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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95)화 (95/172)

95화

“마음 같아서는 연회장 빌리고, 놀이동산 빌리고, 남산 타워 빌리고, 폭죽 뻥뻥 터트려 가며 파티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여사님이 아쉬워하실 테니까요. 지금 봐요. 해민 씨 생일상 차릴 생각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힘드실까 봐 걱정이죠.”

“힘든 것보다 즐거운 마음이 더 클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아쉽지만 해민 씨 첫 생일을 양보해 드린 거고.”

“스무 살 생일인데요.”

“나와 함께 하는 첫 생일이죠. 이거 양보하기까지 엄청 힘들었습니다. 며칠 고민했어요.”

며칠이나 고민할 정도의 일인가. 과장이 심하다며 눈을 흘겼으나 이환은 당당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고, 이번에 양보한 만큼 다음 생일에는 진짜 크고 화려하게 할 예정이니 각오하고 있으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다음 생일.

일 년 뒤의 생일.

그때까지 내가 이곳에, 그 집에, 이환의 곁에 머무르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미래는 언제나처럼 뿌옇기만 했다.

“그래도 선물은 둘이 있을 때 줘도 되겠죠.”

이환의 손짓에 직원이 크고 넓적한 상자를 가져와 내려놓고 사라졌다.

딱 참치 선물 세트 크기다. 생일 선물로 참치 선물 세트를 주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참치 12캔 들어가 있던 선물 세트 상자와 비슷한 크기였다.

“여기서 파는 거예요?”

“……백윤경 시켜서 전달해 둔 겁니다.”

“왜요?”

“들고 다니면 폼이 안 나서요.”

아하. 그걸 생각 못 했네.

너무나 현실적인 이유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 축하해요, 내 요정님.”

이환은 내 앞으로 상자를 밀어 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펄이 들어가 반짝이는 검푸른 빛깔의 벨벳 상자에 예쁘게 묶여 있는 리본을 내려다보았다.

부모님한테서도 못 받아 본 생일 선물이다. 아버지는 그의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으나, 자식의 생일을 축하하며 선물을 사 주지는 않았다. 주야장천 미역국만 끓여 대던 엄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미역국조차 아버지를 위한 것처럼 느낄 정도로, 내 생일에 나를 위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열어 봐도…….”

“네, 열어 봐도 괜찮습니다. 해민 씨 선물이니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묻자 이환이 어서 열어 보라며 손짓을 했다.

천천히 리본을 풀고 상자를 매만졌다. 종이 상자라고 생각했던 건 의외로 얇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케이스조차 이리 범상치 않을까.

“…….”

살짝 열었던 뚜껑을 닫았다. 눈앞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환의 얼굴을 보았다가, 내가 본 것이 맞나 혼동이 와서 다시 상자를 열었다.

“음…….”

역시 제대로 봤었네.

나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마음에 듭니까?”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왜 그렇게 숨겨서 보고 있어요.”

시원하게 열어서 제대로 보라며, 이환이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가져갔다. 애써 외면하던 상자 속 선물이 자태를 드러냈다.

“어때요.”

“눈 부셔요.”

“그 정도로 아름답긴 하죠. 나도 보고 만족했습니다.”

아니, 조명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실제로 눈이 부셨다.

“이건 나비인가요?”

금으로 이루어진 날개 한 쌍이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비로 보입니까? 요정님 날개인데.”

섬세하게 세공된 금 날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였다. 촘촘한 그물처럼 오리고 휘고 꼬아서 한껏 모양을 낸 날개가 아름다우면서도, 이게 전부 금으로 만들어진 건가 싶어 부담감도 들었다.

“이거 진짜로…… 금인가요?”

너무 속물 같은 질문이었나. 이환의 웃음소리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저번에 요정님 날개가 사망했다고 그래서, 이번에 신상 날개를 준비했습니다. 이제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날아 올 수 있겠어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걸 기억해서 선물로 만들어 온 결과물도 놀랍다.

“제 몸무게로 날기엔, 날개가 너무 작아요.”

“저런. 요정님 능력으로 어떻게 안 됩니까?”

“안타깝게도 안 됩니다.”

“다음에 더 큰 날개를 선물해 줘야겠네요.”

그보다는, 이 정도 말했으면 날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게 옳지 않나. 언젠가 진짜로 내 몸보다 더 큰 날개를 만들어 와서 날아 보라고 요구할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해민 씨 탄생석이 블랙 다이아몬드라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네.”

현실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와 달리 탄생석만큼은 참으로 비싼 보석이구나 생각했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그냥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블랙 다이아몬드. 비싼데다 특이하기까지 한 그 보석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흔한 일반인에 불과한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날개 가장자리를 다이아몬드와 블랙 다이아몬드로 장식했습니다. 해민 씨만을 위한 날개예요.”

날개 끝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보석을 가리키며 이환이 설명했다. 찬란한 조명 빛은 다이아몬드 때문이었나 보다.

