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96)화 (96/172)
  • 96화

    “해민 씨 생일이라고 여사님이 진짜 애쓰셨네.”

    “그러엄. 해민 씨 생일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요?”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둘러보며 이환이 감탄했다. 접시를 조금씩 옮겨 중앙에 자리를 마련하고, 커다란 상자를 그 위에 올렸다.

    밑판을 남겨 두고 커다란 뚜껑이 들어 올려지며 상상 이상의 케이크가 자태를 드러냈다.

    “와……, 삼단 케이크.”

    이걸 실제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하얀색의 삼단 케이크. 장식된 연분홍의 꽃과 초록빛 이파리. 잔디 혹은 수풀을 묘사한 듯 하얀 케이크의 아랫부분은 초록 물이 들어 있었고, 가장 하단의 케이크 옆면에는 초콜릿으로 만든 동그란 나무 문도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삼단 케이크를 회오리처럼 휘감은 은색 철사에 드리워진 크리스털 장식과 나비 장식.

    “요정님에게 어울리는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어때요. 괜찮습니까?”

    “이게 정말 케이크예요?”

    “네.”

    요정님과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케이크라고 하기엔 너무 예뻐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이것도 먹는 건가요?”

    “아뇨, 그건 철사라 먹으면 죽습니다. 먹을 때 벗길 거예요.”

    이환이 철사의 윗부분을 잡아 살짝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아, 그렇죠. 철사는 먹으면 죽죠.

    “그런데 해민 씨.”

    “네, 실장님.”

    “날개는 어디 두고 왔습니까.”

    “날개요? 그거 방에 올려 뒀는데……, 가지고 내려올까요?”

    생일 파티니까 미리 받은 선물도 다시 꺼내 오는 게 맞으려나.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 이환이 나를 붙잡아 끌어당기고는 손으로 날갯죽지를 더듬었다.

    “날개도 줬는데, 왜 안 달고 있어요.”

    “……그게 ……탈부착이 가능한 거였던가요?”

    금 날개를 등에 달고 다니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그 이전에 탈착이 가능한 제품이었냐고. 멍청한 내 물음에 웃음을 터뜨린 이환이 “그럴 리가요.” 하고 답했다.

    “케이크까지 자리 잡았으니, 이제 파티 시작하면 되는 겁니까?”

    나를 놀리려는 시도가 성공으로 돌아가자 만족스럽게 웃은 이환이 넥타이와 와이셔츠의 목 단추를 풀며 물었다.

    “아냐, 아직 풍선이 남았어요. 도련님도 어서 불어.”

    정장 차림으로 소파에 앉은 이환에게 여사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륨 가스통은 이환의 손에 넘겨졌고, 여사님은 케이크까지 도착했으니 슬슬 상차림을 마무리해야겠다며 과일을 손질하러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이환이 바람을 넣어 주는 풍선을 받아 구불거리는 끈으로 리본을 묶어 천장으로 띄웠다.

    “하하, 이런 것도 사 왔습니까?”

    박스 안에 남은 풍선을 뒤적이던 이환은 내가 큰마음 먹고 사 온 회심의 물건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헬륨 가스 넣으면 안 돼요. 네 발로 땅에 서야 해서.”

    “그러면 펌프를 써야겠네요.”

    “네?”

    저걸 입으로 불려면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나 암담해하는데, 이환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펌프 어디 있어요?”

    “…….”

    “아, 여기 있네.”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박스 안을 헤집은 이환이 박스 밑바닥에서 플라스틱 미사일 같은 걸 꺼냈다. 그것을 풍선의 바람 주입구에 끼우고 펌프질을 하자 풍선이 쑥쑥 커졌다.

    슈트 재킷을 벗은 이환의 팔뚝은 와이셔츠를 찢을 것처럼 팽창했고, 슉슉 소리를 내며 바람이 투입되는 풍선 역시 거대하게 팽창했다. 금방 뚱뚱해진 풍선을 응시하다 벽에 걸어 놓은 해피버스데이 풍선을 올려다보았다.

    저걸 만들겠다고 빨대를 끼우고 머리에 피가 몰릴 정도로 입으로 바람을 불었구나.

    머리가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던 옛말이 틀리질 않았구나.

    “해민 씨?”

    몸통과 다리가 나뉘어 있는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고 부착하여 만든 거대한 유니콘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이환이 나를 불렀다.

    “벽에 뭐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은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가슴 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요정님 친구가 여기 있네요.”

    “하.하.하.”

    “한번 타 볼래요?”

    “하.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이환의 말을 무시하고, 터지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로 비대해진 유니콘을 거실 한쪽에 세워 두었다.

    “요정님이 동물 친구들을 좋아하는지 몰랐습니다.”

    박스를 치우며 남은 풍선들을 살펴보던 이환이 말했다.

    딱히 동물 친구들이 좋아서 산 건 아니고, 풍선으로 꾸미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대충 몇 개만 있어도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풍성해 보이는 캐릭터 풍선을 샀을 뿐이다.

    왜인지 이 사실을 말해 준다면 이환이 실망할 듯싶어서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 실장님. 걔네는 헬륨 가스 넣어야 해요.”

    “헬륨 가스요?”

    “네. 그냥 바람을 넣으면 애들이 서지 않고 누워 있다고, 꼭 헬륨 가스를 넣으라고 하더라고요.”

    “저런. 누우면 안 되죠.”

    이환이 남은 풍선들에 헬륨 가스를 넣는 동안, 나는 주변의 쓰레기를 모아 치우고 정리를 했다. 과일이 소담히 담긴 접시를 들고나오던 여사님이 거실을 보고 어머, 하고 탄성을 뱉었다.

