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99)화 (99/172)
  • 99화

    손이 뒤틀리며 움켜쥐고 있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라리 한 놈 찔러 보기라도 할걸. 칼을 들고 있다고 겁먹을 놈은 여기 한 명도 없었는데. 또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목이든, 가슴이든, 허벅지든 찔러 보기라도 할걸. 아니, 차라리 나를 찌를걸. 몸값을 요구하려면 내가 살아 있어야 하니, 내가 다친다면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을까.

    어떤 가정을 하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보다는 나아 보였다.

    “얌전히, 있으라니까, 왜, 자꾸, 지랄이야!”

    커다란 손이 연거푸 뺨을 올려붙였다. 손바닥으로 맞았는데 주먹으로 맞은 것처럼 골이 울렸다. 얼굴 반쪽이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입 안쪽이 이빨에 쓸려 찢기며 피 맛이 났다.

    “흐으, 나 진짜…… 아니에요.”

    “씨발, 얌전히 보내 주겠다잖아. 왜 지랄이야, 지랄이. 씨발 새끼야. 왜 사람 성질을 자꾸 긁어. 어?”

    붙잡은 팔목을 거칠게 뒤로 꺾어서 테이프로 꽁꽁 묶어 놓은 ‘칼자국’이 후우 하고 숨을 내뱉었다.

    “야, 좋게 좋게 대해 주니까 만만하냐?”

    ‘칼자국’의 구두 끝이 정강이를 찍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오금이 오그라들었다. 뒤로 꺾인 팔도 아프고, 남자에게 잡혔던 손목도 아프고, 커다란 손으로 후려 맞았던 뺨도 아팠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저기, 형님.”

    몸을 둥글게 말고 통증에 신음하고 있는데, ‘쌍꺼풀’이 조심스럽게 ‘칼자국’을 불렀다.

    “아직도 따라오는데요.”

    “하, 씨발.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네. 저것들 엄청 안 떨어지는데 괜찮은 거야?”

    “그러게. 속도 높일 거니까 잘 찌그러져 있어라.”

    누군가 아까부터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납치당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을까. 그래서 도와주려고 쫓아오고 있는 걸까.

    이제 믿을 구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적자뿐이었다.

    제발, ……제발 좀 도와주세요.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자동차 시트에 문지르며 속으로 기도했다.

    살려 주세요.

    ……실장님.

    나도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다정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16

    남자들은 서울 시내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격하게 추격 신을 펼쳤고, 골목길 사이로 위태로이 질주하기도 했으며, 어떤 주차장으로 들어가 미리 계획해 둔 듯이 차를 바꿔 타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 어딘가에서 추격자가 떨어져 나갔는지, 아니면 아직도 나를 도와주고자 따라붙어 오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고마웠다. 요즘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범죄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세상인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납치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이 정도로 쫓아오다니. 운전하던 납치범도 처음에는 가소롭게 비웃다가 조금 짜증을 낼 정도였다.

    비록 도움은 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고맙습니다.

    옮겨 탄 세단의 트렁크에 처박혀 이동되어지며 멍하게 생각했다.

    이 납치범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

    협박하여 몸값을 받아 내는 것도, 장기 매매를 하는 것도, 섬 노예로 파는 것도, 방법만 다를 뿐이지 결국 목적은 돈이다.

    여기서 장기 매매와 섬 노예는 최악의 가정일 뿐, 일단 납치범들의 계획은 몸값을 받는 거다.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몸값을 받으면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도 했다.

    왜 하필 몸값을 받아 내는 쪽이었을까.

    협박 전화를 하고 몸값을 받아 내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경찰이 투입될 위험도 크고, 중간에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 납치범들에게 가장 불확실하고 위험도가 높은 방법인데, 왜 이들은 굳이 몸값을 받아 내려 할까.

    예전에야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몸값 받아 내는 범죄가 많았다지만, 요즘은 장기 매매가 꽤 돈이 되는 시대라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몸값으로 한 십억을 부를 계획이라면야 크게 한탕 하려나 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부모나 자식도 아니고 하다못해 부부도 아닌데 애인 몸값으로 십억을 내어 줄 부자가 있을까.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그냥 애인을 갈아치우고 말지.

    애초에 부자 애인도 없지만. 아무튼 왜 하필 몸값인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얌전히 다뤄. 상처 없이 멀쩡하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거 기억 안 나?」

    나를 얌전하게 만들려고 하는 연극일 수도 있겠으나, 납치범들은 꾸준히 나를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을 했다.

    돈만 받으면 몸 성히 보내 주겠다. 상처 없이 멀쩡히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

    굳이 내게 말하지 않을 때에도,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러한 뉘앙스의 말이 오갔다.

    ‘멀쩡하게 돌려보내야 한다.’

