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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18)화 (118/172)
  • 118화

    내 지적에 백윤경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못 날아도 조류…….”

    “크흠.”

    “아니, 조류를 조류라고 말하는데 왜…….”

    “크흠.”

    이환의 헛기침에 백윤경이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물 한 컵을 따라 이환에게 건넸다.

    “천천히 드세요.”

    “고맙습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먹다가 체하면 손해다. 물도 마시면서 먹으라고 말하자, 이환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고맙다고 속살거렸다.

    “그럼 닭이랑 타조는…….”

    “시끄럽다. 입 다물고 먹기나 해.”

    무언가 말을 하려던 백윤경이 이환에게 면박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닭이 어쩌고 조류독감이 어쩌고 하는 말을 작게 구시렁거렸다.

    “식사 끝나면 올라가서 한숨 자도록 해요. 병원에서 고생했으니 앞으로 며칠은 잘 먹고 잘 쉬어 줘야 합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계속 누워만 있었던 것도 고생이라고 할 수 있나.

    “또 쉬어요?”

    “네.”

    “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쉬고 왔는데?”

    “어디든 집에서 쉬는 것만큼 편하겠습니까.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푹 쉬도록 해요.”

    그럼 왜 병원에서 일주일이나 쉬라고 했지요? 그럴 거면 그냥 집으로 왔어도 될 일인데.

    따져 봤자 바뀌는 것은 없겠지.

    나를 환자로 지목한 이상, 이환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몸에 이상이 없지만, 언제쯤 되면 이환이 그 사실을 인정해 줄지가 유일한 의문이었다.

    “청소는 여사님이 다 해 두신 것 같더라고요. 식사 끝나면 설거지만 하고 올라갈게요.”

    “설거지는 윤경이 할 겁니다.”

    “제가요?”

    전복을 못 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전복구이만 공략하던 백윤경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물었다.

    “어.”

    “아, 저군요.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거군요.”

    “밥값 해야지.”

    “상도 제가 차리지 않았습니까.”

    “네 입에 처넣은 전복값을 충당하기엔 부족하지.”

    백윤경이 집으려는 하나 남은 전복구이를 낚아챈 이환이 그것을 내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아,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탁 소리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백윤경이 씩씩 콧김을 내뿜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나가 버렸다.

    “백 비서님 속상하신 모양이에요. 너무 구박하지 마세요.”

    먹는 것으로 구박하는 것만큼 마음 상하는 일도 없다. 설거지를 시키든 구박을 하든, 식사가 끝난 뒤에 했어도 될 일인데. 밥 먹는 와중에 그러는 건 먹지 말라고 눈치 주는 것보다 더 서러운 일이었다. 배부르게 먹으면서도 체할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지…….

    “여사님 손이 크시긴 크십니다. 아직도 많이 남은 건 몰랐죠?”

    전혀 속상하지 않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돌아온 백윤경의 손에는 전복구이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가 들려 있었다.

    눈치…… 안 받았구나.

    하긴, 이환과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 말 몇 마디에 상처받고 속상해할 시기는 지났겠지.

    앉아서 다시금 전복구이를 공략하는 백윤경을 보다가 나 또한 식사를 재개했다.

    오랜만에 여사님이 만드신 음식으로만 한 상 가득 차려 먹으니 감동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여사님이 반찬을 해서 보내 주시긴 했지만, 병원 밥에 여사님 음식 한두 가지를 곁들여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좋네요. 병원에 있는 동안 입맛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는데.”

    그때도 입맛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저 병원 밥이 부족하게 나왔을 뿐. 그래서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었는데, 이환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떡갈비도 먹어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두툼한 떡갈비를 밥 위에 올려 주며 이환이 흐뭇하게 웃었다.

    “오후에 청소 한번 해야겠다.”

    내가 밥 한술 뜰 때마다 옆에서 떡갈비와 전복구이와 오리구이를 번갈아 올려 주며 이환이 백윤경에게 말했다.

    청소는 여사님이 미리 해 두셔서 깨끗한데, 왜 갑자기 청소지? 대청소라도 할 생각인가.

    “일찍 일찍 좀 하시지.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둔 실장님도 참 독하십니다.”

    “보안팀 불러서 카메라랑 도청기 회수하고. 혹시 모르니 전체적으로 한 번 싹 훑어.”

    “네, 네.”

    “눈이 가려지면 안달 날 거다. 어떻게든 다시 설치하려고 할 테니, 바로바로 낚아서 경찰에 넘기고.”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을 테니, 그 양반도 당황하시겠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백윤경이 흥흥 콧소리를 냈다.

    옆에서 가만히 귀동냥으로 들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지 짐작해 보았다. 아마도 이 집에 이정이 설치해 두었을 몰래카메라나 도청기를 없애려는 모양이다.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아무렇지 않게 생활했지, 만약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절대 이환이나 백윤경처럼 멀쩡하게 지내지는 못했을 듯했다.