    “생각보다 더 귀엽다. 해민 씨 말 듣고 사길 잘했네.”

    역시나 선택의 이유는 알지 못하고 그저 내가 사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구매해 주셨던 여사님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며 내게 박수를 보냈다.

    강아지, 고양이, 양, 코끼리, 오리, 토끼, 펭귄이 세 사람뿐인 거실을 아주 풍성하게 채워 주었다.

    “자, 이제 파티 시작합시다.”

    따로 챙겨 두었던 커다란 비닐봉지를 가져오는 여사님을 보며 조금 시무룩해졌다.

    “해민 씨는 이거 쓰고.”

    “제 거는요, 여사님.”

    “도련님은 이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요.”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하라는 여사님의 무성의한 대꾸에 의기소침해진 이환이 봉지 안을 뒤적거렸다.

    띵-동-.

    음악 사이로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여사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음? 누구지? ……백 비서인데? 도련님, 뭐 심부름시켰어요?”

    봉지 안을 뒤적이는 데에 여념이 없는 이환을 보며 혀를 찬 여사님이 문을 열어 주었다. 백윤경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가는 여사님을 보다가 내게 할당된 것을 얌전히 머리에 쓰고 어깨에 둘렀다.

    “해민 씨, 백 비서랑 김 기사님이 왔네. 해민 씨 생일이라고 같이 축하해 주려고 왔대요.”

    금방 다시 들어온 여사님의 뒤에서 쇼핑백을 하나씩 손에 든 백윤경과 김 기사님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해민 씨, 생일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아무리 봐도 업무 외적인 일에 강제 동원된 듯했다.

    안쓰러운 사람들. 상사를 잘못 만나서 퇴근도 못 하고.

    “마침 파티를 시작하려던 참인데,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 왔어. 앉아요, 앉아.”

    “네. 그렇죠. 누가 오라고 멱살 잡아 협박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딱 맞출 수가 없었을 텐데…….”

    여사님이 안내하는 자리로 앉으며 주절거리던 백윤경이 이환의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입니다, 해민 씨.”

    “네, 오랜만이에요. 백 비서님. 퇴근도 못 하시고, 죄송합니다.”

    “아이고, 해민 씨가 왜 죄송합니까. 그저 상사를 잘못 만난 제 잘못이죠.”

    내게 원망을 돌리지는 않았으나, 말에 뼈가 있었다. 그 말속의 뼈는 누가 봐도 이환에게 향하여 있었으나, 이환은 언제나처럼 당당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동물 농장입니까? 풍선만 정신없이 깔아 놓고 다른 장식은 하나도 없고. 어느 업체 쓰신 거예요?”

    “……저요. 제가 꾸몄어요.”

    “아기자기한 게 홈 파티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해민 씨에게 이런 센스도 있었네요. 동물들과 함께 하는 파티라니, 색다른 느낌입니다.”

    태세 전환 속도가 빛보다 빨랐다.

    나는 가끔 백윤경을 통해 사회생활의 고충을 느끼곤 했다. 그래, 남의 돈 받아먹기가 힘들지.

    게다가 몸이 힘든 일을 주로 했던 나와 달리 비서는 상사와 항시 붙어 있어야 해서 감정 노동이 심각해 보였다.

    “자, 파티 시작하기 전에 다들 하나씩 쓰세요.”

    이환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 뒤에 여사님에게로 넘어갔던 비닐봉지가 백윤경과 김 기사님에게로 돌아갔다.

    개수 맞춰 딱 세 개만 사려다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쓰자는 여사님의 말에 종류별로 여러 개 사 온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니, 나이 드신 분들이 머리띠와 레이스 달린 고깔 쓴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고 할 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오, 해민 씨는 여왕님입니까?”

    “네, 그렇게 되었네요.”

    고깔 끝에 달린 하얀 레이스를 나풀거리며 백윤경이 물었다. 큐빅 박힌 왕관을 쓰고, ‘BIRTHDAY QUEEN’이라고 적힌 어깨띠를 맨 상태로 겸허하게 긍정했다. 생일 주인공에게 딱 어울린다며 여사님이 강력 추천을 하셔서 사 온 것이었다.

    이환은 싸구려 표가 물씬 나는 조화 화관을 썼고, 여사님은 초와 케이크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썼다. 허허허 하고 중후한 웃음소리를 내는 김 기사님은 ‘HAPPY BIRTHDAY’라고 글자 장식이 붙은 노란색 패션 선글라스를 낀 상태였다.

    왜인지 김 기사님에게 제일 죄송했다.

    “초에 불부터 붙이죠.”

    백윤경의 말에 이환이 따로 챙겨 온 초를 꺼내 케이크 상단에 꽂았다. ‘20’이라는 숫자에 불이 붙었다.

    배경 음처럼 내내 들려오던 재즈가 멈추었고, 순간 조용해진 거실에 불빛이 사라졌다. 환하게 피어오르는 불꽃 두 개와 함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조금 술렁였고, 생목으로 꽥꽥거리는 백윤경의 노랫소리에 한이 담겨 있는 듯하여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후, 하고 촛불을 불자 거실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이제 선물 증정식 하나요.”

    마치 사회자처럼 백윤경이 나서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해민 씨. 생일 축하해요.”

    여사님이 서랍에 넣어 두었던 작은 상자를 꺼내 와 건넸다.

    “급하게 초대되어서 준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해민 씨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김 기사님도 쇼핑백째로 내밀며 말했다. 역시나 이환에게 끌려온 모양이다. 퇴근 이후에 징집된 것만으로도 죄송한데 선물까지 받아서 더욱 면목이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