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창고 문이 열렸다.
두 번의 밤이 지나고 아침 열 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찰그랑, 덜컹.
쇳소리에 눈을 뜬 이환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벌컥, 창고 문이 열리며 쨍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찌푸려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역광을 받아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방문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도, 도련님?”
여사님은 당연히 아니었고, 가족들도 아니었다.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고용인 중 한 명인 듯한데, 아직 빛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가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왜, 왜 여기에……, 언제부터 이 안에 갇혀 계셨던 겁니까?”
다급히 다가와 이환을 일으켜 세운 남자가 혹여 다친 곳은 없는지 이환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누구?”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이 아니다. 까만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남자는 잡일을 할 만한 차림새 또한 아니었다.
“그룹 전략실 대리 박성태입니다. 그보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왜 창고에 갇혀 계셨던 겁니까?”
그룹 전략실이라. 아버지의 고약한 심술이 또 피해자를 양성한 모양이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적, 전략실 직원들을 그렇게 부려 먹었다고 들었다. 개인적인 일에 운전도 시키고, 심부름도 시키고, 심지어 집안의 잡일까지도 직원들을 불러 시켰다고 한다. 어차피 할아버지 회사에서 월급 주는 놈들이고, 회장이 시키는 일을 하는 놈들인데 굳이 다른 사람을 쓸 일이 뭐 있냐고. 월급 주는 놈 불러 쓰면 되는 일 아니냐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그런 일이 없어졌다지만, 가끔 전략기획실의 일 처리가 미흡하다는 이야기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집으로 불러들여 머슴처럼 굴리곤 했다.
그런 취급을 받기 싫으면 알아서 잘하라는 뜻이다.
눈앞의 남자도 무언가 실수를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전략기획실에서 희생양 대표로 뽑혀 왔다거나, 연차가 적어 짬 처리를 당했다거나. 그러니 평일 한낮에 회장님 집에 불려 와 와이셔츠 차림으로 창고를 들락거리고 있겠지.
“창고는 왜 왔어요?”
“짐을 좀 넣으러 왔습니다. 여기에 넣어 두면 된다고 하셔서요.”
박성태가 이환을 부축해 조심스럽게 창고 밖으로 이끌었다. 그의 말처럼 창고 밖에는 다리가 부러진 흔들의자와 자그마한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부러진 건 그냥 버리는 게 나을 텐데 굳이 창고에?”
“모르겠습니다. 저야 넣어 두라고 하시니 그렇게 할 수밖에요.”
의아해하는 이환에게 박성태가 웃으며 대꾸했다.
“안에 매트는 도련님 것입니까?”
“네. 근데 이제 안 쓸 것 같아요. 한쪽에 대충 처박아 두세요.”
알려진 아지트는 더 이상 아지트로써의 의미가 없다.
조금 시무룩해진 이환이 안으로 들어가 휴대용 스탠드와 그동안 한두 권씩 가져다 두었던 책을 주섬주섬 모았다.
“책이 꽤 많네요. 제가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흔들의자와 철제 테이블을 창고 안으로 집어넣고 다가온 박성태가 쌓인 책들을 보고 대신 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환은 남은 에너지바 한 개와 사 분의 일쯤 남은 물병, 스탠드를 손에 들었다.
“도련님 비밀 공간이었습니까?”
“네. 그런데 이제 폐쇄예요.”
“창고는 아무래도 위험하죠. 계신 줄 모르고 누가 문을 잠갔나 봅니다.”
“그랬을 수도 있고요.”
뾰족한 대꾸에 박성태가 당황해 눈을 굴렸다. 어린 도련님의 심기가 왜 갑자기 불편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조심하는 편이 좋겠다 생각했는지 입도 꾹 다물었다.
“심부름은 누가 시킨 거예요?”
계단을 올라 이 층의 방으로 향하며 이환이 슬쩍 물었다.
“아, 사모님이 시키셨습니다.”
티 테이블과 흔들의자. 누구의 것이라고 하기 애매한 이유는 아무나 앉아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에 놓여 있던 테이블과 의자인 탓이다. 그러니 그 여자가 그런 심부름을 시켰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박 대리님에게 직접 시킨 거예요?”
“큰 도련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전개인데.
애초에 형은 아버지의 여자와 개인적으로 말을 나눌 만큼 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여자의 심부름을 대신 전달할 이유도 없다. 진짜 그 여자에게 그런 부탁을 받았다 해도 그걸 순순히 들어줄 형도 아니다.
“여기다 두면 돼요.”
“네.”
방에 비치된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 두 병을 꺼내 하나를 박성태에게 건네고, 남은 하나의 뚜껑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틀 동안 배고픔보다 갈증이 더 고통스러웠다. 물을 아낀다고 입만 축인 터라 목마름이 심해져서, 물 한 그릇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크으.”
