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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08)화 (108/172)

108화

“아무래도 학교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은 슬슬 질린 모양이고, 타깃을 나로 바꾸려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수가 뻔히 보이는 수작에 놀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골치가 아픈 건, 형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으면 장난의 수위가 높아진다는 건데. 아무리 알파의 신체 능력이나 반사 신경이 뛰어나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이잖아요.”

“…….”

손으로 이마를 감싼 이수한은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둘째 아들이 무슨 말을 종알거리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이 어린 아들의 망상이라고 해도 문제이고,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였다.

“저는 아직 어려요. 다 크지도 않았고요. 지금 형이랑 붙으면 제가 질 게 분명하고, 형 성격에 재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나를 죽일 거예요.”

“환아.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 형이 왜 너를 죽여! 어디 감히 아버지한테 그런 소리를 해. 오늘 혼이 나야겠구나.”

“화내는 척하지 마세요. 형 성격이 정상은 아니라는 거, 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 형이 학교에서 어떤 짓을 벌이는지 아버지 귀에 안 들어갔어요? 그거 다 전략실 직원들 풀어 입막음하고 뒤처리하셨잖아요. 애들끼리 장난 좀 칠 수 있지, 내 자식이 장난 좀 치겠다는데 뭐. 그냥 그런 생각이셨겠죠.”

오늘따라 똑 부러지는 둘째 아들의 입담에 이수한은 헛기침만 나왔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는 조금 과격한 사고를 치고 다니긴 했으나, 초등학교 들어가며 말썽부리는 일 없이 오히려 더 차분하게 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성인과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입담이 이리 좋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정이가 환이랑 가까워지고 싶은가 보다. 어떻게 해야 가까워질지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네가 형에게 먼저 다가가 보는 건 어떠냐.”

“그럼 저도 형이 쓰는 방법으로 형이랑 놀아 주면 돼요?”

화분을 떨어뜨리고, 차의 브레이크를 고장 내고, 사람을 사서 사고를 일으키고, 그래도 되느냐는 이환의 천진한 물음에 이수한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건 그냥 사고야! 실제로 정이가 그랬다는 증거도 없지 않느냐!”

“증거 없는 사고는 저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작은아들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보며 이수한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가 정이 놈 불러다 혼이라도 내주랴?”

“혼난다고 정신 차릴 사람인가요.”

어째서인지 열 살배기 아들이 아니라 동년배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이수한은 그보다 더 중요한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아비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겠지?”

“형의 장난이 심해지면, 결국 형이 나를 죽일지도 몰라요.”

“정이가 너를 왜 죽여!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작고 힘도 없어서 그냥 당하기만 해야 해요. 그런데 내가 형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도 형보다 작을까요? 내가 안 죽고 형보다 더 커지면, 그땐 내가 형을 죽일 거예요.”

“이환!”

“아버지는 형을 정신 병원에 집어넣거나, 내가 죽거나, 형이 죽는 걸 봐야 해요. 아버지는 어떤 걸 원하세요?”

“…….”

“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요. 당하는 사람이 문제인 거라고. 누구한테 뒤통수를 맞을 바에야, 먼저 뒤통수를 치라고. 앞서 나가는 사람이 되라고. 내가 형보다 늦게 태어났고, 형보다 어리고 약해서 지금 당하는 건 불가항력이에요.”

불가항력.

초등학생이 사용하기엔 상당히 고급스러운 단어 선택에 이수한은 속으로 감탄했다. 몸을 움직이며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요즘 들어 책도 많이 읽는다더니 어휘력이 상당히 늘었구나 기특한 마음도 들었다.

태어나길 알파로 태어난 둘째 아들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월등하게 성숙했다. 큰아들을 포함하여 이차 성징 시기에 발현한 알파들과도 궤를 달리했다.

발현 후에야 특성이 드러나는 여느 알파들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알파였던 이환은 애초에 그들과 출발점이 다른 셈이었다.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누구보다 빨리 기었고, 누구보다 빨리 걸었다. 다른 아이들이 옹알이를 할 때 말문이 트였고, 글을 읽기 시작한 시기도 비할 수 없이 빨랐다.

가끔은 장남인 이정이 알파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알파로 발현하긴 했으나, 태어날 때부터 알파였다면 지금보다 더 완벽한 장남이자 후계자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형만큼 커지면 참을 이유가 없어요. 당한 만큼 갚아 줄 거고요. 나는 형이 나만큼 뛰어난 알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당해 온 걸 형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나는 버텨 살아남아도 형은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버지.”

“……환아. 너는 내 아들이다. 정이도 내 아들이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부자간, 형제간의 정과 사랑을 어필해 보려 했던 이수한은 냉랭한 이환의 표정을 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버지 큰아들이 아버지 작은아들을 죽이려는 상황이죠.”

