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20)화 (120/172)
  • 120화

    “네.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인데……. 만에 하나라도 그런 낌새가 보인다면, 내가 먼저 이정의 목숨줄을 틀어쥐겠습니다. 비교할 가치도 없는 놈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장남일 테니까요.”

    SG 그룹 회장님의 장남이자 SG 그룹의 부회장이며 이환의 친형인 이정의 목숨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지는 지금의 상황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해민 씨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올 겁니다. 아마도 해민 씨가 혼자 있는 타이밍을 노릴 거고, 어떻게든 해민 씨 혼자 나오도록 유도해서 만나려 할 겁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지 잠잠하기만 했다.

    “연락이 오면, 숨기지 말고 나한테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가면 안 되는 거죠?”

    “되도록 안 나갔으면 싶지만, 내 의견을 강요할 수는 없지요. 해민 씨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나가서 회장님을 만난다면 물세례도 받고, 봉투도 받고, 김치도 받고…….”

    또 받을 게 뭐가 있지.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 이환이 곱게 접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뭐 그렇게 받을 게 많습니까?”

    “그러게요. 사람의 상상력은 끝이 없어서, 무엇이 더 나올지 저도 모르겠어요.”

    딱히 회장님을 만나러 나갈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나가게 된다면…… 정말 받을 게 많겠구나, 감탄이 나왔다. 내 상상력이 빈곤한지 김치 싸대기보다 더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받지 말고 피해요. 물세례 받아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봉투는 받으면 좋겠네.”

    “네?”

    “그거 받아 와서 까까 사 먹어요.”

    “까까 사 먹으라고 주는 봉투는 아닐 것 같은데요?”

    “당연히 아니겠죠.”

    “일 그만두고 나가라는 퇴직금 같은 거 아닐까요. 그거 받으면 다른 일자리 찾아봐야 할 듯싶은데.”

    “알 게 뭡니까. 줬으면 끝이지.”

    “그럼 안 되죠!”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은 내 시선을 알아차린 이환이 뺨을 긁적였다.

    “그럼 퇴직했다가 재취업했다고 합시다.”

    ……그런 방법이?

    “먹힐 리 없잖아요.”

    내 타박 섞인 대꾸에 이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라고 웃고 있는 표정 안에서 진심을 느꼈다. 나름은 괜찮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나 보다.

    “오늘부터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안 받을 거예요.”

    “원천 차단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저한테 연락하실까요?”

    “아마도요.”

    한강뷰를 앞에 두고 어쩌다 이런 암울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이환이 몸을 펭귄처럼 양옆으로 기우뚱기우뚱 기울였다.

    “마음 같아서는 해민 씨를 안전한 곳에 얌전히 보관해 두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신경 써 주고 있구나, 라며 가슴이 살짝 뭉클해졌다가 문득 미묘한 이상함을 느꼈다. 사람을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둔다면 그건 감금이 아닌가. 안전에 너무 치중을 한 나머지, 나도 이환도 그게 감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걸까.

    “해민 씨를 억압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아버지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해민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회장님을 만나도 멀쩡할 테니까?”

    납치해서 어디에 묻어 버리는 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했으니까, 회장님을 만나러 나가도 일단은 멀쩡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인가.

    “해민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멀쩡하게 만들 테니까. 아까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한테 연락이 오면?”

    “숨기지 말고 실장님에게 말해 달라고.”

    “네. 그것만 잊지 말아요.”

    멀쩡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멀쩡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구나.

    그럴 거면 차라리 위험한 일이 생길 기회조차 없게끔 회장님을 만나러 가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하는 편이 더 확실할 텐데.

    애매하게 말하는 남자의 저의를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깨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을 풀어 내리고 몸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는 이환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실장님은 다른 어른 남자들과 달라요. 신기해요.”

    “신기할 정도입니까?”

    “대다수의 나이 먹은 남자들은 고압적이거든요.”

    왜인지 이환은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나이 먹은 남자에 속하는군요. 해민 씨가 스무 살이니, 내가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른네 살이 어디 가서 나이 많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네, 그렇군요.”

    영혼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환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 많다는 소리 듣기 싫으세요?”

