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안타까운 내 시선을 느꼈던 걸까. 백윤경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실장님과 저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네?”
“좋은 일은 함께 하지만, 나쁜 일은 따로 합니다.”
“……보통은 좋은 일도 함께, 나쁜 일도 함께 아니고요?”
“에이, 나쁜 일은 각자 알아서 수습하고 감당해야죠. 왜 남까지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갑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수긍하기엔 무언가 찜찜했다. 그런가? 싶으면서도 쉽사리 그렇구나, 하기 어려운 발언에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SG는 이제 못 가겠네요. 그래도 대기업 다니는 기분은 충분히 즐겼으니 괜찮습니다.”
“네?”
“그리고 재능 기부가 끝난 거지, 백수가 된 건 아닙니다.”
“네?”
“실장님 회사는 따로 있거든요. 저도 SG가 아니라 그쪽으로 적을 두고 있어서 딱히 퇴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네?”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대기업을 버리고 실장님 밑으로 들어갔나. 후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크으.”
“네?”
아니, 이 양반들이 어제부터 번갈아 가며 알 수 없는 소리만 해 댄다.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대기업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역시 후회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그때 다시 기어들어 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네에?”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벙한 내 어깨를 감싸 토닥이며 이환이 작게 웃었다.
“투자 회사를 하나 굴리고 있습니다. 사장은 다른 사람이 맡고 있지만.”
“바지사장이죠, 바지사장. 실장님 투자금이 95% 이상이니까.”
“와아.”
“나머지는 사장님이 조금 집어넣고, 저도 조금 집어넣고. 인질입니다. 투자금 받아서 같이 굴려 주겠다고 해 놓고,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개처럼 일하게 만드는 거죠.”
기어코 이환에게 뒤통수를 맞은 백윤경이 흑흑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럼 혹시, 퇴근하시고 집에 와서 새벽까지 일하셨던 게, 그쪽 일이었어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요. 맞습니다.”
“와아.”
“병실에서 태블릿으로 계속 뭔가 하시던데, 그것도 일하셨던 거예요?”
그동안 이환의 행적을 떠올리며 묻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출근도 안 하고 병실에서 뭉개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실장님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 같아요.”
처음에는 ‘나이 먹고 요정님 운운하는 정신 이상자’라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함께 지내며 겪어 온 이환은 누구보다 삶에 진지하고 진심인 사람이었다.
“뭐지, 이 기분 나쁜 대사, 시선, 공기는?”
엘리베이터의 벽을 보고 서 있던 백윤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환기를 시키는 사람처럼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젓기도 했다.
이환이 백윤경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흡사 어미에게 물려 이동되는 새끼 고양이처럼, 목뒤를 잡혀 엘리베이터에서 끌어 내려지는 백윤경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과하게 유쾌해.”
첫인상의 진중함을 조금 남겨 두어도 좋았을 텐데.
이환의 첫인상과 그를 겪어 본 뒤의 감상이 다르듯이, 백윤경 역시 첫인상과 그를 겪어 본 뒤의 감상이 너무나 달랐다. 방향 또한 달랐다.
뭐랄까, 백윤경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짠했다.
∞ ∞ ∞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집은 살짝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서먹하면서도 편안했다. 엄밀히 말하면 진짜 내 집도 아니고 몇 달 머물렀던 숙소에 가까운데, 그럼에도 돌아올 곳이 있고 발 뻗고 누울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응? 여사님 나가셨나 본데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여사님이 계셨더라면 대문을 들어서는 시점에서 나와 보셨을 텐데, 집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외출을 하신 모양이다.
“장 보러 나가셨나?”
여사님의 부재에 조금 썰렁한 기분을 느꼈다.
“식사 준비는 해 두신 것 같은데…….”
주방에 들어가 물 한 컵을 가지고 나온 백윤경이 눈을 끔벅거리며 말했다.
“급하게 필요한 게 생겨 잠깐 나가신 모양이죠.”
점심을 차려 둘 테니 혹여나 병원에서 먹고 오지 말라고, 집에 와서 식사를 하라는 연락을 아침 일찍 받았다. 병원 밥이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여사님표 밥상에 비할 수는 없기에 기쁜 마음으로 퇴원을 했는데.
식사 준비만 해 두시고 어디를 가셨을까.
주방으로 들어가자 여사님이 만들어 둔 몇 가지 음식들이 보였다. 손으로 만져 보자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사님 침실에 계신답니다.”
전화를 해 보았는지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이환이 말했다.
그러네. 어디 가셨지, 하고 허공에 질문만 해 댈 게 아니라 전화를 해 보면 되는 거였네.
멍청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여사님의 침실로 가 보았다.
“여사님. 안에 계세요?”
“으응, 들어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며시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계시는 여사님의 모습이 보였다.
“퇴원하고 집에 온 거야?”
“네. 주무시고 계셨어요?”
