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14)화 (114/172)
  • 114화

    이환이 툭 내뱉은 말에 이정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뭐? 하는 한 글자가 겨우 흘러나왔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산타니 나발이니. 정신 차려.”

    그동안 주변 사람들이 이환에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말이 이환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이정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내가 이정의 입장이었더라도 비슷한 심정일 듯했기에, 이 순간만큼은 이정이 살짝, 아주 살짝 안쓰러워졌다.

    “너, 너…… 지금 뭐라고……. 이환!”

    “아, 나쁜 말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줄 텐데. 내가 너무 심했나? 취소하자, 취소.”

    이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벙하던 이정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렇지? 형한테 장난친 거지? 형 지금 너무 놀랐잖아. 우리 환이가 이럴 아이가 아닌데, 나쁜 친구라도 사귀었나 싶어서. 와아, 진짜 놀랐다.”

    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이정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건 아무리 봐도 그냥 현실 도피인데.

    “이래서 어릴 때부터 친구를 잘 사귀라고 했나? 급 떨어지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라니까. 환이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형한테 못되게 굴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네.”

    모르겠다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마치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갑자기 내 탓을?

    이환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내 탓이고, 이정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내 탓이면, 이정이 돌아이인 것도 내 탓인가?

    왜 그것만 내 탓이야. 이왕 내 탓인 김에 세상에 망조가 든 것도 내 탓이라고 하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었다.

    “씨발! 좆같은 산타!”

    “…….”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이나 하는 좆같은 영감탱이.”

    난데없는 이환의 욕설에 하하하 웃다가 나를 노려보다가 현실 부정을 하다가 난리를 부리던 이정이 침묵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셔야 할 텐데.”

    “……환아?”

    “루돌프까지 덩달아 무슨 죄야. 노동력 착취에 무단 가택 침입에. 콩밥을 무기 징역으로 처먹어 봐야 세상 무서운 줄 알 텐데.”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환의 태도에 이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도 슬슬 이환이 저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환이, 산타 할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꾸 그렇게 나쁜 말 하면, 진짜로 올해 크리스마스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

    서른네 살의 남자를 상대로 하는 겁박이 참으로 저렴했다.

    동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환이 아니라 이정이 아닐까. 누구보다 감수성이 메마르고 동심이 파괴된 이정이 오히려 이환보다 더 동화에 목을 매고 있는 듯 보였다.

    컨셉에 잡아먹힌 괴물이 여기 또 있었네.

    “형은 바빠서 그만 가 봐야겠다. 해민 씨 멀쩡한 것도 봤고, 네 얼굴도 봤으니까. 적당히 쉬다가 회사 나오고. 알겠지?”

    이제껏 이환이 이야기했던 것을 무로 돌리는 발언이었다.

    회사 출근을 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로 계속 이야기를 나눠 놓고, 뭘 다 해결된 것처럼 적당히 쉬다가 회사를 나오래. 그냥 듣는 척만 하고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내가 입버릇처럼 멀쩡하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엄연히 머리를 다쳐서 꿰맨 환자인데 멀쩡하다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짜 싫은 사람이다.

    “네, 조심히 가세요.”

    와서 얄미운 소리를 늘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병문안 와 준 사람이니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딱히 용건도 없으면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사람 심기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가 달라는 바람도 살짝 섞여 있었다.

    “어, 해민 씨도 몸조리 잘하고. 우리 환이가 걱정하니까 앞으로 몸조심하고.”

    생각해 보니까 저 새끼가 사고를 일으킨 주범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저 새끼한테 몸조심도 못 하고 다닌다는 뉘앙스의 충고를 들어야 하지?

    속에서 격한 생각이 날뛰었다.

    남의 욕 하고, 남의 흉을 보고 그러는 거 진짜 최악인데. 왜 이정을 만나면 항상 속으로 이런 나쁜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자리에 앉은 상태로 대충 손을 흔들어 이정에게 인사한 이환이 닫히는 병실 문을 확인하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해민 씨.”

    “네, 실장님.”

    “웃어요.”

    “……네?”

    “웃어요.”

    뜬금없는 요구에 입술 끝만 올려서 대충 웃는 시늉을 했다.

    “아니, 소리 내서.”

    “하, 하, 하?”

    “더 크게.”

    “하하하하!”

