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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03)화 (103/172)
  • 103화

    내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몇 푼의 사례금으로 성의 표시는 충분했고, 그걸 내가 받지 않았다고 해도 싫으면 말라며 굳이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구태여 나를 불러서 수발들 사람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고용하고 월급을 챙겨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말이다.

    왜 나였을까. 왜 내가 필요했을까. 내게 원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걸까.

    “실장님이 꿈에 그리던 요정님의 현신, 뭐 그런 역할이에요? 새로운 배역이 필요했어요?”

    “해민 씨를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곁에 두고 보고 싶고, 말을 걸어 보고 싶고, 이렇게 손도 잡고 싶고.”

    “요정님이니까?”

    “미안합니다.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인 거 알아요. 조금 더 일찍 결단을 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해민 씨가 안 좋은 일을 겪게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이제 무대에서 내려갈 시간이라는 거죠. 연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날지, 파경으로 끝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실 수는 없어요?”

    제가 멍청해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이환이 내 손을 붙잡아 손끝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

    “이정은 해민 씨를 무대에 올리지 말아야 했어요. 내가 아니라 당신을 타깃으로 정한 건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부회장님이 시킨 일이 확실해요?”

    “네. 평소 부리던 놈들이 아니라 다른 루트를 통해 사람을 샀더군요. 그래서 파악이 조금 늦었습니다.”

    “조폭 같던데. 재벌이 그런 사람들도 부리는 거예요?”

    내 물음에 이환은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대답하기 껄끄럽다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말을 돌렸다.

    “어쩐지, 얌전히 있으면 멀쩡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계속 말하더라고요.”

    “이게 멀쩡한 겁니까? 머리도 깨졌는데.”

    “그건…… 제가 좀 난리를 부려서. 납치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얌전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진짜 확실하게 멀쩡히 돌려보내 준다는 보장도 그때는 없었으니까.

    피가 난 부위를 꿰맨 탓에, 그 부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엄청 맹구 같겠지. 나중에 상처가 아물어도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아 땜빵이 생기면 어쩌지.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고난과 역경, 이라고 했어요.”

    “…….”

    “그게 제 고난과 역경이 아니었나 봐요.”

    이정은 나를 통해서, 내가 납치된 상황을 통해서 이환의 고난과 역경을 보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머리에 생길 땜빵을 생각하면 나에게도 충분히 고난과 역경인데.

    나쁜 새끼. 돌아이 같은 새끼.

    “실장님.”

    “다 말해 줘야지. 해민 씨가 궁금해하는 건 다 이야기해 줘야지. 사실 숨기고 시치미 떼고 싶었는데, 결국 솔직해져야겠다고 해민 씨가 묻는 건 다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왜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똑똑한 사람이니까. 오늘 내가 입을 다물면 영영 다시 물어보지 않을 사람이니까. 지금이 아니라면 솔직해질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까.”

    눈치가 빠른 건 이환이다. 똑똑한 사람도 이환이다.

    지금까지 이환에게 묻고 답을 들었으나 절반은 정리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란해서 또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뭘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장님.”

    “네.”

    “요정 진짜 믿으세요?”

    가장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왔다. 가장 단순했고, 또 가장 궁금했으며, 가장 의문이었던. 그래서 이환의 마음속에 요정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어쩌라는 건지.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이환이 눈을 휘며 웃었다.

    “신도 믿지 않는 아이가 요정을 믿고 산타를 믿었을까요. 나는…… 그저 어머니가 기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웃고, 당황하고, 난처해하고, 즐거워하고. 나를 통해 여러 기억과 추억을 남겼으면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걱정만 하게 만드는 아들보다는 천진한 모습으로 웃게 만드는 아들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의 동심 교육에 감화되는 시늉을 했죠. 그게 이정의 관심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지만.”

    “……그럼 안 믿는 거예요? 부회장님을 속이기 위해 전부를 속인 거예요?”

    이 사람은 본인의 사회적 지위나 체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나 보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란 어려울 텐데.

    “잘 모르겠네요. 내내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켜 왔기 때문인지. 요즘 들어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어?”

    이게 바로 컨셉에 잡아먹힌 괴물이라는 건가. 그러한 케이스를 현실에서, 이렇게 코앞에서 보게 될 줄 몰라서 조금 당황했다.

    “해민 씨를 만나고, 진짜 요정님인가 의심스러울 때도 종종 있고. 요정이 있다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겠지 싶고.”

    “저 놀리시는 거죠.”

    “요정님이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아서 속상하네요.”

    전혀 속상한 얼굴이 아닌데?

    “해민 씨를 다치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정에게 그대로, 아니, 배로 갚아 줄게요.”