“아니. 살짝 허리를 삐끗해서 누워 있었어.”
“허리를요? 많이 아프세요?”
어쩌다 허리를 삐끗하셨지. 놀라 다가가며 묻자 여사님이 고개를 흔들었다.
“식사 준비해 두고 기다리다가, 해민 씨 퇴원했으니 새 이불에서 자면 좋겠다 싶어서. 시트 갈다가 삐끗했어.”
“병원은요.”
“병원은 무슨. 찜질팩 대고 좀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텐데.”
“그래도 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쓸 만큼 써서 낡은 거야. 낡아서 삐걱거리는 거고. 기계 부품이면 갈아서 쓰겠지만, 사람 몸뚱이를 새것으로 바꿀 수도 없고 부품을 교체할 수도 없잖아. 나이 먹어서 뼈가 노후된 건데, 병원이라고 별수 있나.”
“그래도…….”
“가 봤자 병원에서도 찜질밖에 안 해 줘요. 좀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밥 먹어. 음식은 다 만들어 놨으니까 차려서 먹기만 하면 돼. 내가 상을 차려 줬어야 하는데 몸이 이래서, 퇴원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네.”
“그건 걱정은 마시고요.”
“도련님 지금 집에 있죠? 해민 씨만 두고 다시 나간 거 아니지?”
“네. 아직 집에 계세요. 백 비서님도요.”
있는 사람들까지 같이 챙겨서 밥 먹으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여사님이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그 양반들한테 상 좀 차리라고 해. 멀쩡한 장정이 둘이나 있는데, 환자가 움직이면 안 되지.”
환자라고 말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멀쩡하고, 이환이나 백윤경에게 상 좀 차리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을 듯하여 그냥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여사님도 식사하셔야 하잖아요. 여기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냐, 난 괜찮아요. 아까 음식 준비하기 전에 브런치 먹었어.”
“브……, 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드신 모양이다.
“난 좀 누워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밥 먹고 쉬어요. 퇴원하고 집에 왔으니 푹 쉬어 줘야 해.”
입원했을 때도 푹 쉬라고 하시더니, 퇴원을 해도 푹 쉬라는 말만 하신다. 이 정도 쉬었으면 이제 그만 쉬어도 될 듯한데, 내 생각과는 다른 모양이다.
“그럼 누워 계세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전화로 말씀하시고요.”
“응, 걱정 말고. 가서 얼른 식사해요.”
조용히 쉬시라며 여사님의 방문을 닫아 주고 거실로 나오며 뺨을 긁적였다.
그동안 농담처럼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이제 집안일 하기에 적합한 나이가 아니라는 말에는 사실 조금 동감하기도 했다.
나이 먹었다고 집안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 먹었다고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만. 집이 어지간해야지. 방 두 개,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인 평범한 크기의 집도 아니고, 지상은 이 층 구조이고 지하에도 공간이 있는 호화 저택에 가까운 집은 육십 넘은 노인이 관리하기에 과하게 넓었다.
이걸 이환도 알고 있기에, 여사님과 따로 살게 될 미래를 덤덤한 마음으로 각오하고 있는 모양이고.
“이리 와요. 식사합시다.”
거실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이환이 손짓했다.
“아, 금방 차릴게요. 조금만 기다리고 계시면…….”
주방으로 향하며 말하는데, 밥을 퍼 가지고 나오는 백윤경을 마주했다.
“어디 가십니까? 얼른 앉으세요. 여사님이 해민 씨 몸보신시킨다고 이것저것 많이도 해 두셨던데. 크으, 전복은 못 참죠.”
호들갑을 떨며 식당으로 향하는 백윤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이환이 웃음을 흘리며 내 등을 밀었다. 여사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식당에는 어느새 상이 차려져 있었다.
“조금 기다리시지. 제가 하면 되는데…….”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밥을 얻어먹지요. 여사님표 전복구이를 앞에 두고 그냥 가면 오늘 잠 못 잡니다.”
백윤경이 가져온 밥그릇과 식기를 테이블에 놓아 주고는 얼른얼른 앉으라며 채근을 한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식기가 놓인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더니 이환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내 의도라기보다는 백윤경의 의도에 가까웠다. 맞은편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은 백윤경이 어서 식사하자며 손짓을 했다.
“이야, 전복에 떡갈비에 오리구이까지. 완전 육해공 보양식 아닙니까? 여사님이 해민 씨 퇴원한다고 엄청 신경 쓰신 모양입니다.”
감탄하는 백윤경의 입으로 전복구이가 연달아 들어갔다.
저 사람, 전복한테 진심이네.
“그런데 육해공이 아니라 육해 아니에요?”
오리 로스구이에 부추무침을 올려 입에 넣으며 물었다.
“네?”
우물거리며 전복을 씹던 백윤경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공’이 없잖아요.”
“오리가…….”
“걔는 못 날잖아요.”
땅에서 사니까 ‘육’에 해당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