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점심을 먹은 뒤,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이환은 오전에 서점에서 사 온 책 두 권을 손에 들었다.
요즘 유행인지 몇 달간 비슷비슷한 자기개발서가 베스트셀러 코너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환은 자기개발서보다 기술서 쪽을 선호했다.
아무리 금칠을 해 놨어도 결국 자기가 개고생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저급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생각 탓이었다. 실제로 그 사람들의 방식이 성공한다거나 부자가 되는 미래를 보장한다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는데, 마치 그것이 진실인 양 팔려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도련님. 입맛이 없더라도 식사는 꼭 챙기셔야 해요. 과일도 먹고, 간식도 먹고요. 어릴 때부터 잘 먹어야 키가 쑥쑥 큰답니다.」
방을 나서려다 머릿속에 떠오른 여사님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사님. 나는 엄청 짱 센 알파라서 나중에 엄청 엄청 클 거래요.」
「엄청 짱 센 알파도 안 먹으면 안 커요! 엄청 짱 센 160센티미터 알파가 되고 싶어요? 이렇게 훌륭하게 낳아 주셨는데 나중에 키 안 컸다고 사모님 원망하지 말고 미리미리 잘 먹어야죠. 도련님은 뭐에 꽂히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려서 큰일이에요. 혹시 먹기 싫어서 일부러 잊은 척하는 건 아니겠죠? 서랍 안에 주전부리 꽉꽉 채워 둘 테니까, 앞으로 어디 갈 때에는 주머니에 간식을 넣고 다니세요. 주머니에 있는데도 안 먹지는 않겠지.」
평소에는 뭐든 오냐오냐하는 여사님이지만 먹는 것에 한해서는 엄격해지곤 했다. 그런 그녀가 무섭지는 않았지만 길게 이어지는 잔소리까지 괜찮은 건 아니었다.
잔소리는 듣기 싫지.
으, 하고 고개를 내저은 이환이 서랍에서 에너지 바를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늘은 어디에 처박혀 있을까 고민하다 창고로 향했다. 가족들 몰래 여기저기 만들어 둔 아지트가 집 지하실에도 있고, 옥상에도 있고, 정원 한구석에도 있었으나, 이환이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창고였다.
넓은 집, 많고 많은 공간을 버려두고 하필이면 먼지 구덩이 속에 기어들어 간다고 여사님은 매번 질색을 하지만. 그렇기에 아지트로써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적이 드물고 어두컴컴한 장소는 비밀 아지트의 최우선 조건이지 않나.
저택의 구석진 곳에 자리한 탓에 근처를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창고는 혼자만의 아지트 느낌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창고는 사용하지 않는 잡다한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고, 날 잡아 한 번씩 정리를 한 뒤에 방치해 두는 쪽에 가까워 지저분했다.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서 정리되지 않은 무질서함이 느껴졌고, 실제로도 먼지가 많아서 지저분하기도 했다.
창고 문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벽 쪽의 물건을 밀어내 공간을 마련하고, 그렇게 옆으로 치워 둔 물건들을 차곡차곡 벽처럼 쌓았다. 창고 입구에서 보면 안쪽에 빈 공간이 있음을 쉽사리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공간에 남들 모르게 옮긴 일 인용 접이식 매트를 깔고, 얇은 이불과 쿠션 몇 개도 가져다 놓았다. 여기만이 아니라 아지트마다 쿠션과 이불을 가져다 두었으니 그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는데, 여사님이 의외로 잠잠했다. 아직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나 몇 개를 더 빼돌린다면 조만간 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싶어 아지트 추가 장만은 잠시 보류 중이었다.
매트 위에 배를 깔고 누운 이환이 휴대용 스탠드를 켜고 가져온 책을 펼쳤다.
조용한 사위, 살짝 쿰쿰한 먼지 냄새, 책 위를 비추는 조명등.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이환은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두꺼운 책 한 권을 마지막 장까지 읽고 몸을 일으키자 허리가 아팠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깨알 같은 글자에 몰입한 탓에 눈도 뻑뻑했다.
알파의 뛰어난 신체 능력과 회복력은 시력 저하와 디스크에도 강점을 보이려나.
잠시 고민해 보았으나 혼자서는 답을 알 수 없어서 나중에 윤 박사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시계를 확인하자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여사님은 창고 아지트를 알고 있기에 찾으러 왔을 텐데, 담석 수술 때문에 어제 병원에 입원을 한 터라 밥 먹으라며 찾는 사람도 없었다.
“언제는 찾는 사람이 있었나.”
여사님을 제외하면 다들 무신경한 가족이다. 제 할 일 하기에만 바쁜 사람들.
여사님은 막내아들을 챙기지 않는 아버지를, 동생을 챙기지 않는 형을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라며 화를 냈지만, 이환은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이기적이기보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거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버지가 그러했고, 형이 그러했고, 이환 자신 또한 그러했다.
