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01)화 (101/172)

101화

유명한 영화라고 해서 언젠가 잠 안 올 때 보았던 엄청 옛날 영화를 떠올렸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쇼였던 영화. 만들어진 세상, 만들어진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모르던 주인공.

내 인생을 돌이켜보았다. 고구마의 연속이었다. 퍽퍽해도 과하게 퍽퍽했다.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 정도면 구경할 맛이 나지 않을 듯했다. 보다가 채널 돌릴 것 같은데. 막장도 정도껏이지, 이놈의 인생은 빵 터지는 구간도 없지 않나.

그럼 언제쯤부터였을까. 이환의 집에 들어와 근로 계약서를 작성한 순간? 아니면 공사장에서 이환을 구하려고 뛰어들던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내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이환이 이내 목구멍 안쪽이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이제껏 저렇게까지 시원하게 웃는 이환을 본 적이 있던가.

저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배가 아플 정도로 크게 웃던 이환이 복부를 움켜쥐고 호흡을 고르며 눈물이 찔끔 스민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이렇게 웃어 본 적이 또 있을까 싶네요.”

“저도 이렇게까지 웃는 실장님을 본 적이 있었나 싶어요.”

“요정님 위트가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러게요. 제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 농담이 실장님 한정으로 먹히는 농담이었나 봐요.”

내 대꾸에 완전히 웃음을 떨쳐 내지 못한 이환이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눈치도 빠르고, 기억력도 좋고, 똑똑하기까지 한 내 요정님이 하필이면 결론에 약하다는 문제가 있었을 줄이야. 괜찮습니다. 그것도 매력적이에요.”

이환이 괜찮다고 넘어갈 문제인가 싶었으나 딱히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내 혼신을 다한 추리가 어긋났다는 게 더 문제였다.

“서해민 쇼, 뭐 그런 몰래카메라…… 아니었어요?”

“네, 아니에요. 얼마 전에 본 영화가 감명 깊었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다음 날 무슨 영화 봤는지 잠깐 이야기했었잖아요.”

그랬나. 멋쩍은 기분에 볼을 긁적였다.

“사실 실장님도 실장님이 아니고, 회장님도 회장님이 아닌가 싶었어요. 부회장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연기를 못한 거였나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연기를 못하는 건 맞는데, 실장님도 실장님이고 회장님도 회장님입니다. 그 사람이 내 형인 것도 맞고요.”

“그렇구나.”

주변 사람들이 완전 거짓이 아니라면, 무엇이 연극인 걸까.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배역인 걸까.

“누가 속이고 누가 속고 있는 거예요?”

“그건 확신합니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단순히 ‘실장님이 요정을 믿는다’라는 말로 정리하기엔 좀 이상해서요.”

입가에 미소를 띤 이환이 의자를 끌어와 침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내밀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잡을까요?” 하고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이었음에도 나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그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살짝 겹쳐진 손끝을 붙잡고 조물조물 한참 만지작거리던 이환이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하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 내가 위기를 느낀 건, 아버지가 막 재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땝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어머니 자리를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차지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항하고 방황하던 때였죠.”

“……초등학생 때 방황이요?”

“초등학생이 어때서요. 내가 그때에도 좀 성숙했습니다.”

“……그러셨구나. 성숙하셨구나.”

하긴, 어릴 때부터 첫인사로 주먹을 날려 대던 분이었다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숙하다 말할 수 있지.

고개를 주억이는 나를 보며 이환이 진짜예요, 하고 말했다.

“보통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는 시기가 이차 성징 시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고등학교 때 형질 검사를 의무로 받고 있다고 예전에 말했었죠.”

“……네.”

“그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여 태어나는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혹시, 실장님이 그랬나요?”

“네, 제가 바로 그런 케이스죠.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형질의 특수성이 뛰어납니다. 페로몬이 짙고, 나이에 비해 신체적 발달이 우수하고, 지능이 높고, 두뇌 회전이 빠르죠.”

“…….”

“그러니 초등학생 때 내가 얼마나 성숙했겠습니까.”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나 했더니, 그냥 본인의 성숙함을 주장하기 위한 설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러시구나, 하고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쳐 주었으나 그에 만족하지 못한 이환이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본인의 어린 시절 성숙함에 대해 주절거렸다.

“실장님. 실장님의 성숙함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처음 겪었던 위기가 듣고 싶어요.”

