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방으로 들어와 문까지 꼭꼭 닫은 뒤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자 이환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실장님?”
“해민 씨랑 나, 같이 산 이래로 해민 씨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드디어 실감 나네요. 나한테 한 걸음 더 다가왔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온 신경이 돈 봉투에 쏠려 있어 이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처럼 이환 또한 다급해 보였으나, 그 방향은 매우 다른 듯 느껴졌다. 그는 꽉 붙잡은 내 몸을 덜렁 안아 올려 침대로 성큼성큼 걸었다.
물론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돈 봉투를 고이 모셔 놨기에 그쪽으로 가야 하긴 했지만, 지금 좀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쿠션 좋은 침대에 풀썩 눕혀졌다. 내 위로 쓰러지듯 같이 누운 이환이 다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시, 실장님. 실장님…….”
“네, 해민 씨. 나도 그래요.”
뭐가 그래요.
말도 못 하게 계속 입을 부벼 대고 알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리는 이환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정작 맞은 사람은 조금의 타격도 없는 얼굴이고 때리는 사람의 주먹만 아픈 시도였지만.
“실장니임, 잠깐만요.”
팔을 쭉 뻗어 버둥거리다 겨우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손가락에 잡히는 봉투를 끄집어내 자꾸 들이미는 이환의 입술에 턱 붙여 놓았다.
“……해민 씨?”
“그거요.”
“네?”
“아까 회장님 뵙고 왔잖아요. 회장님이 주고 가셨어요.”
어느새 슈트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던 이환은 제 얼굴을 가로막은 봉투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아아.”
“받았을 때는 실감이 안 나더니, 서랍에 넣어 두니까 불안해서요. 얼른 드리고 싶었어요.”
“……그럼 이거 주려고?”
이것 때문에 퇴근하는 사람을 그리 급하게 방으로 데려온 거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해민 씨가 내 퇴근을 반기는 줄 알았는데.”
“네. 빨리 퇴근하시기를 계속 계속 기다렸어요.”
“아…….”
이환이 힘없이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실장님?”
“잠깐만 이러고 있읍시다. 나 지금 삶의 의욕을 잃은 기분입니다.”
“네?”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네에?”
왜 갑자기 삶의 의욕을 잃었어!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내게 기대 오는 남자의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오늘 많이 힘드셨어요?”
“……네, 좀 힘드네요.”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내 용건만 급해서 열심히 일하고 온 사람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끌고 왔다.
“네. 해민 씨는 좀 죄송해야 합니다.”
평소라면 말이라도 ‘아니다’라고 했을 사람인데. 오늘 진짜 힘들었나 보다.
“그럼 얼른 옷 갈아입고 씻어요. 저녁 먹기 전까지만이라도 좀 누워 계세요.”
“내 방까지 갈 힘도 없습니다. 나 완전 탈진 상태예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이환의 몸을 밀어 침대에 눕혔다. 방금 내 몸을 번쩍 들어 옮긴 남자가 한순간 탈진이라니. 살짝 믿음이 흔들렸으나, 힘 빠진 이환의 얼굴을 보니 그 불신도 금방 사라졌다.
“그럼 여기라도 누워 계세요. 제가 저녁 식사 시간 되면 깨워 드릴게요.”
“네, 그럽시다.”
냉큼 편한 자세를 취하며 누운 이환이 일어나려는 내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얼결에 이환의 옆으로 쓰러지듯 눕자, 그가 내 머리 밑으로 팔을 쑥 집어넣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실장님?”
“조금만 이러고 있어요.”
“둘이 눕기엔 침대가 좁아요. 편히 누워서 쉬셔야죠.”
“좁으니까 바짝 붙어서 껴안고 있어야겠네.”
그냥 나를 놓아주는 편이 더 좋을 듯싶은데. 이환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지 나를 바짝 당겨 안았다. 그의 팔과 가슴에 짜부라지듯 눌리며 죽부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랑 만나서 무슨 얘기 했습니까? 우산은 가져갔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손으로 내 몸뚱이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이환이 물었다. 정말 걱정이 되어 검사를 해 봐야겠다기보다 그 핑계로 추행을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이 드는 손길이었다.
애초에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왔다면,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쫓아왔겠지.
이걸 좋게 봐야 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쪽으로는 이환에게 믿음이 있었다.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구보다 이환이 가장 먼저 알게 될 거라고. 내가 나서서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냥…….”
팔과 어깨, 가슴을 거쳐 말랑말랑한 배를 은근한 손길로 만지작거리는 이환을 모른 척하며 낮의 일을 떠올렸다.
“조용히 오라고 했는데, 실장님에게 말하고 경호원까지 끌고 시끄럽게 왔다면서 화내셨어요.”
“저런. 시끌벅적하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요.”
“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조용히 오라고 하신 게 아니라 실장님이랑 같이 오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나이가 들면 원래 자기가 했던 말도 기억 못 하고, 안 한 말도 했다고 우기고, 괜히 목소리만 커지고 그럽니다. 그러다 노망나는 거죠.”
“…….”
회장님이 아직 그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이환의 말투가 뾰족하게 가시가 돋친 듯 느껴져서 그냥 모른 척했다.