“사람에게는 각자만의 아픔이 있기 마련이고, 다른 누구보다 내 삶이 슬프고 힘들고 아프고 고될 겁니다. 삶이란 비교하고 우위를 논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해민 씨도 지금까지 수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견디기 힘들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일도 있었을 거예요.”

“…….”

“잘 버텼습니다.”

이환의 손이 쭉 뻗어 나와 상자 모서리를 꽉 붙잡고 있던 내 손을 감쌌다.

“어리고, 여리고, 연약했던 몸으로 잘 버텼어요. 도망치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고, 그 작은 몸으로 지금까지 잘 버텼습니다.”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손이 손가락을 걸치듯 붙잡아 손끝을 조물조물 만져 주었다.

“이제 날아올라요. 내가 해민 씨의 날개가 되겠습니다.”

∞ ∞ ∞

뻥.

화들짝 놀라며 눈치를 보자, 여사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봐요, 풍선 많이 사 오길 잘했지?”

풍선을 또 하나 터트린 나는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아 깜짝깜짝 놀라는데, 여사님은 깜짝 놀라 주방에서 달려 나오셨던 처음과 달리 슬슬 적응 중이신 모양이다.

“그렇게 넋 놓고 있으니까 그렇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뇨, 그냥……. 이거 너무 잘 터지는 것 같아요.”

내가 딴생각을 하긴 했지만, 풍선이 터지는 건 내 탓이 아니라 약한 풍선 탓이라고 슬쩍 변명을 해 보았다.

“잘 터지니까 풍선이지. 안 터지면 강철이게.”

딱히 먹힐 수준의 변명이 아니라서,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아.

시무룩한 스스로를 위로하며 헬륨 가스통에 새 풍선을 끼워 바람을 넣었다.

“아휴, 이제 그만큼 한 거야?”

거실 테이블에 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음식 그릇을 옮겨 놓으며 여사님이 천장에 둥둥 떠 있는 풍선을 바라보았다.

“해 본 적이 없어서 영 속도가 안 나네요. 좀 서두를 걸 그랬어요.”

차라리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면 빨랐을 텐데, 헬륨 가스를 넣어야 해서 조심스럽다. 그런 와중에 펑펑 터뜨리기나 하고.

“그래도 한 세트는 만들었어요.”

흰색과 분홍색과 반짝이 풍선으로 한 세트를 만들었다. 천장까지 닿지 않게 끈을 하나로 모아 바닥에 고정시키자, 공중으로 떠오른 풍선들이 둥실둥실 흔들렸다.

“잘했어요. 예쁘네.”

가벼운 박수와 함께 칭찬이 돌아왔으나, 당당하지 못했다.

여사님이 대게와 킹크랩을 찌고,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을 하고, 굴 오븐구이와 탕수육과 닭꼬치와 베이컨말이 등등, 열댓 가지의 음식을 만드는 동안 꼴랑 풍선 한 세트를 완성시켰으니. 여사님이 요리 하나 만드실 시간에 풍선 하나 분 꼴이 아닌가.

“아아아. 차라리 여사님 옆에서 설거지나 할 걸 그랬어요.”

바닥에 엎드려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여사님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힘내요. 음식 다 했으니까, 이제부터 둘이서 준비하면 되지.”

“파티 준비는 제가 해야 한다고…….”

“여기서 더 터뜨리면 풍선을 다시 사 와야 할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해피버스데이 풍선은 내가 만들게요.”

그건 하나밖에 안 사 와서 터뜨리면 진짜 다시 나가서 사 와야 한다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제가 입으로 불게요. 여사님이 헬륨 가스를 맡아 주세요.”

조금이라도 젊은 내가 입으로 불어야지.

정정하신 여사님의 모습을 보면, 폐활량도 내가 더 좋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런 고생은 내가 하는 게 옳다.

헬륨 가스통을 손에서 놓고 입을 사용하자 한결 속도가 빨랐다. 진즉 입으로 불걸. 헬륨 가스가 들어가지 않은 풍선이 바닥에 착 가라앉아 굴러다녔지만, 해피버스데이 풍선은 실로 연결해 벽에 거는 용도여서 오히려 공중에 뜨면 곤란했다.

소파를 딛고 벽에 실을 걸어 해피버스데이를 걸쳐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생일 파티 느낌이 났다.

“음악. 파티에는 음악이 있어야지.”

여사님이 짝 하고 손뼉을 치더니 LP판 하나를 골라 와 턴테이블에 올렸다. 빰빠밤빰빰 하는 트럼펫 소리에 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찐득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야, 벌써 파티 시작한 겁니까?”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이환이 기척도 없이 불쑥 집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를 높였다.

“실장님?”

“해민 씨가 케이크를 기다릴 것 같아서 조금 일찍 퇴근했습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라는 의문이 담긴 부름에 이환이 들고 온 커다란 상자를 보이며 대답했다.

전혀 기다리지 않았는데.

아직 풍선도 다 못 불었는데.

“케이크 구경할래요?”

“네에.”

그래도 케이크는 구경하고 싶다. 점심때 먹은 손바닥만 한 케이크를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큰 상자여서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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