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응? 왜 그래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사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는 번호라서요.”
“받아서 잘못 걸었다고 해 줘.”
그보다는 이 정도까지 끈질긴 것으로 보아 회장님 연락이 아닌가 싶지만. 사정을 알지 못하는 여사님에게는 그냥 어설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요즘 보이스피싱이 많잖아요. 모르는 번호는 아예 안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회장님으로 추정되는 연락처가 보이스피싱으로 둔갑하였으나, 여사님은 “그래?” 하고 심드렁하게 넘길 뿐이었다.
한참 동안 발신과 수신 거절을 반복하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신해민 씨, 회장님 연락입니다. 전화 받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하는 연락인지 적혀 있는 메시지에 더는 수신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 층으로 올라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신해민 씨?
“네.”
―회장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예의를 차려서 대화 나누세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초면에 나한테 예의를 차리라고 했다. 무릎이라도 꿇고 전화를 받으라는 걸까. 이 층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방만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으나 휴대폰 반대쪽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르겠지. 약간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크흠, 날세.
잠깐의 공백 뒤에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그래.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기계에 대고 할 말은 아니지. 잠깐 얼굴 좀 보세나.
“……네에.”
그냥 기계에 대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아직도 환이 집에 더부살이 중인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묻는 건 무슨 심보인지. “네.” 하고 선선히 답했으나 심정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집 앞으로 사람을 보내겠네. 그 차 타고 오시게나.
“언제요?”
―지금.
아……, 지금. 바로 지금. 일 분 대기조 취급하듯 지금 당장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환이 그놈 달고 오지 말고 혼자 오게.
떨떠름하게 “네에.” 하고 답하자 전화가 뚝 끊겼다. 잠잠해진 휴대폰을 들고 눈을 멀뚱거리다 냉큼 이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네, 해민 씨.
“회장님에게 연락 왔어요.”
―전화 안 받겠다더니, 받았습니까?
“한 열 번 정도 통화를 거절했더니 메시지가 와서요. 받지 않을 명분이 없었어요.”
내 상황 설명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차 보낼 테니까 바로 오라고요.”
―그래요. 출근한 날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연락을 했군요. 아버지…… 만나러 갈 겁니까?
“차랑 사람이랑 보내신다는데, 안 간다고 해도 끌려가지 않을까요.”
―일단 상주 경호원이 막을 겁니다. 지금 추가 인력 투입할 거고요.
“그러다 싸움이라도 일어나면요?”
―그러라고 보내는 건데요, 뭐. 그쪽에서 얌전히 돌아가면 별일 없을 겁니다. 힘으로 밀고 들어오겠다면 힘으로 막아야죠.
마치 그걸 기대하고 있다는 듯, 이환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그럼…… 제가 만나러 가겠다고 하면요? 실장님 달고 오지 말라고 하시던데.”
―그래서, 안 달고 갈 겁니까?
“갈 거라면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그럼 나 대신 경호원을 데려가요.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 기다려서.
그거라면 뭐. 회장님도 이환이랑 같이 오지 말라고 했지, 경호원 데려오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으니까.
―그래서 가려고요?
“갈까요? ……말까요.”
이럴 때는 안 가는 게 좋은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항상 나가서 만나더라. 무슨 얘기 할지 뻔하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서 그럴까. ‘아니, 저길 왜 굳이 기어 나가.’ 하고 답답해하지만, 막상 본인 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되는 걸까.
“잘 모르겠어요. 안 나가는 게 맞는데, 안 나갔다가 회장님이 화나서 억지로 끌고 가면 어떻게 해요. 얌전히 오라고 할 때 가야지 몸이라도 성하지 않을까 싶고.”
내 한탄을 들은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가면 몸은 성할 것 같습니까?
“뭔가 자존심 뭉개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그래도 때리지는 않으실 것 같아서요.”
―나는 해민 씨가 몸도 마음도 안 다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 듣는다고 마음 다칠 수준은 지나서요.”
―내 요정님이 단단한 건 좋지만, 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럼 가지 말까요. 아으아아아. 모르겠어요. 이러고 있는 시간에 회장님이 보낸 사람이 도착할 것 같은데……. 오면 어떻게 하죠? 간다고 했는데 안 간다고 하면 더 화내실 것 같은데. 그냥 안 간다고 말을 했어야 했나. 이건 너무 늦은 후회죠? 역시 가야겠어요.”
이런 일이 있으리란 것을 이환에게 미리 듣고 마음의 준비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엉망이었다. 전화를 받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은 메시지 한 통에 무너졌고, 전화를 받아도 가지 않겠다고 해야지 라던 다짐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평소와 다르게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이환이 “해민 씨. 해민 씨?” 하고 나를 불렀다.