“그리고 돈 봉투 주시면서 실장님한테서 떨어지라고 하셨어요.”
“냉큼 받아 온 겁니까?”
“냉큼까지는 아니고요. 회장님이 화내면서 가시는 바람에 챙겨 온 거예요. 거기 두고 올 수는 없으니까, 실장님 드리려고요.”
“그 양반은 왜 사람 불러 놓고 화를 냅니까?”
“경고는 한 번뿐이라고 하시던데요.”
“경고는 무슨.”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이환이 봉투 안을 살폈다. 그의 손가락에 수표 두 장이 잡혀 나왔다.
“이억이네요.”
“네. 막상 받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집에 오니까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해지더라고요. 얼른 내 손을 떠나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아서, 실장님 퇴근하자마자 모시고 온 거예요.”
“그래도 나름 많이 넣으셨네요.”
“많이 주신 거예요?”
“아버지가 그룹 회장님이라 통이 클 것 같죠?”
“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어디 회사 사장도 아니고, 온갖 것들 다 파는 그룹이 아닌가. 계열사만 해도 몇 개이고, 회장님 아래 부리는 사장들만 해도 몇 명인가.
그런 회장님인데 먹는 음식, 입는 옷, 타는 차, 생활하는 집 모두 어지간하지는 않겠지.
“본인이나 가족한테는 씀씀이가 큽니다. 본인은 그만큼 벌었으니 쓰는 게 당연할 거고, 가족은 남들 시선이 있으니 그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시거든요. 그런데 타인에게는 수전노입니다. 동전 하나 남한테 공으로 주는 것을 싫어해요. 심지어 응당 줘야 할 것임에도 주지 않으면 좋고, 줘도 어떻게든 깎으려 하죠.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아끼고 노력했으니 돈을 버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심보가 고약한 겁니다.”
“그래도 실장님 아버지인데, 너무 신랄한 평가 같아요.”
“이 정도면 딱 적당한 평가입니다.”
오히려 아버지라서 험한 말을 참고 있는 거라며 이환이 불퉁거렸다.
“이거는 가지고 있다가 해민 씨 까까 사 먹어요.”
꺼냈던 수표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이환이 말했다.
“싫어요.”
“네?”
“훔쳐 갈 사람이 없다는 거 알면서도, 서랍에 넣어 둔 내내 엄청 불안했거든요. 저는 이제 편해지고 싶어요.”
더 이상 서랍 속에 불안함을 넣어 두고 싶지 않다며 얌전히 거절했다.
“그럼 내가 내일 해민 씨 통장으로 입금해 주겠습니다.”
“그것도 싫어요. 제가 받을 돈도 아니고, 받을 이유도 없는 돈이에요.”
말했듯이 냉큼 받아 온 돈이 아니었다. 회장님이 그냥 놓고 가 버려서 어쩔 수 없이 챙겨 온 것이지.
중간에 나를 거치긴 했지만, 회장님에게서 나온 돈이 회장님 아들에게 돌아갔으니 돈은 여전히 회장님 가족 품에 있다고 말해도 되겠지. ……되겠지? 아마도 될 것이다.
나 혼자 정리를 끝내고 고개를 주억이자, 이환이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느냐며 내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안 가질 겁니까?”
“네.”
“이억이면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분간 해민 씨가 사고 싶었던 것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신나게 놀 수 있을 텐데?”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건 여사님이 해 주시잖아요. 신나게 뭘 하면서 놀아야 이억을 쓰는지도 모르겠고요. 일단 제 돈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쓸 마음도 안 생겨요.”
십만 원, 백만 원이면 조금 욕심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억이라고 하니 현실감이 안 들었다. 저 돈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 무얼 하고 싶은지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돈은 돌려주는 것이 나았다.
“내 요정님은 정말 물욕도 없네.”
“저도 욕심 많아요.”
“그래요? 욕심이 많아요?”
어이구, 욕심이 많았어요. 하고 놀리는 투로 말하는 이환을 힐긋 흘겨보았다.
“저도 이것저것 욕심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참아지더라고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게 한두 개인가 싶어서, 욕심도 가지지 않기로 했어요. 욕심은…… 하나로 만족되질 않더라고요. 좋은 옷을 입으면 좋은 신발을 신고 싶고. 머리도 예쁘게 꾸미고 싶고. 좋은 가방을 메고 싶고. 그렇게 좋은 것들을 가지게 되면, 그것들을 보관해 둘 넓은 집이 필요하고. 언젠가는 좋은 옷이 구겨지지 않게 차가 사고 싶어질 거고. 계속 계속 필요한 게 늘어 가잖아요.”
“나는 이제껏 해민 씨가 욕심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것치고는 또 너무 잘 알고 있네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거든요. 만족 못 하는 사람들.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계속 욕심만 늘지 만족은 다가오지 않더라고요.”
내 말에 이환이 으음, 하고 목을 울렸다.
“저는 남들보다 가진 것이 더 없잖아요. 그런 제가 욕심을 부리면 남들보다 더 채워야 할 게 많다는 뜻이고요. 그걸 생각하니 너무 암담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찍 포기했어요. ……욕심부리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