸움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질 때가 생기면 거기 가 있어요. 그럼 내가 찾으러 갈 테니까.”

    “아니, 부부도 아닌데 무슨 부부싸움을 해요.”

    “그래요. 곧 부부도 합시다.”

    “아니, 잠깐만요.”

    쪽, 하고 입을 맞추는 이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지만,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내 반항이 귀엽다는 양 밀어내는 손을 피해 얼굴의 이쪽저쪽에 쪽쪽거리며 연신 입을 맞춘 이환이 승자의 얼굴로 웃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생깁니다. 화가 나서, 슬퍼서, 실망해서, 힘들어서, 생각이 필요해서, 등등 수많은 이유로. 그런데 막상 갈 곳이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혹시라도 해민 씨가 길 잃은 아이처럼 우두커니 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해민 씨만을 위한 안락하고 작은 비밀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어요.”

    “비밀 공간이지만, 실장님은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야 내가 데리러 가죠. 짠, 하고 왕자님처럼.”

    “실장님이 왕자님이에요?”

    “그럼요. 요정님을 에스코트하려면 왕자님은 되어야죠.”

    요정님 취급에 익숙해진 것과는 달리 내가 요정님 취급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지만, 이환이 왕자님에 어울리는가 하는 질문에는 이견이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최상위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이니, 이환보다 더 왕자님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으리라.

    “실장님.”

    “네, 해민 씨.”

    “실장님.”

    “네. 나 여기 있어요.”

    가끔 뭔가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수많은 감정들이 모이고 모여 가슴이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 하면 무엇 하나 잡히질 않아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말 대신 이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실장님.”

    “네에.”

    지금 다 좋은데.

    “왜 손이…….”

    배와 허리를 조물조물하던 손이 바지춤을 파고들어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아, 나 많이 피곤합니다.”

    내 지적에 이환이 머리를 기대 오며 갑자기 지친 척을 했다. 여전히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손이 그의 말에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렇게 피곤하시면 두 손 얌전히 배 위에 올리고 눈 감으세요.”

    “것보다는 잠깐만 이렇게 있읍시다.”

    “손은 안 피곤하신가 봐요.”

    남의 엉덩이를 막 떡 주무르듯 주물럭거리고 있는데.

    “아, 힐링 된다.”

    힐링보다는 타락하고 있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속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맨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 양손의 엄지가 골을 파고들어 구멍의 주변을 슬금슬금 문질러 댔다.

    “실……장님.”

    “해민 씨도 힐링해요. 나가서 기분 나쁜 얼굴 보고, 기분 나쁜 소리 듣고 왔으니까. 국가대표급 고추 만져요.”

    “괜찮습니다.”

    정색하며 거절했으나 사양치 말라며 이환이 내 손을 붙잡아 제 바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누구를 위한 힐링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손끝에 닿는 묵직하고 뜨듯한 물건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차가운 손이 닿자 이환의 아랫도리가 움찔했으나 곧 화를 내듯이 꼿꼿해졌다. 피곤하고 지친다는 말과 달리 아랫도리는 언제나처럼 활동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반응이 즉각적일 수 있지? 손이 닿자마자 낯가림도 없이,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벌떡벌떡 고개를 들어 올린다. 서른네 살이 정력적인 나이인 걸까, 이환의 성욕이 유별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떠올리는 머릿속과 달리 손은 찰흙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타인의 양물을 붙잡아 조물조물했다.

    “마음에 듭니까?”

    “네?”

    “해민 씨 거예요.”

    뭔 소리야. 내 건 멀쩡히 아래에 잘 붙어 있는데.

    뭐든 다 주고 싶어 하는 이환의 마음도 알겠고, 이환의 거시기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의 사타구니에 붙어 있는 양물이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었다.

    개소리하지 말라며 붙잡고 있던 성기를 꽉 잡아 쥐자 이환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 죄송해요!”

    남자 대 남자로 못 할 짓을 했음을 깨닫고 빠르게 사과했다. “괜찮으세요?” 하고 묻자 잠시 침묵하던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천국 문턱을 밟은 기분입니다.”

    좋았다는 의미일까, 아팠다는 의미일까. 어떤 이유로든 죽을 것 같았다는 의미가 충분히 전해져 왔다.

    “장난 그만치고 얼른 쉬세요.”

    쥐고 있던 물건을 놓아주고 바지춤에서 손을 빼내며 타박했다.

    회장님을 만나고 온 일도 그렇고, 이억이 든 돈 봉투를 받아 온 일도 그렇고. 오늘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며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맥없이 풀리는 기분이다.

    항상 그랬다. 긴장을 하고, 걱정을 하고, 온갖 잡생각이 들다가도 이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별것 아닌 일들이 되어 버린다.

    “전 일어날래요.”

    “내 자지를 세워 놓고 그냥 가겠다고요?”

    주물럭거리던 엉덩이를 꽉 힘주어 잡으며 이환이 물었다.

    “실장님.”

    “그러지 말고 잠깐만 같이 누워 있어요.”

    “잠깐도 아닐 것 같고, 누워만 있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뭐든 처음엔 사소하게 시작하는 겁니다.”

    그 말이 이런 상황에 쓸 말이 아니라는 것만 알겠다.

    “실장님. 저희……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요.”

    “양심 있습니까?”

    “네?”

    불쑥 튀어나온 타박에 눈을 끔뻑거렸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와 버렸네요.”

    그 어느 때보다 이환의 진심을 엿본 기분이다. 헛웃음을 내뱉자 이환이 손가락으로 내 뺨을 쿡 찔렀다.

    “해민 씨.”

    “네.”

    “나는 해민 씨가 했던 말 다 기억합니다.”

    “…….”

    “해민 씨, 예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호텔 개관식 때, 호텔에서 하룻밤 보냈던 날. 나한테 너무 과하다면서, 하루에 한 번씩 하자고 했잖아요.”

    내가 했던 말을 다 기억해 주는 것은 좋은데, 너무 과거의 이야기까지 끌고 오는 것 아닌가.

    “대신 할 때마다…….”

    한 번으로 안 끝내시잖아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문득 입으로 내기가 왠지 치졸해지는 기분이다. 왜 이런 걸로 아웅다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유치해지는 기분도 들고, 마치 내가 이환의 요구에 선심 쓰듯 응해 준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흠칫했다.

    내 침묵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환이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주었다.

    “미안해요. 장난치고 싶었는데, 억지가 심해졌나 봅니다. 기분 상했습니까?”

    팔을 뻗어 이환의 목을 꽈악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실장님이랑 하는 거…… 기분 좋아요. 실장님이 부드럽게 만져 주는 것도, 거칠게 대하는 것도 다 좋아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몇 번씩 하는 것도, 힘들지만 좋아요.”

    “그래요?”

    “좋은데…… 부끄러워요.”

    “그런 것 같네요. 얼굴이랑 목덜미가 뜨겁습니다.”

    뺨을 마주 대고 비비며 이환이 작게 웃었다. 계절은 겨울을 향해 가고 있는데, 그의 숨결에서 봄바람이 느껴졌다. 따스했고, 간질간질했다.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면 어색해요. 긴장되고. ‘지금부터 섹스할 거야.’ 하고 각 잡고 옷 벗고 침대에 누워서 할 때는 괜찮은데, 평범하게 있다가 분위기가 바뀌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막 머릿속이 복잡해져요. 옷을 벗어야 하나. 대화를 계속해야 하나. 입으로는 저녁 반찬 이야기하면서 손으로는 옷을 벗겨야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