“내 이야기가 듣기 싫었습니까?”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듣고 싶다는 뜻으로 말하자, 이환이 시무룩한 얼굴로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며 속상함을 표했다.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지 않나. 난 그냥 본래의 화제로 돌아오자는 뜻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속상해할 일인가.

“그으……보다는, 실장님이 처음 겪었다는 위기가 궁금하고 걱정되어서요. 혹시 그게 그 일인가요? 예전에 말씀하셨던, 창고에 갇혔던 사고요.”

“해민 씨는 내가 한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있군요. 기억력이 좋은 겁니까, 아니면 내가 했던 이야기라서 기억하는 겁니까. 역시 후자겠죠.”

딱히 기억력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환이 했던 이야기라서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이환이 해 준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냥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이라서 쉽게 잊혀지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 싶지만, 이환은 이미 감동한 상태였다. 그의 풍부한 감수성이 하필이면 이 순간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 창고. 이틀 동안 그곳에 갇혔더랬죠. 그 시간 동안 나는 가만히 생각했어요. 내가 왜 여기 갇히게 되었는가. 누군가 나를 이곳으로 유인했나, 아니면 자의로 이곳에 왔나. 내가 이곳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었던가. 나 말고 이곳을 올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망가진 자물쇠를 고칠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여기 갇힌 건 우연인가, 다른 누군가의 의도인가. 조명도 환하지 않은 창고에서 이틀 동안 굶주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발견되신 거예요?”

“고용인 중 한 명이 창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러 왔다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창고의 잠금장치를 고친 사람도 찾아냈죠. 고장 난 잠금장치를 고친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잠금장치를 고쳤음에도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도록 문을 잠그지 않고 방치했고 내가 들어간 뒤에 문이 잠긴 건 분명 누군가의 의도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게 누구였는지가 문제였죠.”

초등학생 때 저런 생각을 했었다면, 확실히 성숙했던 게 맞다.

내가 저 나이에 저런 사고를 당했다면, 창고에 갇힌 순간부터 엉엉 울고 구해진 뒤에는 마냥 안도하고 이삼일만 지나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일상으로 돌아왔을 텐데. 이환은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셜록 홈즈를 찍고 있었네.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새어머니를 지목했습니다. 잠금장치를 고치라고 지시한 사람도 새어머니였다고 하고, 내가 갇히고 이틀이 지나 무언가 필요하다며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오라 시킨 사람도 새어머니라고 했죠.”

“어, 그럼 그때 일은 정말로 사모님이…….”

“그런데 중간에 한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이 형이었죠. 실제로 새어머니가 창고의 잠금장치를 고치라고 말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어머니가 잠금장치를 고치라고 했다.’라는 말을 고용인에게 전달한 사람이 형인 건 확실하죠.”

“그럼 사모님께 따져 묻지 그러셨어요. 사모님이 그렇게 지시했던 게 맞느냐고.”

“그때 형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환아, 동화에서 많이 봤지? 신데렐라를 괴롭히고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계모랑 아주 똑같은 새엄마야. 우리 환이도 계모에게 죽을지 몰라. 우리 환이는 왕자님인데, 왕자님은 누가 구해 주지?’”

“음…….”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 이 새끼구나.’”

갑작스럽게 나온 쌍소리에 콜록, 하고 기침이 터졌다. 마른기침을 토하는 내 등을 토닥토닥 쓸어 주며 이환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새끼가 그랬구나. 이 새끼가 언제고 나를 죽이겠구나.”

“설마요. 친형이잖아요. 이틀 동안 가둬 둔 건 확실히 과하지만. 그래도 보통 장난이 과했다고 생각하지, 이러다 언제 죽이는 수준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리고 부회장님이 실장님을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네. 날 좋아합니다. 제일 재미있고 아끼는 장난감이거든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음, 하고 목을 울리며 눈만 대굴대굴 굴렸다.

이게 과연 초등학생이 할 만한 생각인가 싶고, 초등학생 때 했던 생각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을 수 있나 싶고.

“아까 해민 씨가 말했죠. 자극을 주고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 같다고. 맞아요. 이정이 딱 그랬습니다. 툭 하고 건드리고 아닌 척하며 내 반응을 살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했고, 두 번째부터는 확신했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여 주어야 할까. 이정은 어떤 반응을 원하고 있을까.”

“…….”

동화와 계모 이야기보다도 더 혼란스럽다. 차라리 동화처럼 못된 계모와 얽힌 이야기였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수긍하기가 쉬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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