    “딱히 좋다거나 싫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가 봅니다. 해민 씨에게 듣고 싶지는 않네요.”

    “저는 얼른 나이가 먹고 싶어요. 어리다고 무시당할 때마다 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는데, 스무 살이 되어도 바뀌는 게 없어서요. 돈 없다고 무시당하고, 아빠 없다고 무시당하고, 남들 학교 다닐 시간에 식당이나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무시당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나이 먹으면 어리다고 무시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요.”

    “누가 해민 씨를 무시합니까. 이렇게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 요정님을 무시하다니. 나쁜 사람들이네요.”

    손끝으로 내 뺨을 살살 문지르며 이환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이 처음이었어요. 월급 주면서도 무시하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나를 같은 사람으로 대해 준 사람.”

    아닌가. 사람보다 요정님으로 대했던 적이 더 많은가.

    “명령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고, 내 생각을 존중해 주고, 내 선택을 기다려 주는 사람.”

    “강압적이고 싶어요. 통제하고 싶고 구속하고 싶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합니다. 해민 씨를 나만 아는 곳에 가둬 두고, 다른 일,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보게 하고 싶다. 내 말만 듣게 하고 싶다. 해민 씨를 보고 있으면 매번 그런 욕망이 생깁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잖아요.”

    “해민 씨라서 그러고 싶지만, 해민 씨라서 그럴 수가 없으니까.”

    손아귀에 꽉 움켜쥐기엔 너무 소중해서 그럴 수가 없다고, 작은 상처라도 날까 무서워 욕심내기가 어렵다고.

    이환의 말을 들으며 뺨을 감싼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실장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아닐 겁니다.”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에요.”

    “…….”

    “실장님 옆에서 지낸 시간은, 내가 이제껏 살아온 세상과 너무 달랐어요. 그게 너무 현실적이지 못해서……. 처음엔 실장님이 동화에 취한 또라이,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남들도 말만 안 했을 뿐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물론 그걸 생각만 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천지 차이지만. 아무튼 괜찮다고 말한 이환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내가 동화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꼈어요. 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달콤하잖아요.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

    “내 요정님은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실장님만이 그걸 현실로 만들어 줬어요. 실장님의 다정함이 좋았고,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실장님이 떠올랐고, 보고 싶었고,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요.”

    “귀엽네요.”

    그는 마치 나를 따라 하듯 말랑말랑,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실장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런 고백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평소처럼 잔뜩 감동한 얼굴도 아니고 울먹울먹한 얼굴도 아니다.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환은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실장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불순한 것 같아요.”

    “혹시, 나랑 자는 게 너무 좋아서?”

    “네?”

    “……아니, 불순한 이유라기에. 내 몸이 좋았나 했습니다.”

    “몸도 좋긴 하시죠.”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고,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가슴도 넓고. 남자라면 한 번쯤 꿈꿔 봤을 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좋은 몸이다. 그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렇게 선뜻 동의해 주니 조금 기쁘군요. 해민 씨가 말하는 불순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지만.”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요, 실장님이 다정해서 좋아요. 친절해서 좋고, 상냥해서 좋아요. 월급을 많이 줘서 좋고,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줘서 좋아요. 그럼 저는 실장님의 부유함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좋은 거 아닐까요.”

    “…….”

    이건 진짜로 중요한 문제였다.

    너도 좋고 나도 좋으니 모두 다 좋구나, 하고 넘어갈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감정의 문제인데, 감정이 돈에 좌지우지된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건 너무 파렴치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일단, 다정하고 친절하고 상냥해서 좋다는 건 정상입니다.”

    잠시 말이 없던 이환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렇지만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줘서 좋아한다는 건 뭐랄까. 조건부 같은 느낌이잖아요.”

    “화를 내고, 구박하고, 때리고, 핍박하고, 욕을 하는 사람을 좋아해서는 안 되죠. 그런 사람도 문제이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줘서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나는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지는데. 자신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건 정상입니다.”

    “월급을 많이 줘서 좋고,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줘서 좋은 건요?”

    “그건…… 그냥 근무 조건이 좋은 일자리였다고 생각합시다. 월급을 아무리 많이 줘도 내가 해민 씨를 욕하고 구박했다면, 그래도 나를 좋아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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