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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00)화 (100/172)

100화

“그보다 몸값 내줄 사람이 없으니 섬 노예 장기 매매, 어휴, 그런 끔찍한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충격이네요. 당연히 내가 구해 줄 거라고 믿고 있어야 했던 거 아닙니까.”

자신이 그렇게 미덥지 못하냐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이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고 싶었어요.”

“…….”

“이제껏 그냥 되는대로 살아왔는데. 진짜 이렇게 힘들고 구질구질하게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는데. 앞으로 계속 살아 봤자 변하는 것 없이 지금과 같을 텐데. 그런데도 살고 싶더라고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웠어요.”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해민 씨가 무서워할 일이 없도록 할 거예요.”

이환이 내 손을 붙잡아 손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하듯 말했다. 딱히 위로나 사과를 받고자 꺼낸 말이 아니라서 별다른 위안이나 감동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다.

언제나 혼란스러웠고,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이제는 내 속에 있는 마음과 생각과 감정들을 조금씩 정리해서 드러내고 싶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실장님을 떠올렸어요. 내 주변에 나를 구해 줄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실장님뿐이라서 그랬을까 싶었는데. ……그냥 보고 싶었나 봐요.”

“……해민 씨.”

“그랬나 봐요.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좀 좋고 그래요.”

“위기를 극복하고 폴 인 러브. 그런 겁니까?”

핀잔하듯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고난과 역경.”

“네?”

“아니요.”

작게 중얼거린 소리에 이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으나 사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실장님. 혹시 저한테 위치 추적기 같은 거 붙여 놓으셨어요?”

“…….”

“저 좀 안도했어요.”

살짝 표정이 굳은 이환은 추임새처럼 꼬박꼬박 대답을 하던 조금 전까지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 내 말을 기다렸다.

“실장님이 절 구해 주셨다는 건, 이 연극? 역할극? 그런 거에 아직 제가 필요하다는 뜻이죠?”

“…….”

“실장님.”

자꾸만 입술이 마르는 탓에 말을 할 때마다 쩍쩍 소리를 내던 입술이 기어코 찢어져 피가 맺혔다. 입안으로 스미는 비릿한 피 맛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 연극의 악역은 계모가 아니라 형님이에요?”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던 이환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 ∞ ∞

무언가 말을 하려던 이환은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벙긋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백윤경이었고, 그는 내가 깨어났음을 확인한 뒤 이환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잠시 일을 처리하고 오겠다며 백윤경과 함께 나간 이환이 다시 돌아온 것은 병원 저녁 식사 시간 후, 잠이 들락 말락 할 무렵이었다.

한쪽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이환의 시선을 받고 병실을 나갔다. 내내 자리를 지키고 앉아 기침을 하거나 돌아눕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아픈 곳이 있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보던 간호사였다. 과분한 보살핌이 고마우면서도 불편해서 자는 척하고 있던 터라 조금 숨통이 트였다.

“벌써 자는 겁니까?”

“아뇨. 그냥 누워 있었어요.”

황송할 정도로 넓은 병실을 혼자 쓰고 있었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기에 흐린 눈으로 천장만 보고 있었다.

어차피 침대에 누워만 있는 환자에게 이렇게 넓은 병실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일 인실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도 해 보고. 일 인실이 비싸다고 하던데 이번 일은 산재 처리가 될까, 입원비에 관한 걱정도 해 보고. 병원 밥이 맛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양이 적다는 이야기는 왜 듣지 못했을까, 부족한 식사량에 대한 의문도 가져 보고.

쓸모없는 생각을 심도 있게 파고들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왜 일어납니까? 화장실 가려고요?”

“아뇨, 실장님 오셨으니까 좀 앉으려고…….”

“괜찮습니다.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요. 해민 씨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 하는 나를 이환이 펄쩍 뛰며 만류했다. 마치 혼자서는 거동도 하지 못하는 중병 환자 취급을 하며 안정을 부르짖었다.

“저녁은 먹었습니까?”

“네. 조금 전에요.”

양이 너무 적어서 간에 기별도 안 갔는데, 심지어 저녁 식사 시간이 다섯 시였다. 다음 식사가 내일 아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식판 두어 개 분량은 더 먹었어야 했는데.

“반찬을 받아 왔는데, 조금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노란색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들고 왔다 싶었는데 여사님이 챙겨 보낸 모양이다. 보자기를 풀어 찬합을 냉장고에 넣는 이환을 보며, 저녁에 배가 고프면 반찬이라도 꺼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넓은 병실을 혼자 쓰는데 불편할 리가요.”

