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오전 열한 시쯤, 커다란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병실을 찾은 여사님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어떤 씨부럴 놈들이 우리 해민 씨를 납치했대. 그런 놈들은 싸그리 잡아서 콩밥을 먹여야 하는데.”
“오셨어요, 여사님.”
“아니지, 그런 놈들한테는 콩밥도 아까워. 음식물 찌꺼기만 처먹이면서 저어기 탄광에 보내 버려야 해. 이럴 때는 대한민국에 사는 게 너무 싫다니까. 범죄자 놈들한테 너무 관대해. 세금으로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기까지 하잖아.”
구수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여사님이 열을 올리셨다.
“저 괜찮아요, 여사님.”
“괜찮기는. 머리가 깨졌는데. 뇌진탕 증상도 있다면서요.”
“어엄……, 네.”
사실 대가리는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깨질 일이 없었을 텐데, 하도 지랄 발광을 하니까 납치범들이 홧김에 거칠게 제압하면서 생긴 상처였다. 뇌진탕은 깨진 대가리와는 관계없이 마지막에 사고가 나면서 트렁크 안에서 뒹굴며 부딪친 탓이고.
하지만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어설프게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나마 빨리 구해서 천만다행이지.”
“그러게요. 다 실장님 덕분이죠.”
“난 어제 너무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니까.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거려.”
“괜찮으세요? 걱정 끼쳐 죄송해요.”
“해민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병원 아침밥이 일찍 나오잖아. 이미 아침은 먹었을 것 같고, 이왕 늦은 김에 음식 몇 가지 더 해 왔어요. 병원 밥이 워낙 부실해야지. 식단 주의하라는 말은 없었죠?”
“네. 뇌진탕 증상이 가볍게 있다고 해서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실장님이 입원해서 좀 지켜보자고 하셔서요. 다른 곳은 이상 없어요.”
양손 무겁게 들고 오신 보따리가 음식인가 보다.
확실히 어제 저녁 식사도 그렇고, 오늘 아침 식사도 양이 부족하게 느껴지긴 했다. 병원 밥도 돈 받고 파는 것일 텐데, 양심 없이 너무 남겨 먹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내가 해민 씨 식사량을 알잖아. 그렇게 잘 먹는 사람이 병원에서 쥐꼬리만큼 나오는 밥에 배가 부르겠냐고.”
“소식이 건강에 좋대요. 그래서 조금씩 주나 봐요. 제가 그동안 많이 먹기는 했잖아요.”
때에 맞춰 끼니 챙기기가 어려운 터라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이환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진짜 원 없이 먹었다.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기보다 잘 먹는다며 오히려 칭찬을 하는 사람만 있으니 먹는 데에서만큼은 눈치 보는 일이 없었다. 너무 눈치를 보지 않았나 반성이 될 정도로.
“많이 먹기는. 한창 클 나이인데 그 정도는 먹어야지. 그동안 깨작거리는 사람만 있어서 밥하는 보람도 없었는데, 내가 해민 씨 보면서 오랜만에 음식 하는 재미가 들었잖아.”
먹어서 클 나이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소파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이환을 흘겨보는 여사님의 말에 어설프게 웃음을 흘렸다.
“잡채랑 불고기 해 왔어요. 아플 때는 고기 먹어야 해.”
“병원 밥에도 고기 나와요.”
“병원에서 줘 봤자 한 주먹도 안 되게 나오잖아. 한두 젓가락 집어 먹으면 끝이지. 그걸로 간에 기별이나 가겠어요?”
통 하나 가득 담아 왔으니 끼니마다 데워서 같이 먹으면 된다고 말하던 여사님이 손뼉을 짝 쳤다.
“즉석밥도 사 왔어요. 뒀다가 밥 부족하면 하나씩 데워 먹어. 도련님, 여기 전자레인지 있죠?”
“네. 있습니다. 조리는 못 하지만, 간이 싱크대와 전자레인지 정도는 구비되어 있던데요.”
“역시 VIP 병실이 좋긴 좋아.”
“VIP 병실이요?”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병실보다 더 좋은 병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다. 돈 많고 높으신 분들이 사용한다는 특별 병실. 그걸 VIP 병실이라고 한다고.
이제까지 여기가 일 인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VIP 병실이었다니. 일 인실에 입원해 본 적이 없어서, 혼자 쓰고 있으니까 막연히 일 인실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어쩐지 병실이 과하게 넓고, 소파도 예사롭지 않고, 공용 탕비실에 있어야 할 싱크대며 전자레인지며 정수기가 병실 안에 있더라니.
“VIP 병실이면 엄청 비싼 곳 아니에요? 그냥 일 인실인 줄 알았는데…….”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여사님이 살짝 당황하더니 이내 손을 내저으며 까르르 웃었다.
“여기도 혼자 쓰니까 일 인실이 맞지. 일 인실이야, 일 인실.”
그래, 일 인실이 맞다. VIP 일인 병실.
시선을 돌려 이환을 쳐다보자, 그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그란 뒤통수가 대답을 대신 하는 듯했다.
“그래서, 잘 쉬고 있는 거예요? 더 검사받을 건 없고?”
