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25)화 (125/172)
  • 125화

    정도를 모르는 이환의 스케일에 당황하기도 전에, 중간쯤 서 있는 차로 안내되어 올라탔다. 골목을 일렬로 달려 큰 도로로 나오자, 미리 계획된 것처럼 내가 타고 있는 차의 앞, 뒤, 옆으로 다른 차들이 이동하여 감쌌다.

    한마디로 도로 위의 민폐였다.

    문득, 사진이 찍혀서 SNS에 올라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회장님도 이런 식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이환에게 한 소리를 하려고 휴대폰을 들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환도 어지간히 걱정이 되니 그랬겠지. 다 내 안전을 고려해 벌인 일이니 과하다고 쓴소리를 할 입장도 못 되었다. 회장님을 만나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호들갑을 떨었던 것은 나니까. 덕분에 두려움도 사라지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든든한 마음이 들지 않나.

    남들 보기 창피하고, 이런 일로 동원된 경호원들에게 미안하고, 이환의 과한 보호에 질겁하면서도 고맙고 든든하고. 복잡한 속내를 진정시키다 보니 약속 장소에 도달했다.

    내가 내리기도 전에 재빨리 움직인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과한 대접에 면구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감사 인사를 하고 후다닥 내렸다. 먼저 내려서 있던 경호원들이 재빠르게 나를 감쌌다.

    저기요. 경호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앞이 안 보입니다.

    “저…… 들어가 봐야 하는데요.”

    이리저리 빠져나갈 틈도 없이 나를 에워싸고 움직이지 않는 경호원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해 보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접선 장소의 안전이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아, 네에…….”

    무려 접선 장소인가.

    너무나도 전문적인 냄새가 나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회장님과 만날 약속 장소에 어떤 위험과 어떤 안전을 파악해야 할까. 테러는 아닐 테고. 회장님이 동원한 무장 인원? 혹은 도청? 납치?

    이런저런 헛생각을 하며 신발 앞부리를 바닥에 콩콩 찧고 있자, 오 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고 앞이 열렸다. 찻집 앞까지 무더기로 에스코트를 해 준 경호원들이 문을 열어 주고 가게 앞을 지키고 섰다.

    찻집 안을 둘러보았다. 저렇게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으면 영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찻집 안의 손님은 단 한 테이블뿐이었다.

    그 큰 SG 그룹의 회장님이 찾는 가게인데, 파리 날리는 가게이지는 않을 테고. 역시나 회장님이 잠시 전세를 내신 모양이다.

    뚜벅뚜벅 걸어가 회장님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먼저 와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앉아 있던 회장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딱 맞춰 왔구나.”

    “네. 차가 안 막혀서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회장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일단 앉게.”

    “네.”

    회장님의 맞은편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장님.”

    “뭐지?”

    “혹시 메뉴판 보셨어요?”

    “…….”

    “이런 데는 일인 일 주문이 예의라고 하던데…….”

    들어오면서 봤지만 카페처럼 카운터에 메뉴판이 걸려 있지는 않았다. 그럼 메뉴판을 따로 준다는 말인데, 그럴 만한 가게 주인이나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강 사장.”

    “네, 회장님.”

    회장님의 부름에 안 보이는 어딘가에 있던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에게 메뉴판 좀 주지.”

    “네, 회장님.”

    찻집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가져다준 메뉴판은 신기하게도 나무판이었다. 넓고 얇은 나무판에 창호지 같은 종이를 덧바르고 그 위에 서예처럼 메뉴를 적어 둔 모양새였다.

    가격 인상할 때마다 메뉴판은 새로 만드는 걸까.

    헛생각을 하며 메뉴를 살펴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차 한 잔이 설렁탕 한 그릇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이만 원이 넘는 가격을 보다가 개중에 가장 싼 축에 속하는 모과차를 골랐다.

    “이야기는 차 나온 뒤에 천천히 하세.”

    그리 말하고 차를 홀짝거리는 회장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불편할 만도 한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른 척 차만 마시는 회장님도 참 얼굴이 두꺼운 듯했다.

    잠시 기다리자 뜨거운 김이 폴폴 올라오는 모과차가 내 앞에 놓였다.

    “강 사장. 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는데 자리 좀 비켜 주지.”

    “그럼요, 회장님.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아무리 그룹 회장이라도 가게 사장한테 가게에서 나가 달라는 요구가 정당한가 의문이 들었으나,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몰라도 가게를 전세 냈으면 나가 달라고 할 수도 있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시려는 모양이구나 싶어서 호호 불어 겨우 맛만 보았던 모과차를 내려놓았다.

    “조용히 오라고 했더니, 그걸 못 참고 환이에게 쪼르르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말을 전했더군.”

    “정확히는 실장님 달고 오지 말고 혼자 오라고만 하셨거든요.”

    “그래서, 사방팔방 광고하며 저렇게 우르르 몰려와?”

    아무리 생각해도 조용히 오라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다. 그냥 이환이랑 동행하지 말라고만 했을 뿐. 그래서 이환에게 전화로 사정 설명을 한 것도, 경호원들과 동행한 것도 크게 괘념하지 않았다.

