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13)화 (113/172)
  • 113화

    “자존감이 과하게 없는 대답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앞으로 누가 막 친하게 굴고 그러면 나한테 말하는 겁니다?”

    “실장님한테 말할 것도 아니고요.”

    “왜 이럴 때만 딱 자르는 겁니까? 이상한 곳에서 자신감이 있네.”

    “아……, 제 일이니까 제가 알아서 처신하는 게 옳지 않나 생각해서 말한 건데…….”

    너무 예의 없이 딱 잘라 말한 건가 싶어서 힐끔 이환의 눈치를 살폈다. 팔에 턱을 걸치듯 기대고 있던 이환은 묘하게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민 씨가 잘못 말한 건 아닌데, 내가 서운해서 그럽니다. 초면에 수작 걸었던 사람 앞에서 수작 걸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나 하고.”

    “수작…… 거셨어요?”

    “내가 괜히 해민 씨에게 잘해 줬겠습니까.”

    “실장님 성격이 좋으신 줄 알았어요.”

    “내 성격이 좋긴 좋죠. 원래도 좋긴 하지만, 호감 가진 사람에게는 더 잘해 주고 싶고 그러니까요. 괜히 해민 씨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먹이고, 입히고, 선물을 사다 안겼겠습니까.”

    “…….”

    “좋아하니까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고.”

    “…….”

    “매번 말하는데도, 해민 씨는 매번 못 들은 것처럼 말하고.”

    “…….”

    “내가 해민 씨에게 호감을 가지는 게 싫어요?”

    “그냥 좀…… 믿기지 않는 것 같아서요.”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습니까? 연극하는 걸까 봐 의심됩니까?”

    “현실감이 안 느껴져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주나. 설마 나를 좋아하나? 의심하고. 설마 나를 좋아할 리가. 또 의심하고.”

    “확인하고 싶은 겁니까, 부정하고 싶은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꿈이기를 바라긴 해요.”

    “…….”

    “현실은 너무 아프잖아요. 실장님이 저를, 음, 좋아하는 게 현실이라면…… 좋은 결말이 떠오르지 않아요.”

    “나와의 결말을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하다는 말이네요.”

    “…….”

    “동화는 언제나 해피엔딩이죠.”

    “동화잖아요.”

    “내 현실도 동화였고요.”

    “전 요정님이고요?”

    내 물음에 이환이 소리 없이 웃었다. 둥글게 휘어지는 눈매에 다정함이 깃들었다.

    “앞으로 내가 주는 건 공짜라도 다 받아요.”

    급작스러운 공짜 투척 예고에 이환을 따라 웃다가 눈을 끔뻑였다.

    “내가 원하는 건 해민 씨 마음인데, 그건 누구도 억지로 뺏어 갈 수 없는 거니까. 더 큰 것을 빼앗길 염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금 같은 건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보석은요?”

    “그건 더 자제해 주세요.”

    “그럼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 몸뚱이뿐인데요.”

    성희롱에 가까운 듯 아닌 듯 아슬아슬한 수위의 발언에 잠시 고민했다.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던 서른네 살의 남자와 아슬아슬한 성희롱 발언을 하는 서른네 살의 남자 중 어느 쪽이 좋은지. 문득 꼭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지, 선택지에 따른 의문까지 떠올랐다.

    “그 침묵은 좋다는 뜻입니까, 싫다는 뜻입니까?”

    “조금 전 실장님의 발언이 성희롱에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좀 고민했어요.”

    “……필요할 때는 또 냉정해지네요. 험한 세상에 요정님을 어떻게 풀어놓을까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이번만큼은 따라 웃지 못했다.

    17

    하는 일 없이 병원 침대에 누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는 일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입원한 지 나흘이 지났을 때,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문밖에서 작은 소란스러움이 느껴졌고, 뒤이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을 경호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이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 다가간 경호원이 작게 귀엣말을 했고, 이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어쩔 수 없죠. 들여보내요.”

    태블릿을 내려놓은 이환이 내 곁으로 자리를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이 병실 밖으로 나가고, 배턴을 이어받듯 낯익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짜잔.”

    엄청난 크기의 꽃바구니로 눈 아랫부분을 가리고 들어온 남자가 얼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환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은 돌아이가 맞는 것 같은데.

    돌아이와 소시오패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저 인간이 돌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를 돌아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해민 씨, 다쳤다고 해서 와 봤어. 이건 문병 선물.”

    길쭉한 눈을 휘어 웃으며 들고 온 꽃바구니를 내미는 이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납치를 사주한 주제에 방싯방싯 웃는 얼굴로 꽃바구니까지 챙겨 병문안을 오다니.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인데, 이정은 돌아이면서 낯짝까지 두꺼운 모양이다.

