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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11)화 (111/172)
  • 111화

    일찍 나오는 저녁밥을 먹고 일찌감치 세수하고 양치하고 잘 준비를 끝냈다. 여사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할 일이 없어서 먹고 자고만 반복할 듯싶다.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며 거울을 보았다. 머리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착용한 세안 헤어 밴드에 달린 노란색 오리가 부담스러웠다.

    백윤경이 이환의 옷가지와 태블릿을 가져다주면서 내 노트북과 속옷, 잡다한 물건들도 함께 가져왔다. 오는 길에 사 왔다던 헤어 밴드가 볼수록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리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떼자, 찌그러졌던 오리가 봉긋 살아났다.

    꼼꼼하게 남은 물기를 훔쳐 내고 욕실에서 나왔다. VIP 병실이라서 그런지 화장실 겸 욕실도 넓고 깔끔했다.

    환자 침대를 손수 정리하던 이환이 나를 보고 푸스스 웃었다.

    “오리가 귀엽네요.”

    “백 비서님 취향인가 봐요.”

    “그 취향이 오늘만큼은 마음에 듭니다. 노란색이 잘 어울려요.”

    노란색도 싫고 오리도 싫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헤어 밴드를 벗어 던졌다. 그 손길에서 불편한 심기를 느꼈는지 이환이 숨죽여 키득거렸다.

    “이리 누워요.”

    “아직 안 자고 싶은데…….”

    “머리 찝찝하다면서요.”

    “머리 감아도 된대요?”

    “아뇨.”

    “…….”

    뭐 하자는 말장난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나를 이끌어 기어코 침대에 눕힌 이환이 머리맡에 앉아서 젖은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감쌌다. 뜨거운 물에 빨아 왔는지 온기가 전해져 왔다.

    “상처 피해서 이렇게라도 닦으면 좀 낫겠죠.”

    “물 묻으면 기름기 더 심해지던데.”

    “수건한테 기름기 좀 흡수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기도하면 수건이 들어주긴 하나.

    자꾸만 비관적으로 부정하는 나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한 말이겠지만, 기름기가 반질반질한 당사자는 희망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뜨거운 수건이 머리를 감싸며 온기가 전해지자, 긴장이 풀어지며 묘한 나른함이 느껴졌다.

    이환에게 기름기가 가득한 머리카락을 만지게 해도 괜찮을까 걱정하며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도 축 늘어졌고 일자로 어색하게 누워 있던 몸도 흐물흐물 풀리는 기분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훔치는 수건의 움직임을 느꼈다.

    “해민 씨.”

    “네, 실장님.”

    “나에 대한 가장 큰 비밀을 알아 버렸는데, 왜 해민 씨는 똑같을까요.”

    “어…….”

    뭔가 달라져야 했던 걸까.

    순간 예상외의 질문을 받아 버려서 살짝 당황했다.

    이환이 장장 이십여 년 동안 그의 형제를 속이고자 아버지와 거래를 하고 연극을 해 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경악하긴 하였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래서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환이 요정님을 믿으면 어떻고 안 믿으면 어떤데. 사실 나쁜 사람이 계모가 아니라 친형이었다는 진실이 어떻다고. 어차피 내 계모도 아니고 내 형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었다. 막장 드라마나 영화를 본 기분. 심지어 감정 이입도 안 되는 스토리에 대충 ‘그랬구나’ 하는 감상만 남아 버린 멀뚱한 상황.

    이정이 나를 이용해 이환을 자극하려 했다는 전말을 알게 되었어도, 그래서 뭐 어쩌겠느냐 하는 심정이었다.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이환이 구해 주었고, 나는 이렇게 병원에 있는데. 이정에게 가서 따질 것도 아니고, 따져 봤자 뭘 하겠느냐 싶고.

    남은 것은 의문이었다.

    이환은 이십 년 동안 감춰 온 비밀을 왜 내게 말해 준 걸까.

    내게는 감추고 싶지 않다고 했다.

    왜.

    나를 계속 속일 수 없다고 했다.

    어째서.

    “나만 비밀을 말한 것 같은데, 해민 씨는 나한테 말해 줄 비밀 같은 거 없습니까?”

    “억울하세요?”

    “억울하기보다……. 나는 비밀을 고백할 정도로 해민 씨를 아주 가깝게 생각하는데, 해민 씨도 그래 줬으면 하는 바람이랄까요.”

    뜨거운 김이 다 날아가 식었다며, 새 수건을 꺼내 뜨거운 물에 적시는 이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사실, 삶은 야채 안 좋아해요. 삶은 당근, 삶은 가지, 삶은 오이 같은 건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요.”

    내 사소한 비밀 고백에 뜨거운 수건을 들고 온 이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음식에 호불호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맛이든 식감이든 싫어하는 게 있을 수 있죠.”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아니, 다 먹긴 해요. 애초에 배가 고프면 그냥 있는 대로 먹게 되니까. 가려 먹을 처지도 아니고요.”

    “알고 있었습니다. 삶은 야채 싫어하는 거.”

    “……아셨어요?”

