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15)화 (115/172)
  • 115화

    “실장님.”

    “네, 해민 씨.”

    “보통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거 보면요.”

    “네.”

    “막 재벌도 나오고 회사 회장님도 나오고 그러잖아요.”

    “네.”

    “밉보이면 사람 써서 납치하고 산에 묻어 버리고 바다에 던져 버리고 그러던데. ……현실에서도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영화나 드라마니까 허황되게 보여 주는 거겠죠?”

    아무리 사람 목숨이 보잘것없고, 재벌들이 일반 서민을 같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멀쩡한 사람을 묻어 버릴 리 없지 않은가.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이환은 시원한 대답 대신 으음, 하고 말을 끌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죠.”

    “……진짜요?”

    “딱히 재벌이나 기업 회장이 아니라도, 살인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원론적인 대답을 원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없는 일은 아니란 거네요.”

    여전히 대답 대신 미적지근하게 짓는 미소가 나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혹시…… 실장님네 아버지나 형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정작 묻고 싶은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포기했다.

    내가 잘못한 일은 없으니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정의 행보를 보면 이환의 옆에 있다고 나한테 대신 화풀이를 할 수도 있을 것도 같고.

    안심하고 있어도 되는 상황인지, 언제 나한테 날벼락이 떨어질까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해민 씨를 꼭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네에. 감사합니다.”

    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대충 대답을 했다.

    “대신.”

    “네?”

    “어디 갈 때는 꼭 행선지를 밝히고요.”

    “…….”

    “외출할 때는 경호원과 동행하도록 해요.”

    “아니, 그건 좀…….”

    매일 여사님과 장 보러 가는 게 아니면 외출하지도 않고, 가끔 한 번 사적인 일로 외출하는 것도 엄마 병원에 가는 날뿐인데. 시장 보러 가면서 경호원을 대동해야 하나? 애초에 내가 경호원을 대동하며 다닐 만한 사람도 아니고.

    “위험을 인지했다면 대비를 해야죠.”

    “그러게요. 제가…… 위험한가 보네요. 아무래도, 위험하겠죠?”

    이정과 이환 사이에 나는 어떤 관계도 없는 외부인인데. 두 사람의 일로 왜 내가 위험해져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위험하긴 위험한 모양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해민 씨를 건드린다면 나도 얌전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나를 건드렸다면 이미 나는 사망한 뒤가 아닐까. 그 뒤에 이환이 얌전히 있든 시끄럽게 있든 무슨 상관이겠나. 어차피 나는 죽은 목숨일 텐데.

    모쪼록 이정이나 회장님이 나에게로 화살을 돌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해민 씨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때 아버지에게 말하러 갈 겁니다. 정리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정리되기보다 난리가 날 것 같은데요.”

    “상처를 치료하려면 먼저 고름을 터뜨려야 하니까요. 하지만 치료는 금방일 겁니다.”

    “치료는 금방이지만, 아물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그거야 아픈 사람들의 문제고요.”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가족끼리 너무 냉정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동안 이정이나 회장님이 이환에게 요구했던 역할을 떠올린다면 마냥 안쓰럽지도 않았다.

    그저 고름을 터뜨릴 때, 그 고름이 내게 튀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 ∞ ∞

    “우리 이사 갈까요.”

    이환의 뜬금없는 질문을 들은 건 퇴원을 하루 앞둔 날 저녁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누워서 소화시키기’를 실행하고 있을 때, 태블릿을 들고 다가온 이환이 나를 불렀다.

    “해민 씨.”

    “네. 실장님.”

    “해민 씨는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요?”

    “어떤…… 집이요?”

    “단독 주택이 좋은지, 아파트가 좋은지 그런 걸 묻는 겁니다. 취향은 다들 다르고, 집을 고를 때 가장 우선적으로 보는 기준이 있잖아요. 펜트하우스처럼 뷰가 좋은 곳을 원한다거나? 아니면 바다나 산 근처같이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을 수도 있고.”

    “음…….”

    그걸 왜 갑자기 묻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질문에 답해 줄 말은 아주 간단했다.

    “전세든 월세든 가격이 싼 곳이요. 물이 잘 나왔으면 좋겠고, 곰팡이가 없으면 좋겠고, 교통이 편하면 더 좋겠지만. 일단은 전세금이든 보증금이든 월세든, 쌌으면 좋겠어요.”

    “…….”

    시원하고 명확한 내 대답에 이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너무 소박해서 놀랐나. 그래도 다들 집세를 가장 먼저 생각하지 않을까. 일단 가격이 맞아야 계약을 하든 말든 하는 거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을 맞춘 뒤에 해가 잘 들어오는지, 교통은 좋은지, 수압은 괜찮은지, 곰팡이는 없는지 등을 보는 거고.

    “집값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럼 어디든 땡큐일 것 같은데요.”

    진심으로 답한 말에 이환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시는 대답이 아니었나 봐요.”

    “넓은 정원 있었으면 좋겠다거나, 수영장이나 홈시어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의견을 원하기는 했지만, 아닙니다. 내가 질문을 잘못했나 보네요.”