    어영부영 일어나려는 나를 만류하며 이환이 대신 꽃바구니를 받았다. 그는 고맙다거나 뭐 이런 걸 사 왔냐는 말 대신 꽃바구니를 대충 병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왔어?”

    “왜 왔냐니. 병문안 온 거지, 병문안. 해민 씨 다쳤다는 이야기 듣고 왔다고 했잖아.”

    “문병 올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가.”

    “그러엄. 엄청 가까운 사이지. 우리 환이 요정님인데.”

    옆에서 들어도 딱히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이정은 생긋생긋 웃으며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양 당당했다.

    역시나 낯짝 두꺼운 돌아이다.

    나는 내 판단을 확신했다.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병문안까지 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누가 들으면 진짜 가까운 사이인 줄 알겠다. 그럼에도 예의상 영혼 없는 감사 인사를 하자, 가늘게 뜬 눈이 나를 훑었다.

    “그러게.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정말 얼마 안 다쳤네.”

    “……”

    왜인지 희미하게 안타까움이 전해져 왔다.

    ‘어쩌다 다쳐서 입원까지 하게 되었나.’ 하는 안타까움보다 ‘생각보다 더 안 다쳤구나.’ 하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더한 돌아이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기에 팔다리라도 부러졌나 했는데, 너무 멀쩡해 보이잖아? 머리 몇 바늘 꿰맨 게 전부인가?”

    “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겨우 그 정도네요.”

    내 대답을 듣고 가볍게 웃은 이정이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이환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환이가 회사 출근도 안 하고 계속 옆에 붙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혼수상태인가 했는데.”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쉽겠네.”

    이환은 의자를 끌어 내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고, 제게서 멀어진 이환을 바라보던 이정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의미인지는 본인이 생각할 일이지.”

    “형은 잘 모르겠는데?”

    “모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말 섞기 싫다는 뉘앙스의 대꾸에도 이정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출근은 왜 안 해? 해민 씨도 멀쩡한데.”

    “멀쩡하긴. 머리 다쳐서 꿰맨 거 안 보여?”

    “그거 빼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환이가 옆에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지 않을까? 아무리 해민 씨가 걱정되어도 출근은 해야지.”

    철없는 동생을 나무라듯 이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나 이제 회사 안 나가려고.”

    이전에는 불퉁거리면서도 이정의 말에 적당히 박자를 맞춰 주던 이환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때려치우려는 모양인지 심드렁하고 매우 비협조적인 태도였다.

    “왜 회사를 안 나와.”

    “회사에 나갈 이유가 없어서.”

    “안 나올 이유도 없지.”

    아무리 봐도 병문안 온 사람답지 않게 환자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이정은 나보다 이환에게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나는 가만히 찌그러져서 이환과 이정의 대화를 구경했다.

    “안 나갈 이유야 많지. 내가 월급을 받는 회사원도 아니고. 무급으로 남의 회사 나가서 일을 할 이유가 없잖아.”

    “남의 회사라니. 아버지 회사고, 우리 회사인데.”

    타이르듯 말하는 이정을 보며 이환이 입술을 뒤틀어 웃었다.

    “월급이 문제였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깟 월급 몇 푼이나 한다고. 푼돈 안 준다고 회사 출근을 안 해?”

    이정은 이환을 몇 푼 하지도 않는 월급 때문에 출근을 하지 않는 철부지 취급했다.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을 참 기분 나쁘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그리고, 대기업 임원 월급이 왜 푼돈이야. 세상 사람들은 그보다 더 박봉인 월급을 받으면서도 회사를 다니는데. 이정의 월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을 상회하는 것은 분명할 텐데도 푼돈 운운하는 게 너무 얄미웠다.

    아무튼 부모 잘 만나서 고생 안 해 본 놈들은 세상 고된 줄 모른다니까.

    이환은 안 그러는데 이정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어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얄미워.

    볼 때마다 눈꼴시고 아니꼬워서 사막 여우 표정을 짓게 만든다.

    “푼돈 받으면서 일하기엔 내가 너무 고급 인력이라서. 무상으로 일하면 적선하는 기분이라도 나지만, 푼돈 받으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네.”

    똑같이 얄미운 화법으로 응수하는 이환의 발언에 이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환이. 왜 이렇게 시니컬해졌어? 사춘기야?”

    “…….”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이 타이밍에 사춘기는 아니지 않나. 과하게 늦은 사춘기는 요정님만큼이나 서른네 살의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

    “싫어.”

    “환아. 고집부리지 말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네. 애처럼 귀 막고 제 할 말만 하는 시기는 지나지 않았나.”

    “이환.”

    확실히…… 고집부리는 사람은 이정이었다.

    난 그냥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환이, 이렇게 고집부리고 나쁜 짓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 다음 달에 크리스마스인 거 알고 있지?”

    “산타 뒈졌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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