    “무, 뭘 어떻게 배로 갚아 주려고요.”

    “대가리를 양쪽으로 깨 버릴까요. 악몽 같은 배드 엔딩을 선물로 줘도 좋고. 지금까지 해 온 연극의 주체가 누구였는지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아마도…… 이정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내 손에 죽거나 아버지 손에 정신 병원으로 끌려가겠지만,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은 없겠죠. 아버지는 장남을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

    “자꾸 죽는다 죽인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진짜로 죽거나 죽이는 건 아니죠? 다이, D, I, Y. 죽음, 사망, 숨이 끊어지다. 그런 뜻의 죽는 건 아닌 거죠?”

    “…….”

    내 질문에 말없이 싱긋 미소만 짓는 얼굴이 의뭉스럽다. 그렇다 아니다 명확한 대꾸가 돌아오지 않아서 더 찜찜했다.

    “나는 지금 엄청 화가 났고, 형이든 아버지든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해요.”

    “방싯방싯 웃고 계신데요.”

    “화난다고 해민 씨 앞에서 쌍욕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시구나.”

    충분히 하실 수 있을 듯한데, 그래도 참고 계시는구나.

    “더 궁금한 건 없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내가 뭘 물었는지도 기억 안 나고, 실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었나 정리되지도 않고. 그래서 뭘 더 물어야 하고, 뭘 더 알아야 하는지도 잘…….”

    “언제든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됩니다.”

    “여사님도 알고 계시는 거예요?”

    “모릅니다. 아버지와 백윤경, 그리고 내가 부리는 몇 사람밖에 몰라요.”

    “그런데 저한테는 왜……, 왜 이렇게 쉽게 말씀해 주신 거예요? 지금까지 쭉 비밀이었잖아요. 여사님도 모르고 계시는데, 왜 저한테……. 제가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내가 봐 온 해민 씨는 누구보다 신중하고, 입이 무겁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진짜 신중하고, 입이 무겁고, 생각이 깊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환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여기저기 입을 털고 다니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확실히 이환은 사람을 부리는 데에 능숙했다. 허술한 모습조차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앞으로 쭉 나와 같이 있을 사람인데 계속 속일 수는 없으니까.”

    “네?”

    “네?”

    내 물음에 이환이 똑같이 머리를 기울이며 갸웃거렸다. 뭐 문제라도 있느냐는 얼굴이어서, 차마 내가 언제 그만둘 줄 알고 하는 소리냐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앞으로 쭉 같이 있을 사람이라는 건 누구 판단이지?

    “궁금한 건 좀 풀렸습니까?”

    “실장님이 너무 선선히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더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그동안 의아했던 상황이 이해되기는 해요.”

    “그럼 이제 좀 쉬어요.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쉬어야 하는 사람인데 쉬지도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고, 환자는 일찍 그리고 충분히 자야 하는 법이라고.

    이불을 올려 덮어 주고 건조하지 않게 가습기까지 틀어 주는 이환의 모습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왜요? 잠이 안 옵니까?”

    “실장님.”

    “네.”

    “저랑 잔 것도 연극에 필요했던 거예요?”

    “음, 그건 좀 상처인데.”

    “왜요?”

    “내 동정을 가져가 놓고, 연극이니 연기니 말하면 당연히 상처받지 않을까요.”

    누가 누구의 동정을 가져갔다는 뜻일까.

    물론 나도 동정이었고 이환도 동정이었다고 듣긴 했지만.

    “순진한 사람 따먹어 놓고,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 아니겠죠?”

    “순진한 사람은 누군데요?”

    “당연히 나죠.”

    아, 그렇구나.

    순진한 사람은 이환이고, 그럼 그 순진한 이환을 내가 따먹었다는 말이구나.

    순진한 이환을 따먹고 연기니 연극이니 지껄인 파렴치한으로 매도당했다.

    조금 어이없고 또 조금은 억울했다.

    “왜 그렇게 억울한 표정입니까?”

    “말 안 할래요.”

    말 섞고 싶지 않다고, 그냥 잘 거라고 꽉 눈을 감자 이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원래 그런 겁니다.”

    “뭐가 그런 건데요.”

    “이십 년짜리 동정과 삼십사 년짜리 동정은 숙성도가 달라요.”

    “된장 고추장도 아닌데, 무슨 숙성도예요.”

    “그러니까요. 된장 고추장도 아닌데 그 정도로 숙성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낸 거죠. 그리고 그 대단한 걸 내 요정님이 홀라당 삼킨 거고.”

    “…….”

    뭔가 대화가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인데.

    내가 언제 홀라당 삼켰다고.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 속에서 억울함은 도통 누그러지지 않았다.

    씩씩 콧바람을 불며, 이환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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