말을 돌리는 기색이 뚜렷했지만, 여사님을 붙잡고 따져서 뭐 하겠느냐 싶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사는 어제 다 받았대요. 특별한 문제도 없이 병원에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VIP 병실이라는 말을 들으니 역시 퇴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냐. 원래 사고 나면 당장은 몸도 마음도 놀라서 아픈지 모르는 거예요. 시간이 좀 지나고 안정이 되었을 때 아픈 게 확 느껴지는 법이거든. 의사들도 다 생각이 있는데 멀쩡한 사람을 입원시켜 놓을까.”
“그래도 엄청 비싼 병실에 있을 필요는…….”
“비싸긴 뭐가 비싸. 여기 SG 병원이잖아. 회장님 아들이 여기 있는데 누가 돈을 받아. 공짜예요, 공짜.”
“그렇죠. 당연히 공짜죠.”
“…….”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인데?
그런데도 하하 웃으며 말하는 여사님이나 옳다구나 맞장구를 치는 이환이나, 왜인지 묘하게 필사적이라서 차마 지적할 수가 없었다.
“차 사고도 났다며.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제일 무서운 법이거든. 멀쩡하게 잘 지내다가 갑자기 어디가 시큰거린다니까.”
트렁크에 넣어져서 신나게 구른 것도 교통사고에 해당하는가.
“집에 갔다가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해. 병원에 있는 게 좋아. 의사가 있으라고 했으면 있어야지. 아픈 곳도 없는데 괜히 병원에 붙잡아 둔다 싶겠지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더라고. 그 사람들이 괜히 의사겠어요.”
의사보다 이환의 의견이 많이 들어간 결정 같은데.
“병원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쉬어요.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까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먹고 자고만 해요. 때 되면 먹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고. 그렇게 쉬면 멀쩡해져서 일주일 지나면 더 있겠다고 해도 나가라고 할 거예요.”
멀쩡해지기를 바랄 정도로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어떻게든 나를 병원에 붙잡아 두려는 여사님의 노고가 보이는 듯하여 꾹 입을 다물었다.
“오늘부터는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도련님은 집에 들어가서 좀 자요.”
“소파에서 잤습니다. 해민 씨 옆에는 제가 있어야죠.”
“오늘도?”
“일주일 동안 계속이요.”
“그냥 두 분 다 집에 가셔도 괜찮은데요.”
옆에 누군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할 정도로 중병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혼자 있어도 충분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기 민망할 정도로 멀쩡한데, 여사님이든 이환이든 옆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민 씨를 어떻게 혼자 둡니까?”
“그래. 환자를 혼자 두면 안 되지.”
“환자라고 하기엔 너무 멀쩡하니까 괜찮아요.”
“멀쩡하면 입원했을 리가 없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멀쩡한데도 왜 입원해 있어야 하나요.
애써 묻어 두었던 의문이 다시 솟아올랐다.
“밤에 갑자기 열이 오르거나 의식을 잃으면 어떻게 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옆에 사람이 있어야지.”
“여사님. 저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에요.”
가능성을 생각하면 사람은 누구나 돌연사의 걱정을 안고 살아야 한다.
걱정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생각했으나, 내 생각과 관계없이 여사님과 이환은 누가 남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환의 강력한 주장에 여사님이 먼저 손을 들고 물러섰다.
“해민 씨 너무 괴롭히지 말고. 옆에서 계속 괜찮냐, 아프냐 물어보는 것도 신경 쓰여. 푹 쉬게 둬요.”
“네.”
“중간중간 과일도 챙겨 먹이고요.”
“네.”
“반찬은 내가 하루에 한 번씩 가져올게요. 아니면 백 비서나 김 기사 통해서 전달하거나.”
“네. 그렇게 하세요.”
여사님이 한발 물러난 덕분인지 이환은 그녀의 당부 섞인 잔소리에도 네, 네 하며 얌전히 대답했다.
“제가 그 정도로 신경 써서 돌봐야 할 환자는 아닌데요.”
“입원까지 했는데 환자지. 기운 없으면 수액 좋은 거로 하나 놔 달라고 해서 맞고. 병원 입원한 김에 건강 검진도 한번 받아 보면 좋겠네. 그게 의외로 시간 내서 하려고 하면 번거롭거든.”
“역시 여사님이십니다. 퇴원하기 전날 일정을 잡아 봐야겠습니다.”
“…….”
뭔가 나를 대상으로 나도 모르는 계획이 잡혀 가는 듯하다.
∞ ∞ ∞
점심 먹는 모습을 보고, 과일까지 깎아 먹인 후에야 여사님은 돌아가셨다. 간병하겠다고 남은 이환이 영 미덥지 않은지 마지막까지 환자 귀찮게 하지 말고 푹 쉬게 두라는 당부를 남기셨다. 네, 네, 넙죽넙죽 대답하던 이환은 여사님이 가시기 무섭게 내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제 좀 자요.”
“……지금 밥 먹었는데요?”
“그러니까. 먹었으니까 자야죠.”
어디서 나오는 논리일까. 이제껏 먹었으니까 자야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