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Rotten Peter Pan
“재미가 없네.”
이정이 목을 쭉 늘여 스트레칭하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재미가 없어.”
최대영을 데려와 판을 벌이는 수고까지 들였는데, 예상보다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조금 더 극적인 반응을 원했다.
기겁하거나 질색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에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이환을 말리거나 이환을 기피하거나.
그런데 서해민은 처음에만 약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전부였다. 속으로 무슨 사고의 과정을 거쳤는지, 혼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차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뭐라 했던가.
「꿀차가 맛있네요.」
꿀차 타령을 해 댔다.
고심해서 만든 무대를 멀뚱멀뚱 구경하며.
이정이 원한 서해민의 역할은 무대 위에서 제 뜻대로 연기하는 배역이지, 무대 밖에서 구경하는 관객이 아니었다.
팔자 좋게 꿀차를 홀짝거리며 리필 타령이나 하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
“가만히 보면 걔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딱히 제 의견에 대한 평가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춘 채 마네킹처럼 서 있는 비서가 오늘따라 심기에 거슬렸다.
“사람 구했다면서. 왜 소식이 없어?”
“아……. 작업을 들어가긴 했는데 실패했답니다.”
“뭐? 왜?”
“일단, 점심에 이환 도련님과 동행하여 식사를 하고 하루에 한 번 그 집 가정부와 장 보러 나오는 걸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오질 않는답니다. 장을 보러 나와도 항상 가정부랑 붙어 있고요.”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지. 그러라고 돈 주고 일 시킨 거 아냐.”
멍청한 새끼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서해민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오기라도 해?”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으니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거다.
남이 던져 주는 푼돈이나 받아먹으며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지새끼들.
“그래서 실패는 뭔데? 아예 시도조차 못 한 거야?”
“아뇨, 시도는 했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허술했으면 실패를 해. 면상 빻은 놈들 밀어 넣은 거 아냐? 우리 환이가 면상 하나는 괜찮잖아. 환이 옆에 붙어 있는데, 어지간한 놈들 낯짝이 눈에 들어오겠냐고.”
“괜찮은 애들로 골랐답니다. 혹시나 해서 두 명이나 투입했는데, 경호원이 붙어 있어서 일이 안 풀린 모양입니다.”
“……경호원? 꼴에 경호원까지 끌고 다닌다고?”
“밀착 경호는 아니고, 이환 도련님이 몰래 붙여 두신 것 같습니다. 서해민 씨는 경호원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답니다.”
“그렇지. 우리 환이가 소중한 요정님을 그냥 밖으로 내돌릴 리가 없지. 그런데 뭔 짓을 했기에 밀착 경호도 아닌데 경호원이 나서?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 바지라도 벗겼대?”
서해민의 눈에 띄지 않게 주변 경호를 하고 있다면 웬만한 일로는 나서지 않는다는 말인데. 대체 어떻게 일을 처리했기에 경호원에게 걸렸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넘어지게 만들어서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뒤따라오던 여자가 밀어내며 대신 넘어졌답니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상황이 붕 떠 버렸고요.”
“등신 새끼.”
“그래서 두 번째 놈을 투입해서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으로 다가가 헌팅하는 식으로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첫 번째 단계에서 대신 넘어졌던 여자가 난입해서 와이프처럼 굴었답니다. 서해민 씨는 상황을 구경하다 가 버렸고요.”
“지랄 났네. 그년이 경호원이야?”
“네.”
이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씨발. 애새끼 하나 홀려 내는 게 그렇게 어렵나? 이제 갓 스물 먹은 오메가, 아니, 오메가도 되다가 만 반푼이라고. 그런 반푼이 홀리는 게 어려운 일이야? 반반한 낯짝으로 돈 냄새 풍기면서 옆구리 찌르면 알아서 넘어올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돈 냄새 대신 생선 비린내만 풍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정은 이 간단한 계획조차 성공시키지 못한 놈들의 능력에 의심을 품었다.
“세상 살기 편해졌나. 애들이 일을 대충대충 하네.”
“죄송합니다.”
“주먹질만 하는 놈들이라 이런 쪽으로는 센스가 없나? 아무리 센스가 없어도 그렇지, 이렇게 간단한 일을 실패한다고? 누구한테 물어도 애새끼 하나 홀리는 게 주먹질하는 것보다 쉽다고 하지 않을까. 이봐요, 한 실장. 뭐가 더 쉬워? 지금 상황이 이해 안 가는 내가 문제인 거야?”
“확실하게 하라고 말을 전해 두겠습니다.”
“실패한 놈들한테 또 시키게? 일 쉽게 하는 사람이 또 있었네.”
“다른 사람을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서해민 씨가 워낙 집 밖으로 안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비서의 말에 이정이 한숨을 토해 냈다.
“아니, 걔는…… 답답하지도 않나? 집에 꿀이라도 숨겨 놨대?”
뭐 한다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서해민의 행적에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이정이 잠시 고민했다.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이환 도련님께 말이 전해져서 경호가 한층 강화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아니, 왜 자꾸 갑갑한 소리만 하는 거야. 재미없게.”
