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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12)화 (112/172)
  • 112화

    “회장님 둘째 아들이라는 걸 알고 먼저 접근한 건 그 여자 쪽이었습니다. 나도 애먼 사람을 이용하지는 않아요.”

    본인을 그런 수준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며 이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 뒤에는요?”

    “그래서, 라기보다는 그냥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항상 먼저 다가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더군요. 그래서 알아봤더니 이정이 오피스텔 하나를 사서, 그 여자를 거기 지내게 하고 들락거리더라고요.”

    “굳이 그런 방식으로 실장님과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바람까지 피우면서?”

    “그게 제일 쉽고 깔끔하니까요.”

    “깔끔해요? 외도하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외도라는 방법이 어떻게 제일 깔끔할 수 있지? 제일 더럽고 골치 아픈 방법이 아닌가.

    “이유도 없이 그냥 자르면 분명히 말이 나옵니다. 그 직원이 부당 해고를 신고라도 하면 시끄러워지죠. 그런 자잘한 일로 회사가 시끄러워지는 건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일입니다. 돈으로 회유하기엔 나에게 발설할 위험이 있고요. 합당한 이유로 해고하기엔, 언제 실수를 할지 계속 기다려야 하죠. 이정이 제일 싫어하고 참지 못하는 게 기다림입니다. 그러니 쉬운 방법을 택할 수밖에요.”

    “그런 이유에서라면…… 가장 쉽고 깔끔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건 한 명일 때의 이야기잖아요. 실장님이 막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호감을 보이면, 부회장님이 세 다리, 네 다리, 다섯 다리 걸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무 막막한 방법인데요.”

    “내가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호감을 보내고 다닐 놈이었습니까?”

    “그으……건 아니고요. 그런 허점이 있는, 너무 허술한 방법이라는 거죠.”

    “내가 사람에 흥미가 없다는 걸 알아요. 가까이 두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러니 이정에게는 외도까지 감행하며 붙잡아 둘 정도로 비서실 막내가 특별했을 겁니다. 내가 드물게 호감을 보이며 가까워지려 했던 사람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형제 관계가 아니었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내 입장에서는 왜 그런 쓸데없는 일로 복잡하게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형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실장님은 원하던 걸 얻으셨어요?”

    “네. 이정의 외도 장면을 몰래 찍어 익명으로 형수에게 보냈습니다.”

    “네?”

    갑자기 남의 가정을 파탄 내신다고요?

    너무 급발진인데요!

    놀라서 쩍 벌어진 입술을 벙긋거리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이환이 멋쩍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매우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그런데 실패했어요.”

    “……실패요?”

    “네. 조금 시끄러워지기를 바랐는데.”

    “혹시 막 싸우면서 이혼하신다고 일이 커져 버린 건…….”

    “아뇨. 아무 일도 없는 듯 조용하더라고요. 형수가 나중에 이혼 소송 자료로 사용하려고 몰래 보관 중인가 싶었는데, 그다음 날 바로 이정이 비서실 직원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부부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죠.”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좀 이해가 안 돼요.”

    “형수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형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를 만나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길 가다 잠시 들러 옷을 산 매장에, 밥 한 끼 시켜 먹은 식당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외출해서 백화점도 가고, 레스토랑도 가고, 골프장도 가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은 집이죠. 그런 겁니다.”

    그런 거라니, 전혀 모르겠는데?

    일반인이 따라가기엔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환도 그렇고, 이정도 그렇고, 심지어 형수님까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일반인과 재벌은 생각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당황했습니다. 난생처음 겪어 본 실패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부끄러운 실패담이니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됩니다.”

    “혹시…… 이것도 실장님 비밀이라고 말씀해 주신 거예요?”

    “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셨으면 참 좋겠다.

    이게 과연 이환의 비밀인지, 이정의 비밀인지, 형수님의 비밀인지 구분이 안 되지만. 이걸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아무튼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틀림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흘렸다.

    “비밀 교환하는 건가요?”

    “해민 씨가 익힌 채소 말고 또 뭘 싫어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

    그럼 그냥 싫어하는 걸 말해 달라고 하면 되지, 이상한 과거 이야기로 남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정작 나는 이환의 과거 비밀을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왜인지 억울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강매당하는 기분이에요.”

    내 찰떡 같은 비유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부끄러운 실패담을 흥미진진하게 들어 놓고, 이제 와서 물리겠다는 겁니까?”

    “실장님이 이야기를 하시니 들은 거죠.”

    “내 비밀스러운 과거를 알아 버렸잖아요.”