―진정하고…….
“진정이 안 돼요!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요.”
―자. 크게 심호흡해요. 눈 감고, 숨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숨 들이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저 죽을 것 같은데, 언제 뱉어요?”
이환의 말처럼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들이마셨다가…… 숨이 막혀서 물어보았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습니까?
웃음기 어린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다녀올게요.”
계속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보다, 회장님을 만나고 오는 편이 낫겠다. 가서 쌍욕을 듣든, 물벼락을 맞든, 돈 봉투를 받든, 아무튼 나가서 회장님을 한 번은 만나야지 그다음에 만날 일이 없겠지. 오늘 나가지 않는다면 계속 이렇게 마음을 졸일 게 분명했다.
다짐과 같은 내 말에 이환이 흐음, 하고 목을 울렸다.
―그럼 전화 끊고 잠깐 기다려요. 나갈 준비만 하고 나가지는 말고.
“왜요?”
―약속 장소를 변경하려고요. 본가로 가는 건 찝찝해서. 거긴 상주 인원이 많아서 막힐 위험이 큽니다.
“아아.”
―아버지와 이야기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네.”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이환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만 했지, 이환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으니까.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려면 옷부터 갈아입고, 그 전에 밥 먹었으니까 양치부터 하고. 언제 회장님의 사람이 도착할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급하게 양치를 하고, 양치를 한 김에 세수도 다시 했다. 옷장 문을 열고 뭘 입어야 좋을까 고민하는데, 이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실장님.”
―한 시간 뒤에 찻집으로 가면 됩니다.
“찻집……이요?”
카페도 아니고 찻집? 익숙하지 않은 단어에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아버지가 가끔 가는 찻집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아버지가 보낸 차는 타지 말아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빠질 수도 있으니까. 우리 쪽 경호원이 태워다 줄 겁니다.
“저 좀 든든해졌어요.”
막연히 회장님을 만나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만 고민했던 나와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위험 요소가 생기지 않도록 틀어막는 이환이 오늘따라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내가 회장님을 만나든 만나지 않든 괜찮다고 했던 거였구나. 어느 쪽이든 나를 무사하게 만들겠다는 말뜻을 뒤늦게 이해했다.
―나 지금 칭찬받은 겁니까?
“네.”
―감동인데. 그럼 이 좋은 분위기로 저녁에 데이트할까요.
“……네.”
―네?
“해요. 데이트.”
내 단호한 대답에 와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은 이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실장님?”
―저번에 티브이에서 나오는 재벌 데이트,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놀이공원? 야간 개장 빌려 놓겠습니다. 사파리까지 싹 돕시다.
의욕 충만한 이환의 호언에 웃음을 터뜨렸다.
“동물들 자야죠!”
―하루 정도는 야근해도 됩니다. 게네들도 남의 돈으로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한 번쯤은 체험해 봐야죠.
“동물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요!”
긴장이 완전히 풀어져서 한참 동안 농담을 주고받았다.
―저번에 사 줬던 베이지 컬러 슈트 입고 가요. 그거 예쁘더라.
“그럴까요. 다녀오면 세탁 맡겨야겠지만, 그래도 예쁜 거 입고 나가는 게 좋겠죠?”
―세탁은 왜요?
“물이나 주스 날아올지도 모르니까. 아니다. 찻집이라고 했으니까 대추차나 쌍화차 이런 거?”
―날아오면 맞지 말고 피해요.
“날아오는 걸 어떻게 피해요.”
―우산 가지고 가요.
“그거 펼 시간에 맞을 것 같은데.”
―투명 비닐우산 사 가요.
가림막처럼 투명 비닐우산 펴 놓고 대화하면 맞을 일이 없다는 이환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볍게 농담으로 치부하며 넘겼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개소리여서 생각해 볼 가치도 없었다.
“저 이제 옷 갈아입고 나가 볼게요.”
―잘 다녀와요.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럴 일 없겠지만, 네. 꼭 그럴게요.”
―말 잘 들어서 착해요.
차 조심, 길 조심하고 다녀오라는 이환의 인사에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긴장하여 두근거리던 심장이 어느새 차분해졌다. 오히려 조금 기분이 좋은 듯도 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장에서 베이지색 슈트를 꺼냈다.
앞, 뒤, 옆으로 따라붙는 경호 차량을 보고 있자니 조금 멍했다.
경호 인력을 보낸다더니 그 수가 대략 스무 명이 넘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대문 앞에 좌르륵 서 있는 까만 자동차들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실장님,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