    “먹는 속도가 다르거든요. 여사님도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래도 균형 있는 식단을 위해 아예 채소를 빼지는 못하고, 대신 끼니마다 고기가 있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갈비찜, 불고기처럼 고기가 메인 메뉴로 많이 나왔었고, 비빔밥을 먹을 때에는 간 고기를 넣어 비비거나 하다못해 고기가 잔뜩 들어간 국을 내셨다. 가끔 만둣국이나 국수 같은 면 요리를 먹을 때에는 고기 고명을 푸짐하게 올려 주시거나 따로 산적을 구워 반찬으로 내기도 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에서 고기가 빠진 적이 없었다.

    진짜, 여사님도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

    “먹기 싫은 건 먹지 않아도 됩니다. 맛있는 것도 많은데 맛없는 걸 먹을 필요는 없죠.”

    “맛이 없는 건 아니고요, 그냥 맛있지 않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그 정도예요.”

    “그럼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것보다 맛있는 걸 먹어요. 배부르면 남기고,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잘 안 먹어서 여사님이 잔소리를 좀 하시지만, 그렇다고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이시는 분은 아니거든요.”

    “진짜 맛없는 건 아니에요. ……여사님에게 말하지 마세요.”

    “네, 해민 씨 비밀이니까요.”

    비밀이라고 하기엔 이환도 알고 있고 여사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머리카락을 살살 비벼 문지르던 이환이 젖은 수건과 베개를 가져가고, 새 베개에 마른 수건을 깔아 머리 뒤에 괴어 주었다.

    “어때요. 조금 깔끔해진 느낌입니까?”

    더 떡이 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살짝 고슬고슬해진 느낌이다. 의외의 결과에 놀라 이환을 올려다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픽 하고 뿜어져 나온 콧바람이 그의 우쭐한 기분을 대변했다.

    “이제 머리 만져도 됩니까?”

    “안 돼요. 가뜩이나 감지도 못하는데, 손 타면 더 기름져져요.”

    내 머리가 비싼 머리는 아니지만 당분간은 접근 금지다. 칫, 하고 혀를 찬 이환이 의자를 뒤집어 털썩 걸터앉았다.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턱을 기댄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도 좋고, 운동 신경도 좋았습니다.”

    갑자기 제 자랑을 한다고요?

    “내 자랑은 아니지만, 재벌 자식답지 않게 성격도 참 좋았고요.”

    자랑은 아니지만 그냥 내 귀에 자랑으로 들렸나 보다.

    “인정하기 싫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첫 만남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냥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기에, 선선히 이환의 말에 긍정했다.

    “해민 씨에게 잘해 준 건 해민 씨 한정이지만, 그걸 떠나서도 내가 좀 유쾌하고 친해지기 쉬운 성격 아닙니까?”

    엄……, 그걸 그렇게 물으시면…….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팩트인데, 그 사실을 남들은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르는 것 또한 팩트이고.

    이환이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나 싶어 왜인지 안쓰러워졌다.

    “그런데 친구가 없었죠. 아무리 성격이 좋아 보여도 요정과 동화에 심취한 알파와 선뜻 친해지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 이해는 됩니다.”

    “아…….”

    그건 좀…… 그렇지.

    단순히 가까이하기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웬만하면 얽히고 싶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을까. 괜히 미친놈 옆에 있다가 눈 돌아가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부터 들었을 것 같은데.

    한창 친구들과 어울렸어야 할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친구 없이 지냈을 이환을 떠올리자 이정이 미워졌다.

    “놀리거나 비웃거나 욕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가끔 특이한 점에 끌리는 아이들도 한두 명은 있었어요. 괴짜라고들 하죠. 그런데 꼭 가까워질 만하면 애들이 전학을 가요. 아니면 하루아침에 안면 몰수를 하거나. 어차피 친구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기분은 나쁘더라고요.”

    “그렇죠.”

    조금 친해졌다 생각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른 척하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쁠 만했다.

    “머리가 좋고 운동 신경이 뛰어난 건 내가 그렇게 타고났기에 이정이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건드리기가 쉽죠. 돈으로든 무력으로든 압박해서 떨어뜨려 놓기만 하면 되니까.”

    “…….”

    “이게 대학교까지 이어지니까 어느 순간 짜증이 났습니다. 저 새끼는 할 일도 없나. 남의 인간관계까지 파탄 내면서 대체 무슨 즐거움을 얻는 걸까. 내 뒤에 사람 붙여 놓고 감시하고 동태를 살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갑자기 짜증이 난 겁니다.”

    “그걸 알고도 그냥 참고 계셨다는 게 저는 더 놀라운데요.”

    “그 정도야 뭐.”

    별것 아니라는 투로 이환이 손을 내저었다.

    겸손하실 타이밍은 아닌데!

    “그래서 이정의 사무실에 들락거리며 거기 비서실 막내에게 관심 있는 시늉을 해 봤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달리 그의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는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해졌거든요. 나도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면 회사에 들어갈 텐데, 그럼 자연스럽게 이정과 주변 사람들이 많이 겹칠 테니까요.”

    “그 비서실 막내는 무슨 죄인데요.”

    형제 싸움에 휩쓸린 막내 비서는 무슨 죄이지요? 그 사람도 나름 노력해서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기뻐하며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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