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26)화 (126/172)
  • 126화

    “……억.”

    “자네가 평생 공사장에 나가 막일을 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지. 환이도 한 번에 그 정도는 주지 않을 거야. 기껏해야 백, 이백, 용돈이나 하라며 던져 주겠지. 나는 후하게 배팅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받아들이겠는가?”

    “아닌데.”

    용돈 하라고 백, 이백 던져 주었던 적이 없다. 이환에게 이것저것 선물을 많이 받긴 했지만, 돈은 월급을 제외하고는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내게 돈을 줄 이유도 없고, 내가 그에게서 월급이 아닌 돈을 받을 이유도 없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에요. 실장님이 강남 오피스텔 이야기를 하셔서요. 사 주신다고 해도 받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거든요. 가격이요. 그런데 이억으로는 어림도 없는 가격이더라고요.”

    “……뭐?”

    “이억. 엄청 큰돈인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또 엄청 큰돈은 아닌 것 같아요.”

    봉투에서 꺼낸 두 장의 수표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펼쳐 놓으며 말하자, 회장님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어디서 막노동이나 하며 굴러먹던 놈이, 내 아들한테 들러붙어서 뭐? 큰돈이 아니야?”

    “이억은 제 가치인가요?”

    “네 가치? 네 가치가 이억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너는 백만 원, 아니, 십만 원의 가치도 없는 놈이다.”

    너무하시네. 그래도 공사장 하루 나가 일하면 십만 원은 넘게 버는데.

    “그럼 이건 실장님의 가치인가요?”

    “네가 감히 내 아들의 가치를 논해? 그 돈은 내 아들 곁에서 너 같은 버러지를 치우는 데에 들이는 수고, 인력, 시간, 땅바닥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헛된 것들의 값어치다.”

    같은 의미라도 듣는 사람을 참 아프게 하는 방식의 언변을 구사하신다. 뭐, 돈 봉투가 날아오는 이런 상황에서 상냥하고 다정한 말이 나오지는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당해 보니 역시나 기분이 별로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장의 수표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한 장을 집어 봉투에 넣고, 남은 한 장을 회장님 앞에 밀어 놓았다.

    “왜? 두 장 다 먹으면 탈 날까 봐? 됐다. 줬다 뺏을 생각 없으니 다 챙겨 가. 나는 끝맺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괜히 구질구질하게 환이에게 미련 남기지 말고, 그거 가지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라.”

    “아뇨. 그게 아니라……. 이거 받으시고 회장님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 주세요. 실장님도 회장님이랑 부회장님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요. 알고 계시죠? 그런데 자꾸 회장님이 끝맺음을 못 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제가 드린 돈 받고 떨어져 주세요. 그 돈은 제가 생각하는 ‘실장님이 회장님과의 깔끔한 이별을 위해 들이는 수고, 인력, 시간’의 가치예요.”

    사실 일억도 너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거스름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내 말에 회장님이 손으로 테이블을 쾅 때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붉어지고, 노기를 품은 입매가 파들파들 떨렸다.

    “네가, 감히…….”

    고집 센 노인네의 얼굴을 평온하게 바라보았다.

    “실장님을 좀 가만히 두셨으면 좋겠어요. 자식 낳아서 지금까지 잘 써먹었으면 충분하시잖아요. 실장님은 거래라고 말했지만, 제가 보기엔 학대 같아요. 부모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거절이라는 뜻이구나.”

    내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얼굴로 회장님이 침음을 흘렸다. 그래, 하고 작게 중얼거린 회장님이 흉흉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구질구질했던 네 삶이 앞으로 많이 힘들어질 거다. 제대로 먹고, 자고, 일할 생각은 마라. 앞으로 널 받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원래도 없었는데?

    참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도 제대로 먹고, 자고, 일하지 못했는데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고. 여관방이나 고시원을 전전하는 것도 감지덕지한 인생이었고, 가방끈 짧은 내가 취직할 수 있는 회사도 없기에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일용직이었다.

    “밑바닥 인생이라 그런지 전혀 무서울 것 없다는 얼굴이구나. 배짱이 좋아. 그래, 내 아들에게 들러붙어 등쳐 먹을 생각을 하는 놈인데,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닌데. 그냥 회장님이 경고하는 그것들이 원래도 없어서, 지금 생활과 뭐가 다른가 잠시 생각했을 뿐인데.

    괜한 오해에 조금 억울해졌다.

    “네 어미가 병원에 있다지.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병원비를 대고 있고. 버러지 같은 네놈도 부모는 소중한 모양인데.”

    역시나 그것도 아닌데.

    회장님의 오해는 깊기만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네 어미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하루아침에 네 어미가 죽는다면.”

    “……진짜요?”

    “왜? 꼴에 제 어미는 소중한 모양이지?”

    “정말…… 그래 주실래요?”

    “뭐?”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실래요? 엄마가…… 너무 안 죽어요. 하루하루 제발 좀 죽어 달라고 기도하는데, 죽지를 않아요.”

