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97)화 (97/172)

97화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음식 만드느라 고생하신 여사님께도 감사하고, 김 기사님께도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무슨 수상 소감처럼 말하고 있습니까. 잘못이 있다면 그저 상사 잘못이죠.”

아까는 상사를 잘못 만난 본인 잘못이라며. 속마음이 필터링되지 않고 그냥 나온 것 같은데?

이걸 지적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내 앞으로 백윤경이 선물을 내밀었다.

“곧 겨울이니까. 해민 씨 목도리 하나 샀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장님하고 같이 쓰십시오.”

목도리가 들어 있을 큰 상자 하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상자 하나. 선물이 무려 두 개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자, 백윤경이 “위의 것부터 열어 보세요.” 하고 말했다.

받은 선물을 이 자리에서 열어 보는 건가.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백윤경의 요구에 따라 그가 지정한 작은 상자부터 열어 보았다.

“해민 씨, 잠깐만요.”

포장지를 뜯어 안에 든 내용물이 절반쯤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환의 손이 불쑥 나와 들고 있던 선물을 가져갔다.

“……실장님?”

“미안합니다. 검열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검열이요?”

“아니, 왜 남의 선물을 막 가져갑니까? 이거 월권이에요!”

백윤경이 항의했으나 가볍게 무시한 이환이 내게 보이지 않게 살짝 몸을 틀고 포장지 안을 확인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 나가.”

“왜요! 왜! 어차피 온 거, 모처럼 여사님 음식이나 배 터지게 먹고 갈 겁니다.”

“나가, 인마! 어디서 이따위 걸 선물이라고…….”

이환이 소리치며 다시 가져가라는 양 들고 있던 상자를 던졌다. 보통 무언가가 날아오면 피하거나 품으로 받아 낼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백윤경은 보통의 반응과 달리 잽싸게 손으로 쳐 냈다.

누가 봐도 완벽한 타격이었다.

손에 맞고 다시 날아오른 상자가 터지며 내용물이 허공에 비상했다. 폭죽처럼 하늘을 날아올랐던 은박 비닐이 상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데코레이션처럼 케이크 최상단에 폭 하고 박힌 네모난 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

이환은 침통하게 신음을 토해 냈고, 백윤경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아이고,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빨리 안 치워요!”

이환과 백윤경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때린 여사님이 매섭게 꾸중을 했다.

“음식 어떻게 할 거야! 아무튼 둘이 하는 짓은 똑같아 가지고.”

“여사님. 불의의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백윤경과 같은 취급은…….”

“와, 여사님. 저 좀 자존심 상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여사님이 실장님 편이라지만, 어떻게 실장님과 저를 같은 수준으로…….”

이번만큼은 여사님의 말에 동감했다. 상사나 비서나 수준이 비슷했다.

“조용히 하고 얼른 안 치워요?”

여사님의 냉랭한 일갈에 이환과 백윤경이 상 위로, 또 주변으로 떨어진 은박 포장지를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여전히 케이크 위에 장식처럼 꽂혀 있는 것을 뽑았다. 네모지고 납작한 은박 포장지. 손으로 더듬자 안에 둥근 것이 만져졌다.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사 본 적도 없고 실제로 구경해 본 적도 없는 물건이지만 어떤 것인지 정체가 예상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이런 망측한 물건을 백윤경이 생일 선물이랍시고 주었다는 점에서 이환이 화를 낼 만도 하지만, 그보다 실제로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코끝에 얼핏 느껴지는 딸기 향이 그러한 궁금증에 무게를 더했다.

슬쩍 포장지 끄트머리를 뜯는데, 그것을 알아차린 이환이 헛, 하고 숨을 들이켜며 손을 뻗었다.

“해, 해민 씨. 그거 놔요.”

“네?”

“그런 건 만지는 거 아닙니다. 어서 버려요.”

포장지가 쭉 찢어지며 딸기 향이 강해졌다.

“아니, 그걸 왜 지금…….”

“해민 씨. 꺼내지 말고 버려요.”

무릎을 꿇고 주섬주섬 은박 포장지를 모으고 있던 백윤경과 나를 말리려 손을 뻗는 이환의 허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이환의 손이 균형을 잃으며 케이크 한쪽에 처박혔다.

난장판이었다.

∞ ∞ ∞

고개를 돌린 채 누워 있는 엄마를 보았다.

잠든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병실에 들어온 후로 계속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상태였다.

저러다 목이 아프면 어련히 알아서 고개를 바로 하겠지. 남보다 본인이 제일 중한 여자니까. 그리 생각하다가 본인 몸이 그렇게 중했다면 몸이 상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에 혀를 찼다.