여사님은 나이 어린 이환이 홀로 방치된다고 생각하여 안쓰럽게 여겼으나, 오히려 누군가가 신경 쓰고 곁을 맴돈다면 매우 귀찮았을 것이라고 이환은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새 여자가 낳은 쌍둥이가 있기에 더 이상 막내도 아니고.
“아, 귀찮아도 밥은 먹어야지.”
여사님이 집에 돌아오면 이환의 식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조사할 게 분명했다. 고용인들도 한 소리를 듣겠지만, 이환 또한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식사 시간은 끝났지만, 그렇기에 가볍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타이밍이다. 다 읽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탠드의 불을 끄고 아지트 공간을 벗어나 창고 문을 여는데, 덜컥 소리를 내며 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잠시 눈을 끔뻑거린 이환이 두어 차례 문을 흔들어 보았으나, 덜컥덜컥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고는 문손잡이에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고, 고리에 자물쇠를 걸어 잠드는 방식이었다. 그 고리가 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자물쇠를 걸지 못하고 대충 닫아만 둔 것을 발견하고 알차게 아지트까지 만들어 두었는데.
언제 고쳐 놓았지?
책을 읽고 있는 사이에 잠금장치를 고쳤다면 드릴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 제가 오늘 창고에 오기 전에 이미 고쳐 놓았다는 말이 되는데, 그럼 왜 문을 고쳤음에도 잠가 두지 않았을까. 왜 자신이 창고에 들어온 뒤에 문을 잠가 버린 것일까.
쾅쾅쾅, 주먹으로 문을 강하게 두드려 보았으나 창고가 워낙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터라 누군가가 듣고 찾아올 거란 기대를 하기가 어려웠다.
이환은 다시 아지트 공간으로 들어가 매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냄새가 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손에 턱을 괸 이환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깜빡 잊어버렸다가 뒤늦게 문을 잠그러 왔다 해도, 창고 안에 뻔히 불이 켜져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두고 문만 잠근다? 창고 조명이 그리 밝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불이 켜져 있다는 걸 모르고 지나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조용히 문만 잠가 버리고 갔단 말이지.
간식과 책 두 권만 달랑 들고 와서 밖으로 연락할 수단도 없고,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다. 여사님이라도 있다면 자리에 없는 이환을 찾으러 이곳에 한 번은 들러봄직도 하지만, 하필이면 여사님도 없을 때였다.
“‘하필이면’ 말이지. 하필이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막힌 타이밍이 아닌가.
이환은 지금의 상황이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로 이루어진 상황인지를 의심했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후자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이게 또 문제인데.
짐작만으로 상대를 유추하기에는 꽤나 무거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SG 그룹 회장 아들을 창고에 가두었다. 장난이든 원한이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결과를 짐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텐데도 일은 벌어졌고, 확실한 건 내부자 중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사실이다.
이환은 주머니에 챙겨 온 에너지 바를 꺼냈다. 책 읽는 중간에 먹으려고 가져온 보람도 없이 에너지 바 네 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건 그나마 다행이네.
꼭꼭 간식을 챙겨 다니라고 당부하던 여사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앞으로 여사님 말씀을 잘 듣, 으음, 잘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제가 한 생각에 고개를 주억이며 이환이 에너지 바 하나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에너지 바를 챙겨 온 것은 현재 상황에 플러스.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한 건 현재 상황에 마이너스.
먹을 수 있는 것은 남은 에너지 바 세 개와 500mL 생수 반 통.
내일 하루 정도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 듯하고, 이틀은 빠듯. 삼 일부터는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데.
자신을 여기 가둬 둔 누군가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 이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이환이, SG 그룹 회장의 아들이 창고에서 굶어 죽기를 바라고 가둬 두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정말 죽기를 바랐다면 누군가 올지 안 올지 불확실한 이런 창고에 가둬 둘 게 아니라 조금 더 비밀스러운 곳으로 유인했을 것이다. 여사님도 며칠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올 테니, 자리에 없는 이환을 찾으려 아지트 순례를 할 것이고 가장 처음으로 창고를 찾아오겠지. 이환이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언제까지 가둬 둘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당한 때가 되면 창고 문이 알아서 열리지 않을까.
이환은 만에 하나, 자신을 이곳에 가둬 둔 범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창고에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쉽게 눈에 띌 수 있도록 매트를 창고 문 앞으로 끌어다 놓고 누웠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소리를 지르거나 목 놓아 울 필요는 없다. 그래 봤자 목만 아프고 물만 마시게 된다.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수분 섭취는 줄일수록 좋다.
문 가까이에 있으니 근처에 오가는 사람 소리가 들린다면 그때 문을 두드리든 소리를 지르든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이환은 차분히 이불을 덮고 매트에 누웠다.
창고 문을 잠근 사람을 제외하고, 자신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도, 형도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은 자신을 의아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사 자리에 불참하는 일은 자주 있었고, 어쩌다 한 번이었더라도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새삼스럽게 서운하다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넘겨 온 가족들의 무관심이 이런 순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번거롭고 귀찮지만, 그래도 여사님 같은 사람이 한 명쯤은 옆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