“죄송합니다.”
“됐어. 이번 건 텄어. 한 실장 말처럼, 경호원까지 나섰다면 환이 귀에 들어갔을 테니 똑같은 방식으로는 시도조차 못 할 거야. 요정님이 끼어 있으면 환이가 얼마나 예민해지는데.”
은근슬쩍 요정님의 근황을 묻기만 해도 가시를 세워 댄다.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까 품에 안고 애지중지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두 번째 기회가 오기나 할까.
“요정님이 다른 놈한테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야, 우리 환이가 사랑 앞에서 좌절도 해 보고 고난도 체험해 보고 역경도 극복해 보고 할 거 아냐. 이렇게 완벽한 기회를 어떻게 그렇게 허망하게 날릴 수 있지. 난 진짜 이해가 안 된다.”
나이도 어리고 물정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꼬드기는 정도는 그냥 눈감고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스무 살이라고는 하지만 성인이라고 보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어린애다. 그냥 가서 웃는 얼굴로 좋은 소리만 몇 번 해 줘도 금방 넘어왔을 텐데.
이렇게 쉬우면서도 완벽한 계획이 망가졌다는 데에 이정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번 일은 영 마음에 안 드네, 한 실장.”
“죄송합니다.”
쭉 기지개를 켠 이정이 의자를 빙글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서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SG 빌딩의 최상층.
발아래 장난감처럼 보이는 건물, 자동차, 그리고 사람.
자신이 지나가기만 해도 고개를 조아리는 종놈들과 그들의 선망 어린 시선.
처음에는 짜릿했다.
가지지 못하는 게 없고,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따분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개미가 굴을 파고 집을 짓고 먹이를 저장하는 모습도 처음에나 신기할 뿐이지 계속해서 보다 보면 지루해진다.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종놈들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여 똑같은 시간에 퇴근하며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아 가는 모습은 지켜볼 만한 가치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재미없네.”
“…….”
“우리 환이는 요정님 만나서 요즘 아주 즐거운 것 같은데. 나만 재미가 없어. 요정님 생겼다고 형이랑은 놀아 주지도 않고 말이야.”
“이 실장님 쪽으로 작업 한 번 들어갈까요.”
“그것도 이젠 좀 별로야. 레퍼토리가 뻔하잖아. 어지간한 건 타격도 없고.”
워낙 신체 능력이 좋은 이환인지라 어지간한 사고는 쉽사리 피해 냈다. 그마저도 사건 사고를 자주 겪어 온 탓에 이제는 ‘오늘은 운이 좀 없네.’ 하고 넘어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환을 위해 고민해서 일을 만들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심드렁하게 넘어가니 슬슬 보람도 없어졌다.
“나쁜 계모도 이제는 약발이 다 된 것 같고. 못된 이복동생들은 별 쓸모가 없고. 남은 건 왕자님, 아니, 딱 맞춰 나타난 요정님뿐인데. 이 요정님을 어떻게 요리하는 게 좋을까, 이 말이야.”
가장 쉽고 슬쩍 찔러 보기 좋았을 ‘요정님 후리기’가 무산되어 아쉽기만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물고 빨던 요정님이 눈앞에서 다른 놈에게 홀랑 넘어가는 꼴을 보고 이환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생각할수록 아쉽고 또 아쉬웠다.
“애새끼를 홀리는 건 포기해야겠지?”
“이번에는 조금 더 엄선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냐.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다며. 한번 만나기도 어려운데, 얼굴 트고 친분 쌓고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거야. 답답하게 그걸 언제 기다려.”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이정이 이내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납치를 해 볼까?”
“……이 실장님이 크게 화를 내실 수도 있습니다. 일이 커질 겁니다.”
“그러니까!”
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 이정이 눈을 번뜩였다.
“이제까지 너무 잠잠했잖아. 무슨 일이 생겨도 재수가 없구나, 운이 나쁘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니까 재미없었다고. 우리 환이가 화내는 모습도 한 번은 봐야지 않겠어?”
“…….”
“위기에 빠진 요정님. 과연 우리 환이는 요정님을 무사히 구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연극 조로 외친 이정이 비서를 바라보았다.
“사람 좀 구해 봐. 저번 새끼들 말고 일 잘할 것 같은 놈들로. 그동안 편하게 돈 받아 처먹어서 그런지 배에 기름이 꼈나, 돼지 새끼들 일 처리가 영 마음에 안 들어.”
“알겠습니다.”
“큰 거 한 장 준다고 해. 그리고 일 마무리하는 거 보고 마음에 들면 한 장 더 추가. 아, 몸값 받아 내는 건 따로 챙겨도 된다고도 전해. 그럼 없던 의욕도 생기겠지.”
“네.”
“뭐 해? 대답만 넙죽넙죽하면 일이 진행돼? 나가서 얼른 움직이라고. 보름 안에 진행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네.”
“네, 부회장님.”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가는 비서에게서 눈을 뗀 이정은 조만간 들려올 희소식과 이환의 반응을 예상하며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