500mL 생수 한 병을 단번에 비워 내는 이환을 보며 박성태가 놀란 얼굴을 했다.
“혹시 오래 갇혀 계셨던 겁니까?”
“아뇨. 생각보다 오래는 아니었어요.”
그래, 생각보다 오래는 아니었다.
어쩌면 여사님이 집에 온 뒤에야 발견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이틀이면 준수한 수준이지.
“나는 씻고 좀 자고 싶은데.”
“아, 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책 옮기는 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푹 쉬십시오, 도련님.”
인사를 하고 나가는 박성태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용히 닫히는 문을 확인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틀 만에 구해 줬다는 건 역시나 굶겨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단순한 괴롭힘 수준인가 싶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보다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더 먼저여야겠지만. ‘누구’인지를 안다면 ‘왜’라는 질문에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는 과연 어느 쪽일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환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 ∞ ∞
“할아버지, 집사 할아버지.”
“오, 이환 도련님. 식사하러 내려오신 겁니까? 여사님 안 계신다고 계속 비밀 기지에 계셨던 건 아니겠지요?”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일을 맡아서 해 오던 집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여전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환이 태어나기 전부터 집의 장승처럼 존재해 온 사람이기에 이환에게는 그의 부모만큼이나 익숙했고, 여사님만큼이나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보다 정원 창고요. 그거 잠금장치 언제 고쳤어요?”
“창고 자물쇠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떠올리는 집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환이 마지막으로 창고 아지트를 방문했던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이틀 전에 창고에 갇혔으니, 오 일 사이에 누군가가 고쳤다는 말이 된다.
대답을 기다리는 이환의 귀가 쫑긋거리는 것을 알아차린 집사가 흘흘 하고 웃음을 흘렸다.
“보자. 늙은이 기억으로는 한 사 일 전에 회사 사람이 와서 고쳐 놓고 간 듯합니다만.”
“전략실 사람이요?”
“네. 아마도요. 그전에는 자물쇠가 망가진 것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거긴 잘 드나들지 않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집사의 시선에 이환이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그때 왔던 직원이 오늘 온 직원이에요?”
“그때는 다른 직원이었을 겁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니이, 그냐앙. 저 밥 먹으러 갈게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돌린 이환이 후다닥 식당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아이의 행동이 마냥 귀여웠는지 집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정원으로 나갔다.
집사를 피해 식당으로 들어온 이환은 먼저 와 있던 이정을 발견하고 그의 옆에 가 앉았다.
“우리 환이, 얼굴 보기 참 힘드네.”
언제부터 얼굴 보고 밥 먹었다고, 새삼스럽게.
맞은편에는 아버지의 새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같이 산 지 벌써 몇 년이지만 여전히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여자. 아버지의 자식이자 제 동생들을 낳았으나, 여전히 가족이라기보다는 그냥 한집에서 사는 남처럼 느껴졌다.
다행인 것은 저 여자 역시 가깝게 지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환은 여자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딱히 좋게 보지도 않지만.
이환에게 여자는 그냥 같은 집에서 존재하고, 가끔 얼굴을 보는 흔한 타인 중 하나였다.
여느 때와 같이 식사 시간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일과 중 하나처럼 의무적으로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선 이환이 총총 뛰어 저택을 누볐다.
중간중간 고용인들을 만났으나, 찾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으로 나가자 집사 할아버지 옆에서 정원의 돌조각을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는 박성태가 보였다.
“할아버지.”
“식사하고 나오신 겁니까?”
“네. 지금 먹었어요. 할아버지는요?”
“늙은이도 곧 먹어야지요.”
“박 대리님은 밥 안 먹어요?”
“박 대리님도 늙은이랑 같이 먹겠지요.”
“그럼 할아버지. 내가 박 대리님한테 뭐 좀 부탁해도 돼요? 식사하실 때 보내 드릴게요.”
“으음. 그럴까요?”
“네!”
“그래요. 직원분은 도련님 따라갔다가 한 삼십 분 뒤에 식당으로 오세요. 그때 같이 식사합시다.”
돌조각을 옮기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박성태가 겨우 허리를 펴며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에.”
“박 대리님. 저 따라오세요.”
밥 먹은 뒤에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나 일단 돌 조각품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성태가 이환의 뒤를 따랐다.
“심부름시키실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박 대리님.”
“네, 도련님.”
주변에 듣는 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환이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졸졸 쫓아오는 박성태에게로 몸을 돌리고, 이환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략기획실에 전화해서 사 일 전에 여기 왔던 직원이 누구인지 물어봐 주세요. 와서 창고 자물쇠를 고치고 갔는지도.”
“…….”
창고 자물쇠 이야기가 나오자 박성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자물쇠는 사 일 전에 고쳤는데, 오늘 내가 갇힌 일에 무슨 책임이 있겠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니까, 전화해서 그 직원이 누구인지 좀 알아보세요.”
“네에.”
“지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