    애초에 그렇게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긴 범죄일 수 있다.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말이었을 수 있다.

    혹은 그렇게 명령받은 것일 수도 있다. ‘칼자국’ 남자가 불만스럽게 대꾸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아무래도 이쪽에 무게가 실렸다.

    「손가락 하나 정도는 잘라도 된다고 했으니까.」

    허락을 받았다는 의미로 들렸다.

    결국 이 납치를 계획한 인물은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고, 저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의 지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중이떠중이가 길 가던 사람을 붙잡아 온 것이 아니다. 분명한 계획이 있었고,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고, 충분한 준비가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겨우 나 같은 놈을 납치하겠다고 이런 수고를 들였다고?

    범죄 계획을 세우면서 나에 대한 조사를 안 해봤을 리가 없는데. 조사를 했다면 돈 나올 구석이 없다는 것도 알았을 테고, 이환과 내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테고, 내가 이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씨발. 무슨 고난과 역경이냐.」

    운전석의 남자가 중얼거린 말이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고난과 역경.

    조소하듯 내뱉었던 그 말을 입 속에서 중얼거리는데, 쾅 하는 충격과 함께 몸이 뒤집혔다.

    ∞ ∞ ∞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어스름한 안개 같은 것이 눈앞을 흐렸다. 조금 멍한 기분, 몽환적인 시야에 여기는 이승인가 저승인가 잠시 혼동이 왔다.

    “해민 씨.”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방, 안개라고 생각했던 김을 뿜어내는 가습기,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남자.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낯익은 얼굴을 눈에 담은 뒤에야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실장님.”

    “정신을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저 왜…… 여기…….”

    “병원입니다.”

    “다쳤어요?”

    “네, 구조 과정에서 조금 다쳤습니다. 미안해요.”

    구조…….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멍한 정신으로 무슨 구조를 말하는지 생각했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트렁크 속에서 위아래가 뒤집혀 구른 뒤로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사고가 아니라 구조였나.

    기대 이상으로 격렬한 구조였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납치해서 어딘가로 데려가려던 것 같았는데. 그 전에 구해 주신 거예요?”

    “트렁크에 격리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요.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구출을 시도하면 아무래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중간에 막아 세웠습니다. 미친놈들이 그대로 들이박을 거라는 예상을 못 해서 해민 씨가 다쳤네요.”

    미안합니다, 하고 또다시 사과하는 이환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져 끄응 하고 신음이 나왔다.

    “약한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하니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다행이다.

    몸값을 요구하고, 원하는 돈을 받지 못해서 납치범들이 화를 내고, 장기가 적출되거나 섬에 팔려 나가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누군가에게 구해진다는 결과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환은 납치범들이 몸값을 요구하기도 전에 나를 구했다. 그들이 납치를 끝내기도 전에 나를 찾아내어서 구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합니까. 해민 씨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고, 결국 이렇게 다치게 만들었는데.”

    “구해 주셨잖아요. 산 채로 팔려 가거나 장기만 따로 팔려 갈까 봐 걱정했어요.”

    이제는 농담처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진짜 많이 걱정했다. 이대로 인생이 끝난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두려울 줄은 몰랐다. 삶에 특별한 욕심도 없고 의욕도 없다고 생각했던 내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쭉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나는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남고 싶었나 보다.

    “몸값을 요구한다고……, 부자 애인한테 돈 뜯어내겠다고……. 오해했나 봐요.”

    실장님이랑 저랑 애인 사이라고, 오해했나 봐요.

    “결국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만들겠구나 생각했어요. 저번에 실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사람은 몸만 있으면 돈 만들 방법은 많다고. 장기 매매, 섬 노예,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확 체감했어요.”

    웃으며 내뱉은 말에 이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해민 씨가 멀쩡히 풀려난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기다렸다가 돈을 줬을 겁니다. 그 확신이 없어서 위험을 감수했고, 결국 다치게 만들었지만.”

    “돈을 왜 줘요.”

    “해민 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얼마를 달라고 했든 줬을 거고, 전혀 아깝지 않았을 거예요.”

    “…….”

    “걱정했습니까? 내가 몸값을 주지 않을까 봐?”

    “아뇨.”

    눈을 내리뜨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몸값을 내어 줄지 아닐지를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당연히 내 몸값을 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실장님은 부모 자식 관계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잖아요. 그냥, 그 뒤에 내 처지가 어떻게 될지를 걱정했어요.”

    “하나뿐인 내 요정님인데, 설마 돈이 아까울까. 살고 있는 집을 넘기라고 해도 줬을 겁니다.”

    “길바닥에서 주무시게요?”

    “잠이야 호텔에서 자도 되고, 별장에서 자도 됩니다.”

    그걸 생각 못 했네. 그렇지, 돈만 있으면 잠잘 곳이야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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