    “머리가 나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하나를 이야기해도 전부를 볼 줄 알아야지.”

    하나를 이야기하면 하나만 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전부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전부를 봐.

    그리고 면전에서 머리 나쁘다는 욕을 듣는 것도 기분 나쁘다. 이환이 똑똑하다 현명하다 말할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 칭찬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지만, 대놓고 머리 나쁘다는 지적을 듣는 것도 좋지는 않았다.

    욱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으나 목구멍에서 겨우 틀어막았다.

    곁들여 먹으라고 나온 경단 하나를 나무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씹었다. 분명 입을 벌리면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일단 뭐라도 집어넣어 막아 보자 싶어서 먹은 것인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쫀득쫀득하고.

    이것도 파는 메뉴인가. 모과차는 돈이 아까운데, 이건 집에 갈 때 사 가도 좋을 듯했다.

    하나를 더 입에 넣고 씹자, 회장님이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고 사는 놈이라 그런지 눈치도 없이 일단 입에 넣고 보는구나.”

    “제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빌어먹은 적 없고요. 이거라도 입에 안 넣으면 험한 말 나올까 봐 그렇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똥을 싸는 노인네라고 해도, 일단은 나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은 양반인데. 그런 노인네에게 대거리를 하면 나만 손해다.

    아직까지 유교 사상이 팽배한 대한민국은 나이가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똑같이 개소리를 지껄여도 노인이 청년한테 하면 설교고, 청년이 노인에게 하면 지랄이라고 생각한다.

    “배워 먹지 못한 티가 철철 흐르는구나. 못 배우고 자란 놈들은 숨길 수가 없지.”

    시험 보는 자리도 아니고 회사 면접도 아닌데 학벌로 공격하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 그래도 못 배운 건 사실이라 조용히 참았다.

    “네가 왜 환이 옆에 붙어 있는지 안다. 옆에서 살살 부추기면 한 재산 챙길 수 있을 것 같았겠지. 하지만 너는 환이를 몰라. 그 아이가 얼마나 냉정하고 칼 같은지. 가족에게도 그러한데, 너라고 천년만년 옆에 끼고 있을 것 같으냐? 지금이야 너란 놈이 신기하고 재밌으니 옆에 끼고 있겠지만, 애당초 사람에게 정이 없는 녀석이 너를 얼마나 데리고 있을까.”

    “저는…….”

    “내 말부터 들어.”

    옆에서 살살 부추기지도 않았고, 한 재산 챙길 생각도 없다. 이환이 가족에게 냉정하고 칼 같은 건,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이환을 가족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으나, 형을 위해 동생의 인생을 희생하게끔 아버지가 묵인하는 이환의 가족 또한 정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네게 관심을 가지고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반년? 일 년? 길어도 이 년은 넘지 않을 거다. 그사이에 네가 얼마나 챙길 수 있을 것 같지? 환이가 네게 관심을 보일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사이에 네가 악착같이 뜯어내려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 시간은 더 짧아질 터인데.”

    “저는 딱히…….”

    “어쩌면 일 년도 못 채우고 쫓겨날 수도 있겠구나.”

    딱히 이환에게 돈을 뜯어내고 어쩌고 할 생각도 없다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회장님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돈을 뜯어낼 생각이 없는데 회장님은 내가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대화가 통할 리도 없었다.

    “이거 받게.”

    회장님은 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거면 자네도 만족할 수 있겠지. 더한 욕심은 부리지 마. 환이 옆에 있는다고 그보다 더 뜯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접어. 푼돈 조금씩 받고 가끔 던져 주는 선물이나 받겠지, 환이한테도 그 정도 목돈은 받지 못할 걸세. 자네가 돈 얘기를 꺼내는 순간, 있던 정도 떨어질 녀석이니.”

    오, 드디어 받아 보는구나. 돈 봉투.

    주스, 커피, 김치, 싸대기, 머리채 등등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왔는데, 개중에 가장 아프지 않은 방법이라 좋았다.

    그렇다고 돈 욕심이 난다는 뜻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티브이로만 보던 상황이 내게 펼쳐졌다는 신기함과 티브이에서나 보던 돈 봉투에는 과연 얼마가 들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회장님이 밀어 준 돈 봉투를 냉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도 얇은 두께감. 딱 달라붙어 안이 보이지 않는 봉투에 후 바람을 불자, 그제야 입구가 열렸다.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가 저속하고 천박하기는.”

    내 행동을 지켜보던 회장님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비난했다.

    봉투 입구가 안 벌어져서 입으로 바람을 분 것뿐인데. 마치 돈 셀 때 손가락에 침 한번 안 묻혀 본 사람처럼 말씀을 하신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회장님 손으로 돈다발은 무리더라도 두툼한 종이 뭉치 한번 세어 보게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봉투 안에는 달랑 종이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다만 만 원권도 아니고 오만 원권도 아닌 수표라는 점이 나를 놀라게 했다. 공이 하나, 둘, 셋,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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