“그만 가 볼게요.”

간다는 말에도 끝까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았다.

저 고집은 어쩔 수 없지.

단 한 번도 내게 져 준 적 없던 여자,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내 모습을 눈에 담고 내 의견을 들어 준 적이 없던 여자. 남의 기분이나 의사는 중요하지 않고, 뭐든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

그 결과가 지금 우리의 관계였고, 지금 우리의 모습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왔다.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가 앞을 지나다 아는 척을 해 왔다.

“보호자님, 벌써 가시게요?”

“네. 오늘은 기분이 별로인가 봐요. 아는 척도 안 하시네요.”

“아…….”

간호사는 병실 안을 힐끔 들여다보더니 이해했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일 이후로 계속 저렇게 의욕이 없으세요. 술 찾으면서 난동, 아니, 술을 찾지도 않으시고요.”

‘난동’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바꾸며 간호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만 특별히 저러는 건 아니라고요?”

“네. 지난번 일 때문에 병원이 시끄러웠거든요. 사무장이 어찌나 난리를 피우던지.”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그건 병원 잘못이지, 보호자님이 죄송할 일은 아니죠. 그 후로 저희도 정명숙 님을 조금 더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영 힘이 없으신 모양이에요. 듣기로는 아버님 납골당에 가려고 하셨다던데, 언제 한번 모시고 다녀오는 게 어떨까요. 그것 때문에 상심하신 것 같기도 해서요.”

“……네에.”

“계속 누워만 계시고 통 움직이질 않으시니 식욕도 많이 떨어지셨어요.”

“끼니를 거르나요?”

“그렇지는 않는데, 식사량이 조금 줄었어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지만요.”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연락 주세요.”

“네, 그럼요. 바쁘실 텐데 제가 괜히 붙잡고 있었네요. 살펴 가세요.”

이야기를 끝내려는 뉘앙스를 알아차린 간호사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눈치 빠른 행동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힘없이 누워 있는 엄마를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납골당에 찾아가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가 죽어서도 제 소유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까.

한때는 아버지가 사랑했다던 사람을 찾으려 했다. 둘 다 죽었지만 같은 납골당의 바로 옆자리로 옮겨 주면 어떨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금방 생각을 정리했지만.

달갑지 않은 자식이었으나 아버지는 내게 아버지의 도리를 다했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의 도리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책임이었고 의무였을 뿐, 부자간의 정이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시체를 수습하고 납골당에 안치하고 몇 번 찾아가 본 것은 나의 의무. 그의 연인을 찾아 죽어서라도 곁에 있게 자리를 옮겨 주는 것은 내 도리를 넘어서는, 일종의 뻘짓 같은 거다.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라고? 엄마가 죽어서 과연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랐다. 엄마와 나의 인연이 끝나기를 바랐고, 엄마와 아버지의 악연도 끝나기를 바랐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기를. 한 줌 뼛가루가 되어서 먼지처럼 흩어지기를.

엄마가 쓰러진 후로, 나는 언제나 그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을 나와 천천히 버스 정거장까지 걸었다.

엄마의 얼굴을 보고 오는 길이면 언제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했던 시간, 아버지가 떠난 뒤 엄마와 둘이 되어 지냈던 시간. 그때 그들의 모습, 표정, 목소리, 행동. 과거에 붙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비단 엄마만은 아니었다.

버스 정거장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사라지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버스를 기다리고, 몇 대의 버스가 또 지나가고.

이제는 제법 싸늘해진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다가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죽 내놓은 손끝이 차가워졌고, 정거장을 찾았던 사람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떠난 뒤였다. 덜렁 혼자 남겨진 버스 정거장에 앉아 몇 번이고 그냥 떠나보낸 버스를 뒤늦게 기다렸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버스 정거장 앞에 떡하니 멈춰 선 진회색 봉고차가 보였다.

버스 정거장에 차 세우는 사람이 또 있었네. 이환이 딱 저 자리에 차를 세우고 내려 다가왔었는데.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데, 봉고차의 옆문이 벌컥 열리며 남자 두 명이 내렸다. 버스 정거장 바로 앞에 바짝 차를 세운 탓에, 정거장 의자에 앉은 나와 봉고차에서 내려선 남자들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내린 남자들이 나를 붙잡아 문이 열린 봉고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봉고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를 세우고 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내리고 나를 붙잡아 봉고차에 태우기까지,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빠르고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봉고차가 다급히 출발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무리하게 차선을 변경하여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압박하듯 내 앞과 옆에 앉은 남자들을 살폈다.

“뭐, 뭡니까? 왜 이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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