    그렇다고 엄마를 버리거나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잖아요. 내가 사람답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남고 싶거든요. 그래서 내 손으로 끊어 낼 수가 없더라고요.

    “하, 이런 미친놈.”

    부모의 생명을 인질로 하는 협박에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의 내용에 맞게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내뱉었으니 미친놈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아니, 어떤 표정이든 어떤 목소리든. 아들이 제 어미를 두고 제발 죽어 달라고 하는데, 누가 제정신으로 볼까.

    힘없이 웃어 버리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회장님이 헛웃음을 흘렸다.

    “네 말이 진심이라면 밑바닥 인생답게 제 보신만 중한 놈답다 할 수 있겠고,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이라면……. 그래, 제법 머리를 잘 굴렸구나.”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 회장님이 테이블을 손으로 탕탕 두드렸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회장님을 만나서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계속 진실만 말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나와 회장님 사이의 오해는 사라질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경고는 한 번뿐이다. 네 선택에 따른 결과에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싶구나.”

    그리 말한 회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찻집을 휘적휘적 나가 버렸다.

    ……사람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냥 가 버리네.

    이걸로 끝인가? 진짜 끝인가?

    오라고 해서 왔더니 오해만 잔뜩 받고 뭔가 마무리가 안 된 기분이다. 끝맺음을 중요시한다는 회장님은 아무리 봐도 끝맺음이 깔끔하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일억짜리 수표를 집어 봉투에 챙겨 넣었다. 뭐 어쩌라는 말도 없이 그냥 두고 가셨으니 챙겨 가서 이환에게 주면 되겠지.

    모과차를 끝까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때마침 찻집 사장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네.”

    “서비스로 주신 떡이요. 혹시 판매도 하시나요?”

    내 물음에 사장님이 “그럼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음, 한 상자 포장해 주세요.”

    차 한 잔에 이만 원이 넘는 가게에서 떡 한 상자는 또 얼마를 받을까 잠시 걱정이 되었으나, 확실히 맛이 있었고 한두 개로는 양이 차지 않을 듯하여 통 큰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월급도 많이 받았고, 이환이나 여사님이 많이 챙겨 주셨으니까. 나도 한 번쯤은 그들을 챙기고 싶었다.

    근데 한 상자에 떡이 몇 개나 들어가는지 정도는 물어볼 걸 그랬나? 막 귤 박스 크기로 가져오시면 어쩌지. 그건 좀 많을 것 같은데.

    내 걱정이 우습게도 사장님이 가져오신 떡 상자는 두 손을 펼쳐 모은 정도의 크기였다. 기껏해야 열댓 개 정도 들어 있으려나.

    “어, 얼마예요? 찻값이랑 같이 계산해 주세요.”

    “아. 계산은 안 하셔도 됩니다. 회장님께 미리 받았으니까요.”

    떡 상자를 쑥색 한지로 곱게 포장하며 사장님이 웃으셨다.

    “아…….”

    회장님이 가게를 전세 냈으니 따로 찻값을 안 받으시는구나. 그걸 미리 알았다면 가장 가격이 싼 차를 마시겠다고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나는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사장님.”

    “네?”

    “떡 두 상자 추가요. 그거 너무 적네요. 한 사람당 한 상자씩은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아…… 하하, 네.”

    침중한 내 부름에 의아한 얼굴을 하던 사장님의 표정이 이내 떨떠름하게 변했다.

    ∞ ∞ ∞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며 여사님과 떡을 나눠 먹었지만, 방에 두고 온 봉투가 못내 신경 쓰였다. 그 안에 든 일억짜리 수표 두 장이 혹시라도 사라지지는 않을까,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지 하고 자꾸 헛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일찍 퇴근한 이환이 그렇게도 반가웠나 보다.

    퇴근을 알리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이환을 한걸음에 달려 나가 맞이했다. 그런 내 마중이 어지간히도 낯설었는지 이환이 놀란 얼굴을 했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내가 보고 싶었습니까?”

    “네.”

    단박에 나오는 대꾸에 이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 좋다며 미소를 띠었다.

    “해민 씨가 이렇게 반겨 주니 너무 좋은데요.”

    “그보다 실장님, 저랑 잠깐 이 층 좀…….”

    이환의 소매 끝을 잡고 표나지 않게 잡아당기며 이 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손짓에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소곤거리는 게 이상할 만도 하건만, 여사님은 실실 웃으며 모른 척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왠지 비밀을 만드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나도 급한 사정이 있기에 얼른 이환을 끌고 이 층으로 올라섰다.

    “이리로요.”

    퇴근했으니 옷도 갈아입어야겠고 씻기도 해야겠지만, 그보다 내 방에 있는 돈 봉투가 더 급했다. 그 돈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이환에게 주어야 이 불안함이 없어질 듯했다. 통장에 있는 돈도 아니고, 봉투에 덜렁 들어 있는 수표는 새가슴에게 크나큰 부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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