    어디에 뭐가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엄청 신경 쓰지 않았을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걱정되고, 물 한 컵 마시러 주방에 들어오면서도 전전긍긍하고, 냉장고 문 한 번 열 때마다 눈치 보고.

    지금 식당에도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저절로 입을 다물어졌다.

    “왜, 더 먹지 않고요.”

    “배가…… 불러서요.”

    “너무 적게 먹었는데요. 입맛이 없는 겁니까?”

    “그러기엔 밥그릇이 깨끗한데 말입니다.”

    백윤경이 슬쩍 내 밥그릇을 보며 말했으나 누구도 그 말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퇴원했더라도 잘 먹어야죠. 해민 씨 입맛을 되찾을 음식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몰래카메라랑 도청기만 사라져도 다시 생겨날 입맛이다. 그 전까지는 이환의 말처럼 방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드세요.”

    “해민 씨가 입맛이 없다니, 나도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드네요.”

    냉큼 젓가락을 내려놓는 이환의 모습을 보며 그냥 안 먹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마냥 해맑고 기쁜 사람은 백윤경뿐이었고, 마지막까지 홀로 젓가락을 들고 분투하던 그는 전복구이와 떡갈비와 오리구이가 담겨 있던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기어코 백윤경에게 설거지를 시키겠다는 이환을 만류하며 빈 접시를 옮겨 식기세척기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사이에 백윤경은 식당 테이블을 닦았고, 이환은 원두를 내렸다.

    “해민 씨는 꿀차 한 잔 타 줄까요?”

    “아뇨. 저도 커피 주세요. 오늘은 꿀차가 안 마시고 싶어요.”

    어딘가에서 이정이 이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꿀차를 향한 거부감이 생겨났다. 꿀차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은 사람이 했는데. 꿀차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집이 청정구역으로 돌아온다면 그때 다시 꿀차를 즐길 수 있게 되겠지.

    이환이 커피를 들고 다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거실로 나가지 않고 왜 식당인가 하는 의문을 품고 기웃거리자, 이환이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집에 계실 겁니까?”

    “아니면?”

    “출근하실 건가 싶어 여쭤봤습니다.”

    “새삼스럽게 출근은 무슨.”

    “그러게 말입니다.”

    대리석 테이블과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 그리고 정장 차림으로 느긋하게 앉아 커피 향을 즐기고 있는 두 남자.

    화보에 나올 법한 장면이었으나, 정오를 지난 시간과 자택 식당이라는 장소가 그냥 백수 두 명처럼 보이게 했다.

    “그동안 SG 건설 쪽으로 열심히 출근하셨잖습니까.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딱히 큰 기대 없는 질문이었다는 백윤경의 대꾸에 이환이 흥,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해민 씨에 대한 경호 단계만 올리면 됩니까?”

    “어.”

    “어느 수준으로요?”

    “최고 단계로.”

    “저는…… 괜찮은데…….”

    내가 뭐라고 경호를, 그것도 최고 단계로. 최고 단계가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미안합니다, 해민 씨. 하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아 줘요. 아버지와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마무리할 테니까.”

    “아니, 것보다 저는 외출할 일이 거의 없어서요.”

    물론 나도 내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 싫고, 불가피하게 그런 상황이 되었다면 당연히 보호받고 싶지만. 집에만 있는 사람을 어떻게 경호하겠다는 건지.

    “그럼 집의 보안 단계를 높이시죠. 막말로, 그냥 밀고 들어와서 보쌈해 가면 답이 없으니까. 상주 가드도 필요하겠네요.”

    “그렇게 하고. 해민 씨가 외출하기 전에 연락을 주면, 경호원이 붙는 것으로 하죠. 평생 나갈 일이 없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여사님과 장 보러 가기도 하고.”

    그럼 장 보러 나가면서 경호원을 주렁주렁 달고 가라는 말인가?

    잠시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여사님께는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그냥 혼자 시장에 다녀오시는 편이 여사님에게나 나에게나 경호원에게나 좋을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막 얘기해도 괜찮은 거예요? 듣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이정 부회장님이.” 하고 덧붙이자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여긴 괜찮아요. 뭔가를 설치했더라도 기껏해야 주방이나 거실일 겁니다. 수리 기사나 설치 기사로 위장시켜 보냈을 테니 이 층까지 올라가지는 못했을 테고. 식당은 보시다시피 테이블이 전부이니 들어올 일이 없었겠죠.”

    도청기가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조심성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했더니. 이환과 백윤경은 다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괜히 혼자 호들갑을 떤 기분이 들어 머쓱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거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듣는다고 해도 그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시는 해민 씨가 위험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이환이 지켜 주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나 스스로도 조심해야 한다.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상황 파악 못하고 사방팔방 다니면 그냥 죽여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얌전히 집에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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