“어지럽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평소와 다른 증상은 없었고요?”

“좀 어지럽고 메슥거리긴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아주 멀쩡해요. 뼈가 부러지거나 한 것도 아니라서 입원할 필요도 없었을 것 같아요.”

“뇌가 얼마나 예민한 부위인데요. 뼈 부러지는 게 차리리 낫다 싶을 만큼 머리를 다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못해도 일주일은 지켜봐야 해요.”

살짝 뇌진탕 증상이 있는 정도로 너무 유난이다.

“검사는 다 했다던데.”

“그래도 며칠 더 지켜봐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병원에 있는 쪽이 빠르게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까, 멀쩡하다고 생각되어도 일주일은 여기 있도록 해요.”

이미 해야 할 검사는 다 끝내 놔서 병원에 있어 봤자 그냥 먹고 자고밖에 할 일이 없을 텐데. 그런데도 일주일은 꼼짝없이 여기 붙들려 있어야 할 모양이다. 한숨만 나왔다.

“심심하면 티브이라도 틀어 줄까요.”

“아뇨.”

“여사님이 과일도 싸 주신 것 같던데. 과일 먹을래요?”

“아뇨.”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간식거리를 좀 사 올 걸 그랬나 보네요.”

“실장님.”

어째서인지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병실 안을 왔다 갔다 서성거리는 이환을 조용히 불렀다.

“네?”

“좀 앉으시는 게 어떨까요. 일 인실이라 소파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

“……내가 너무 정신 사납게 굴었습니까?”

“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이환이 소파 대신 의자를 끌어와 침대 가까이에 앉았다.

“여사님이 해민 씨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당장 오시겠다는 걸 내가 말렸습니다.”

“네에.”

“아마 내일 아침에 오실 겁니다.”

“오늘은 저랑 얘기하시려고요?”

“……네.”

그럼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시선을 쏘아 대며 이환 쪽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이환이 힘없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양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앞으로 숙인 이환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어 물었다.

“알고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이상했고 의심스러웠어요.”

“서른 넘은 남자가 요정을 믿는 게 이상하긴 하죠.”

“처음엔 이상했지만 나중엔 괜찮았어요. 그럴 수도 있지, 요정을 믿을 수도 있고 산타를 믿을 수도 있지. 사람이 그렇잖아요.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신념이나 믿음, 버릇, 트라우마, 징크스, 뭐 그런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아요. 비슷한 범주라고 생각하니까, 유난스러울 뿐이지 막 기겁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고요. 어차피 본 적도 없고 증명되지 않는 건 똑같은데, 신을 믿는 것과 요정을 믿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나 싶기도 하고.”

내 말이 의외였는지 이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하고 의심스러웠던 건, 실장님이 아니라 실장님 주변 사람들의 반응? 상황? 그런 거였나 봐요.”

“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웠습니까.”

“실장님이…… 어릴 때부터 많은 위험을 겪어 왔고 그게 동화처럼 나쁜 계모 탓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사실, 호텔 개관식 때 사모님하고 따로 대화한 적이 있어요.”

“…….”

“제가 실장님 곁에 있으니까 저한테도 엄청 적대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사모님은 뭐랄까, 좀 겁먹은 모습이셨어요. 가족 식사 자리에서도 전처 자식들을 구박하는 계모라고 하기엔 실장님과 부회장님 눈치를 많이 보시더라고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이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회장님 태도도 좀 이상했고요. 그냥 성격이나 말투, 행동이 독특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언뜻언뜻 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느낌이요?”

설명을 너무 뭉뚱그려서 했나 보다. 그래도 이게 말로 설명하기엔 좀 애매한데. 어떻게 표현해야 적당할까 고민하다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애들이나 애완동물한테 처음 접하는 먹을 거나 장난감 같은 거 던져 주고 반응 보는…… 관찰이라고 해야 할까. 자극을 주고 어떤 반응을 보이나 하는 실험 같은 거?”

이게 적합한 표현인지 몰라서 애매하게 말끝을 올리자 이환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는 옳다 그르다 말이 없었다.

“내 요정님이 눈치가 빠르다는 걸 생각 못했습니다.”

“……아직도 요정님이에요?”

“그럼요.”

한번 요정은 영원한 요정, 뭐 그런 건가. 끝까지 요정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헛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

“전 진짜로 부회장님 앞에서 꿀물을 마신 적이 없거든요.”

“눈치도 빠르고, 기억력도 좋고.”

“혹시 집에 관찰 카메라 같은 거 달아 두셨어요? 몰래카메라 대상이 저인가요? 이거 장기 몰래카메라 프로젝트 뭐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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