    “그런 건 계속 비밀로 남겨 두세요!”

    과거 이정의 외도 사실 따위 알고 싶지 않다고.

    주먹으로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항의했으나 이환은 하하하 하고 웃기만 했다.

    “하나만 말해 봐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좌판에서 귤 한 봉지 사며 덤으로 사과 하나 달라고 조르는 진상 손님처럼, 이환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 비밀을 요구했다. 아니, 비밀이라고도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내가 싫어하는 것. 이환이 원하는 건 단지 그것이었다.

    “제가…… 싫어하는 거.”

    “네.”

    장난스럽게 내 손끝을 툭툭 건드리며 이환이 가볍게 웃었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이환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싱그러운 느낌을 받곤 했다. 바로 전에 형의 외도 경험과 형의 가정을 파탄 낼 뻔한 과거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해맑기도 했다.

    아, 모르겠다.

    몸을 뒤척뒤척 움직여 이환을 향해 옆으로 누웠다. 시선을 맞춰 빤히 바라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저는…… 뭔가 공짜로 받는 게 싫어요.”

    “공짜가 싫다?”

    “제가 겪어 온 세상은 그리 따뜻하고 넉넉하지 않았거든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 공짜가 진짜 있을까 싶고. 그래서 공으로 받는 것도, 내가 지불한 노동력이나 돈보다 훨씬 상회하는 대가를 받는 것도 꺼려져요. 무언가를 받으면,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를 부담스러워했던 겁니까? 내가 주는 선물도 부담스러웠고?”

    “……네.”

    “기뻐하며 받아 줄 거라 생각했었는데, 사실 받고 싶지 않았겠네요.”

    “……네.”

    “해민 씨가 현명하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아뇨.”

    누구보다 짧은 가방끈을 가진 나인데, 그런 내가 현명할 리 없지 않은가. 남들보다 배운 것도 적고, 아는 것도 없다. 내세울 것 하나 없이,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나에게 현명하다 말해 주는 사람은 이환이 유일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공으로 얻길 바랍니다.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길 꿈꾸며 복권을 사죠. 한탕을 꿈꾸며 노름을 하고 내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망하고요.”

    이런 쪽으로는 이환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 모양이다. 공것을 대상으로 나도 그렇지만 이환도 못지않게 비관적이었다.

    “내가 일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길 원하고, 누군가는 내가 지불하는 돈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얻길 원합니다. 내가 내는 돈보다 더 많은 가치의 물건을 받길 원하고, 내가 주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길 원해요. 사람의 본능이란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쫓기 마련이기에, 결국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이 생기죠. 그런데 해민 씨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욕심을 경계하고 멀리하잖아요.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미련하다고 말씀하셔도 돼요.”

    “그게 왜 미련한 겁니까. 누구보다 현명하고, 누구보다 지혜롭고, 누구보다 선량한 사람인데.”

    “다 아니에요. 현명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고, ……선량하지도 않아요.”

    “해민 씨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예쁘고, 현명하기까지 해서 이기적이게도 다 가지고 태어났구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자존감을 못 가졌네요.”

    저런, 하고 이환이 곤란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그래도 공짜를 경계하는 자세는 칭찬합니다.”

    “……갑자기 칭찬이요?”

    “네. 앞으로 누가 와서 커피 한 잔 사 주겠다고 해도 받아 마시지 말아요. 다른 사람이 주는 건 사탕 하나도 받아먹으면 안 됩니다.”

    “사탕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저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는데.”

    “안 됩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무서운데 남이 주는 걸 막 받아먹습니까. 다른 사람이 주는 건 받지도 말고 먹지도 말아요. 말도 걸지 말라고 해요. 정히 먹고 싶다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사 들고 뛰어올 테니까.”

    “그건 그냥 인간 불신 아닐까요.”

    “어허, 또 맞는 소리만 골라서 하네. 이렇게 똑똑해도 되는 겁니까?”

    “…….”

    “누군가가 이유 없이 나에게 잘해 줄 때 의심부터 하는 건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괜히 경계심 없이 가까워지면 장기 팔려 가고 몸뚱이 팔려 가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요?”

    “그런 건 없어요.”

    너무 딱 자른 대답이었다.

    이환의 말에 따르면 이미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이다.

    “그런 최악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해민 씨를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수작 부리는 놈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놈들은 초면에 단호하게 차단해 줘야 해요.”

    “저보다 잘나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돈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 다 놔두고 왜 저한테 수작을 부리겠어요.”

    딱 봐도 수작을 걸 만한 대상이 아니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이환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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