    “저야 누워서 잘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감사하죠.”

    땅값 비싼 서울에 정원은 무슨 정원. 그걸 텃밭으로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텃밭이 있다고 해도 일하느라 바쁜데 뭘 키워서 수확할 시간이나 있을까 싶다.

    “혹시…… 이사 가시려고요?”

    “해민 씨 생각은 어때요. 우리 이사 갈까요?”

    “지금 집에서 오래 사신 거 아니에요?”

    “독립해서 쭉 살았으니, 꽤 오래 지내긴 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사를 가시려고……. 퇴사하고 진짜 시골 내려가시려고요?”

    “시골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외로 나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민 씨는 어때요? 서울이 좋은가요?”

    “저는…… 사실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농담처럼 말하는 서울 촌놈이 바로 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쭉 서울에서 살아왔다. 고층 아파트가 아닌,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난한 동네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지하 방을 전전하면서도 서울을 벗어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번 자리 잡은 지역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죠.”

    서울이 아니라, 동이나 구를 옮겨 가는 일도 드물 거다. 지역을 옮겨 다니는 직업을 가지지 않은 이상, 거의 일터 근처에 집을 구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일터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나중에는 일터를 옮겨도 집 근처에서 찾게 되고. 그게 반복되다 보면 살던 곳 주변을 거의 벗어나지 않게 되지.

    “그럼 서울에서 찾아봐야겠네요.”

    흐음, 하고 목을 울리며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찾던 이환이 내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런 곳은 어떻습니까. 정원도 있고, 건물 평수도 꽤 넓어요. 건물이야 마음에 안 들면 밀어 버리고 다시 지어도 되니, 주변을 봐요.”

    “여기로 이사 가시려고요?”

    “확실하게 정한 건 아니고, 몇 군데 골라 놨습니다. 해민 씨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

    “네?”

    “나는 한적한 곳도 좋은데, 해민 씨는 주변에 사람들이 좀 있었으면 하는 것 같아서. 주택보다 아파트를 선호할 수도 있고.”

    “네?”

    “보니까 해민 씨는 정원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듯하더라고요. 나는 펜트하우스나 빌라로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쪽도 프라이버시나 보안에 꽤나 신경 쓰니까요.”

    “네?”

    이환이 이사를 가는데 어째서 내 의견을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취향과 선호도가 왜 중요한지도 모르겠고.

    고장 난 로봇처럼 ‘네?’만 연발하고 있자 이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다 마음에 안 듭니까?”

    눈앞에 들이밀어진 태블릿 화면에서 휙휙 넘어가는 집 사진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제 의견이 필요하신 거예요?”

    “당연하죠.”

    ……당연하기까지 한 일인가?

    “앞으로 같이 살 집인데.”

    “네?”

    바보처럼 보일 걸 알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버릇처럼 또 똑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같이…… 사나요?”

    “그럼요.”

    아……, 이사 가도 나를 계속 고용하겠다는 말이구나. 그래도 내 취향까지 물어보면서 이사할 필요는 없는데. 나야 방 한 칸만 내어 주면 어디든 상관없는 사람이고, 이사 갈 집은 집주인의 취향에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인테리어랑 가구도 해민 씨가 골라야 합니다.”

    “제가요?”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시켜. 그런 건 집주인의 취향에 맞게 고르거나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지금 집은 내 취향으로 만들어 놔서 해민 씨 마음에 안 드는 곳이 많을 거예요.”

    “저는 지금 집도 좋아 보이던데요.”

    “우린 취향이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건 좀 다행이네요. 그래도 이사 가는 집은 해민 씨가 하나하나 골라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일단 주택과 아파트, 빌라. 이것부터 선택할까요?”

    “제가요?”

    “네.”

    너무 단호한 대답이라 왜 내가 골라야 하는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원, 필요합니까?”

    “실장님은 정원 좋아하시잖아요. 그네도 그렇고.”

    “아, 그네. 그거 컨셉입니다. 딱히 타 본 적은 없어요.”

    “……”

    컨셉이셨구나. 이환은 정말 컨셉에 충실한 남자였구나.

    “정원은…… 딱히 원하지 않나 보군요.”

    정원을 볼 때마다 땅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파트나 빌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펜트하우스는 어떻습니까. 한강 근처라면 조망도 좋을 텐데요.”

    “펜트하우스면 엄청 높은 곳이죠? 아파트 꼭대기.”

    “네.”

    내 말의 어느 부분이 웃겼는지, 이환이 미소를 머금고 눈을 휘어 웃었다.

    “고소 공포증 있습니까?”

    “고소 공포증은 없는데, 그래도 너무 높으면 무섭지 않을까요.”

    “으음, 그럼 빌라는 어때요.”

    “빌라는 주택보다 층이 높고, 아파트보다 낮은 거죠?”

    사오 층 정도 되는 네모난 건물, 그거. 뭔지 알고는 있는데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설픈 내 설명에 이환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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