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먹고 자고 하는 건 아가나 동물한테 해당되는 거 아니에요? 저 사육하시려고요?”
“글쎄요. 요정님은 사육에 해당됩니까, 육아에 해당됩니까. 해민 씨가 대상이면 어느 쪽이든 괜찮긴 합니다만.”
요정이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말이 통하고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으니 육아 쪽이려나.
본능적으로 답을 찾으려다 이런 개소리에 진지하게 고민하지 말라는 내면의 외침을 들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바로 누우면 소화가 안 될 것 같아요.”
“자면 저절로 소화가 됩니다.”
“……그냥 앉아서 소화시키고 누울게요.”
진짜로 자면 알아서 소화가 되는지 진위를 알 수 없어서, 일단 버티기로 했다. 이환의 말이 사실이더라도 자면서 소화를 시키는 건 뭐랄까,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는 기분이었다.
“심심하면 티브이 틀어 줄까요. 오후에 윤경이 올 텐데, 그때 해민 씨 노트북도 가져오라고 해야겠습니다.”
“백 비서님한테 그런 심부름 시키지 마세요.”
“내 옷을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어차피 집에 들렀다 병원 와야 할 놈입니다.”
비서한테 그런 잡심부름 시켜도 되는 거냐고. 백윤경의 처지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런데 실장님. 회사 출근 안 하세요? 어제도 계속 병원에 계시고, 오늘도…….”
“네. 안 갑니다.”
뭔가 변명을 기대했는데, 너무나 당당한 결근 의사에 눈을 끔뻑거렸다.
“안 가요?”
“네.”
“왜요?”
“출근한다고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내 회사도 아닌데 굳이 출근해서 일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출근해서 일하셨잖아요.”
“그거야 아버지가 부탁하셔서 들어 드린 거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네요.”
월급도 안 받고 무상으로 일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나가던 회사를 안 나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막 그러고 싶지 않다고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무슨 상관입니까. 말했듯이 내가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내 회사도 아닌데요.”
“……그렇죠.”
뭔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인데, 진짜 맞는 상황인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아버지와 형에게 장단 맞춰 주는 것도 그만둘 거고, 내 것 아닌 회사에 나가서 일해 주는 것도 끝입니다.”
“그러셔도 돼요?”
“됩니다. 어차피 아버지에게 받아 낼 건 다 받아 냈어요.”
“받아 낼 거요?”
“앞으로 놀고먹으려면 돈이 있어야죠. 매년 땅하고 건물 받아 둔 것도 꽤 되고, 현금도 쏠쏠히 모아 놨습니다.”
“……매년이요?”
“네. 평생 아버지와 형한테 끌려다닐 게 아니라면 미리 준비해 둬야죠. 아버지가 유산을 인질 삼아 휘두르려 할 게 뻔했거든요. 그래서 그때그때 받아 뒀죠. 유산 안 받아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아……, 미리 받아 두셨구나.”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은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가입니다.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을 해 주고,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준다. 서로가 만족스러운 최선의 거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받아야죠.”
하긴, 이환이 연극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회장님이 선선히 이환의 의사를 받아들이겠는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회장님이 가진 재력이 무기가 될 것이다. ‘유산을 받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라!’라거나 ‘네가 쓰는 카드를 정지시키겠다.’라거나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 등등.
그걸 이환 또한 알고 있었기에, 미리 뜯어낼 수 있는 건 죄다 뜯어낸 모양이다.
“실장님은 어릴 때에도 진짜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그 나이에는 돈에 대한 개념도 잘 없잖아요. 저 같으면 용돈 올려 달라고 하거나, 조금 더 머리를 굴려서 나중에 말하겠다고 적립해 두는 게 최선이었을 것 같아요.”
“나도 그랬습니다. 돈으로 달라고 하면 얼마를 불러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혔죠. 그래서 처음엔 땅이나 건물로 받았습니다. 나중으로 미루면 못 받을 걸 알았거든요. 어떻게든 본인 손해는 안 보려고 하는 사람이 아버지예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회사를 키웠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 양심적으로 대가를 지불할까요.”
“그래도 아버지인데.”
“자식에게 용돈을 줄 수는 있지만, 자식에게라도 정당한 대가는 주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약속 앞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
“해민 씨도 기억해 둬요. 누군가가 해민 씨에게 줄 대가를 나중에 주겠다고 말을 한다면, 믿지 말아요. 나중에 줄 거라면 지금 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지금 주지 않겠다는 말은 나중에도 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괜히 그런 말에 넘어가면 뒤통수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환은 어딜 가든 굶어 죽을 일은 없을 듯하다.