    배 속에서 소리를 끌어올려 병실이 울리게 크게 웃음소리를 내자, 이환이 따라서 아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아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환과 번갈아 가며 웃는 소리를 내다가 문득 지금 뭘 하는 건가 의아해졌고, 또 그러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진짜로 웃음이 나왔다. 한참 동안 웃다가 지칠 때쯤 이환이 “그만.” 하고 내 웃음을 저지했다.

    “이제 됐습니다.”

    “……지금 뭐 한 거예요?”

    “문밖으로 나간 누군가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겁니다.”

    “아…….”

    “아마도 꽤나 약 오를 겁니다. 병문안까지 왔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답은 듣지도 못하고, 병실 나가자마자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려오니 뒤통수가 간질간질하겠죠.”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남의 속 뒤집어 놓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계셨네.

    속으로 감탄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조금 얄미웠어요.”

    어릴 때부터 남의 밑에서 남의 돈 받으며 일을 해 오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는 만큼, 그 많은 사람의 성격 또한 다들 제각각이었다.

    만나면 유쾌한 사람이 있고, 괜히 기분 나빠지는 사람도 있다.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으면 이유 없이 좋은 사람도 있고.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건 내 기분이고 내 호불호일 뿐이라서 크게 표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평생직장도 아니고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좋게 느껴지는 사람이든 싫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똑같이 대했다.

    가끔 너무 짜증이 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욱하고 올라올 때도 종종 있었지만.

    나한테 헛소리를 하거나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 이상,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며 크게 감정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환은 첫 만남 이후로 자주 나를 당혹스럽게 했고, 이정은 만날 때마다 짜증을 유발했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특출난 형제였다.

    “사람 기분을 건드리는 화법을 쓰죠. 화내기도 미묘할 정도로만.”

    그게 참 치졸해서 사림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며 이환이 불퉁거렸다. 가족끼리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준의 화법은 아닌 모양이다. 성격 좋은 이환마저도 짜증스럽게 만들다니, 이정의 말투가 대단하긴 대단한 듯했다.

    “그런데 너무 긁으신 거 아니에요?”

    “이제껏 실컷 남의 속만 긁어 대며 살아온 사람인데, 본인도 한번 당해 봐야죠.”

    “그래도…… 산타 할아버지 뒈졌다고 말씀하셨을 때 놀랐잖아요.”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요정 안 믿는다는 거 오픈하시는 거예요?”

    “그래야죠. 아버지에게는 말하고 손 뗄 생각인데, 형에게도 말을 해 줄지 말지는 생각 중입니다.”

    “엄청 충격받으실 것 같은데…….”

    조금 전처럼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까.

    이환의 입으로 ‘요정 같은 건 없어.’라는 말을 들어도, ‘사춘기가 와서 반항이라도 하니?’라거나 ‘요즘 귀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병원에라도 다녀와야겠다.’라며 어물쩍 넘어갈지도 몰랐다.

    이십 년 동안 ‘요정이 있다고 믿는 자신’을 연기한 이환과 달리, ‘요정이 있다고 믿는 이환’을 진짜로 믿어 버린 이정이 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였다.

    옆에서 지켜보며 내 일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싶었는데, 살짝 걱정도 되었다.

    이환에게 고난과 역경을 체험케 해 주겠다며 멀쩡한 사람을 납치 사주한 이정이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동심 가득한 제 동생으로 남기겠다고 이환을 죽여도 놀랍지 않을 듯했다.

    아니, 이건 너무 나갔다.

    아니다, 이정은 그러고도 남을 돌아이다.

    상충된 생각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왜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어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빠져 있자, 이환이 내 손등을 툭툭 두드려 관심을 요구하며 물었다.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요.”

    “다시는 해민 씨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겁니다. 나를 믿어 줘요.”

    아니, 이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냥 이정이라는 사람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이었는데.

    그리고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이환이 아닐까. 아니, 내가 위험하려나.

    아까도 친구를 잘못 사귀면 안 된다느니, 급에 맞는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은근슬쩍 나를 대놓고 쳐다보던데.

    이환이 달라진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역시 내 탓을 하려나. 그러면 나한테 화풀이를 할 수도 있고……. 역시 이환보다는 내가 더 위험할 듯싶다.

    “회장님하고 부회장님과 이야기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이야기가 잘되어서 나한테 위험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될 겁니다. 내가 손 떼겠다는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상황에서 괜히 나한테 불똥이 튀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건데. 내 걱정을 모르는 이환은 마냥 낙천적이었다.

    이십 년이 넘도록 이정의 마수에서도 멀쩡했던 이환이야 걱정할 일이 없으니 낙천적일 수밖에 없겠지. 나만 걱정이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