“그건 비약이라니까!”

“비약이지만, 결국 그렇게 될 거예요.”

“아이고.”

어휘력이 낮아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어휘력이 너무 뛰어나서 설득이 먹히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이마를 짚으며 이수한이 한숨을 토해 냈다.

“장남을 정신 병원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장남이 죽는 꼴도 못 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을까 했던 이수한의 예상과 달리, 이환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형을 그렇게 키운 건 아버지니까요. 형의 결함을 인정한다는 건 아버지의 결함을 인정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잖아요.”

“…….”

“형이 내게 원하는 반응, 원하는 모습은 짐작하고 있어요. 그걸 형에게 보여 줄게요. 형이 원하는 동생이 되어 줄 수 있어요.”

“…….”

조용조용하게 이어지는 이환의 말을 들으며 이수한은 침묵했다.

이수한은 중학생도 되지 않은,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둘째 아들이 하는 말을 쉽사리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계획은 그만큼 진지하고 치밀했다. 아이의 허황된 상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이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쳤는지가 확연히 보였다.

“대신 아버지는 저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셔야 해요.”

“네가 네 형 장단에 맞춰 주는데, 보상은 아비가 하라고?”

“아버지의 장남을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죽는 꼴을 보실 거예요? 운이 좋으면 제가 죽고 장남이 살 수도 있겠는데, 운이 나쁘면 제가 살고 장남이 죽어요.”

“……이놈! 자꾸 죽는다, 죽는다. 아버지가 오냐오냐했더니 무서운 줄을 모르고 아주 막말을 하는구나!”

“화를 내기 전에 현실을 직시하세요, 아버지.”

화를 내 봤자 겁먹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데, 지금보다 더 머리가 굵어지면 어떻게 나올지. 이환의 미래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면, 형을 불러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형이 제대로 답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따로 사람을 써서 조사하셔도 괜찮고요. 그런데 뭐가 달라지겠어요? 형도, 저도 그대로인데.”

“아주 그냥 아버지한테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말대꾸를…….”

“혹시 화내시면서 보상을 줄이려는 계획인가요? 용돈 좀 올려 주고 입 닦으시게요?”

“이놈!”

찔끔한 속내를 감추며 이수한이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제 손을 잡으세요. 형이 저한테 집중하고 있는 게, 아버지에게도 좋아요. 저한테서 흥미가 떨어진 형이 그다음으로 누구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예상할 수 있으세요? 괜히 예상 못 한 순간, 예상 못 한 사람을 상대로 더 큰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라도 형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감사해야 해요. 장남을 버리지 못하시겠다면서요.”

“그래서, 이 아비는 너한테 감사하며 보상이나 해라?”

“네. 형을 컨트롤하는 건 제가 맡을게요. 아버지도 형을 어떻게 구슬리고 형이 어디 가서 뻘짓을 하지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형 뒤꽁무니에 사람을 붙여 놓는 것보다는 그냥 저에게 줄 보상을 고민하는 게 더 마음 편하시지 않을까요.”

“건방진 놈.”

“아버지가 형 대신 저를 택했다면 더 편했을 거예요. 누가 봐도 제가 더 우월한 인자를 지닌 알파인데, 왜 형을 포기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이게 한국에서만 보인다는 장남 사랑인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모습은 끔찍할 정도로 귀엽고 천진했으나, 그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천진하지 못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그러겠냐. 아주 그냥,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아버지를 상대로 못 하는 말이 없어. 정이보다 네 교육이 잘되었는지부터 의심을 해야겠다!”

“예쁘다 예쁘다 받아 본 적이 일단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형과 제가 가족의 정을 운운하기엔, 우리는 너무 개인적인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이제 알 거 다 알아요. 그렇다고 서운하다거나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말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괜히 가족의 정 같은 걸 꾸미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아버지는 너무 안 어울려요. 평소처럼 객관적으로 합당한 보상만 해 주시면 돼요.”

화도 내 보고 혼도 내 보고 어르고 달래 보기도 했으나 작은아들은 변함이 없었다. 이수한이 이정에게 항상 말해 왔던 냉정하고 냉철한 사업가의 모습이 어린 이환에게서 보이는 듯했다.

하필이면 냉정하고 냉철한 협상자의 대상이 제가 될 줄이야.

적당히 어르고 달래어 넘어갈 틈도 보이지 않고, 무마시킬 명분도 없고, 무엇보다 아들의 입장이 확실하게 전해져 왔다.

“그래. 뭘 가지고 싶으냐. 원하는 게 있으니 이리 구구절절 말하는 거겠지.”

“협상은 아쉬운 쪽이 먼저 제시하는 거랬어요.”

커다란 소파에 푹 파묻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던 이환이 씨익 웃으며 이수한을 바라보았다.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 아버지에게 장남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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