태어나길 부유하게 태어나 쭉 그렇게 자라 온 이환은 부족함에 대해 생각하고 대비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어릴 때부터 미래를 생각하고 대비할 정도로 야무지고 영특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초등학생 때 회장님과 독대하여 그런 거래도 했겠지.
나는 초등학생 때 무엇을 했나 떠올려 보았으나, 그냥 학교 갔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다가 해가 질 무렵 느릿느릿 집에 들어가 혼이 났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귀농하시는 거예요?”
“귀농이요?”
“예전에 시골 내려가 살고 싶다고 들은 것 같은데…….”
“혹시 귀농하고 싶습니까?”
“저요?”
“네.”
“아뇨. 저는 농사와 관련 없는 삶을 살아서. 제가 농사를 지으면 다 죽을 것 같아요. 아니다, 씨 뿌리는 단계에서 싹이 안 날 것 같은데요.”
“우리는 흙보다 콘크리트가 더 친숙한 세대니까요. 서울 살면서 농사지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환과 내가 같은 세대로 묶이기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힐금 눈치를 보며 입을 오므렸다.
“산이나 바다 근처에서 살아 보고 싶기는 합니다. 주변에 인적 없는 고요한 곳. 섬도 좋고요.”
“아, 섬. 예전에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해민 씨는 섬 좋아합니까?”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섬을 가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내다 오는 거면 모르겠는데 거기서 살기엔 무서울 것 같아요.”
“무서워요?”
내 말에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듯 이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냥요. 그냥…… 사람이 무서우면서도,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것도 무서울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충분히 혼자였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혼자만 있는 생각을 하니까 또 무섭고 그래요.”
내내 혼자가 되기를 바라 왔는데, 막상 혼자인 내 모습을 떠올리자 어째서 두려운 걸까.
“귀신 나오면 어떻게 해요.”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며 농담을 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이환이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요정님도 귀신을 무서워합니까.”
“실장님 생각은 어떤데요? 요정이 귀신을 무서워할까요, 아니면 친구 먹을까요.”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입술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짓던 이환이 이내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도 내 요정님을 거부할 수 없겠죠. 그런데 내 요정님의 기준이 워낙 높아서 친구 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제 기준이요?”
“요정님 기준을 만족하는 친구가 아직까지 없었던 거 아닙니까.”
여기서 친구 없다는 공격을 한다고?
친구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지적당하리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뼈아팠다.
팩트로 때린다는 게 이런 상황을 말하는 거였구나.
“저도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학원 다녔으면 친구가 있었을 거예요. 공사장이 친구를 사귈 만한 장소는 아니잖아요.”
가깝게 지내던 최 씨 아저씨나 박 씨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있었지만, 다들 아버지보다도 연배가 높았다. 친구라기보다 자식 생각이 나 안쓰러운 마음에 챙겨 준 쪽에 가까웠다.
시무룩한 내 발언에 이환이 “압니다.” 하고 말했다.
“알아요.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다들 해민 씨와 가까워지고 싶어 했을 겁니다. 친구들도 그렇고, 선후배들도 죄다 몰려들었을걸요.”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요.”
“사실 조금 안도했어요. 해민 씨와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면 질투했을 겁니다.”
“……제가 친구가 없어서 다행이라고요?”
“친구랑 통화하고 메시지 주고받고,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엄청 불안했을 겁니다. 내 요정님은 나만 독점하고 싶으니까.”
“그거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뭐가 이상합니까. 해민 씨는 나 독점하고 싶지 않아요?”
“……굳이?”
“자신 있다는 겁니까?”
이환을 독점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의미였는데, 그게 왜 자신 있다는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자신이 있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해민 씨라면 자신 있을 만합니다.”
나는 아직도 말뜻이 이해가 안 되는데, 혼자 말하고 혼자 긍정한 이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앗, 하고 놀라며 반사적으로 머리를 기울여 그 손을 피했다.
“안 돼요.”
“네?”
“머리 못 감아서 떡 졌어요. 만지면 안 돼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 잠깐, 아주 잠깐 멈칫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거의 그 정도까지 간 거 알아요. 내가 내 머리 만져도 찝찝한데.”
웅얼거리는 소리에 이환이 작게 웃음을 삼켰다.
“씻고 싶어요.”
“아침에 샤워했잖아요.”
“머리 못 감았어요.”
“그거야 꿰맨 곳이 덧나면 안 되니까요.”
“언제 머리 감을 수 있대요?”
“퇴원할 때는 머리 감고 갈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일주일 동안 머리가 떡 진 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당장 내일이면 기름이 줄줄 흐를 것 같은데?
흔들리는 눈으로 이환을 바라보며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을 담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건 내가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이고 참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