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의자에 앉아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멀찍이 떨어져 대기 중인 레스토랑 직원들과 단 한 테이블의 고객을 위해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들.
“네, 식사 끝날 때까지는 없을 겁니다.”
“……왜요?”
“해민 씨 편하게 식사하라고 레스토랑을 빌렸거든요.”
‘편하게’의 의미가 상당히 변질된 느낌이다. 언제부터 이환이 느끼는 편안함과 내가 느끼는 편안함에 이렇게 극심한 차이가 있었는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이 호텔, 사모님이 경영하신다면서요. 돈 내고 빌리신 거예요, 아니면 그 권력 남용? 그런 거예요?”
“어느 쪽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정당하게 돈을 내고 빌리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면 대여료가 너무 아깝고, 회장님 둘째 아들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레스토랑을 독점한 거라면 돈 아껴서 좋은 한편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이환이 지출하든 사모님이 손해를 보든, 어차피 회장님 입장에서는 다 마이너스겠지만. 그래도 이환이 손해를 안 봤으면 싶기도 하고.
애초에 누가 손해를 보느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가장 바쁠 점심시간에 레스토랑 문을 닫아 버리고 손님을 못 받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지 않나 싶고.
“나중에 영수증 보여 줄까요?”
“아니요. 그거 보면 속상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피크 타임의 대여료로 얼마를 지불했는지 예상하기가 어렵지만, 아무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돈일 게 분명했다.
시무룩한 내 대꾸에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고, 식사부터 합시다.”
이환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음식을 내왔다.
호텔의 코스 요리는 언제나처럼 맛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참 퍽퍽했다.
“신경 써 달라고 했더니, 평소보다 고기가 더 좋네요. 샐러드도 싱싱하고.”
그걸 먹고 있는 이환의 얼굴도 싱싱했다. 싱싱하지 못한 건 그저 내 마음뿐이겠지.
그럼에도 나오는 음식을 싹싹 긁어 먹었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다 먹어야 했다. 빨리 먹고 빨리 나가 주면 손님을 다시 받겠지. 그럼 대여료도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천천히 먹어요. 해민 씨가 빨리 먹고 빨리 일어선다고 해도 내는 돈은 안 바뀝니다.”
내 얄팍한 속내를 알아차린 이환이 선수를 쳐 말했다.
“……너무 표났나요?”
어떻게 내가 속으로 생각한 걸 귀신같이 알아차렸지?
손으로 뺨을 감싸며 묻자 이환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표났습니다.”
“…….”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먹어요. 경치도 보고, 음악도 듣고, 내 얼굴도 보면서. 해민 씨 지금 접시에 코 박고 먹고 있는 거 압니까?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사람인 줄 알겠어요.”
“빨리 먹고 나가면 좀 깎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겸허한 자세로 이실직고를 했다.
“오늘은 해민 씨의 날이에요. 내 지갑 사정까지 걱정하기엔 너무 좋은 날이잖아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음식을 즐기고 뷰도 즐기고 음악도 즐기고.”
“실장님 얼굴도 즐기고요?”
“네. 그래 주면 고맙겠네요.”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며 이환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레스토랑 전체를 혼자 쓰는 거, 티브이에서 많이 봤는데. 실제로 겪어 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오, 그렇습니까.”
“식당 단체 예약해서 회식 한 적은 있는데, ……이거랑은 좀 다르죠?”
“그렇죠.”
“네. 다르구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티브이에서 본 거 있습니까?”
“네?”
“재벌들 돈지랄이라고 하나요. 레스토랑 전체를 혼자 쓰는 거 말고. 또 뭐 봤습니까.”
“음…….”
이 드라마에서도 재벌, 저 드라마에서도 재벌. 하도 많이 나와서 비슷비슷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집 차고에 번쩍번쩍한 차를 쫙 주차해 두는 거?”
“그거 우리 집 주차장에서도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 그렇죠.”
“해민 씨는 차에 관심도 없고요. 엠블럼 보고도 어떤 차인지 모르잖아요.”
“……네에.”
이환이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다.
솔직히 나와 상관없는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차에는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냥 바퀴 네 개 달려 있으면 자동차라는 생각밖에 없고, 브랜드가 다 다르다고 하는데 죄다 비슷해 보이고.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이환의 차도 색깔과 크기로 구분하는 정도였다.
“그거 말고 다른 건요?”
“음, 명품 매장 가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이런 거?”
“굳이 북적이는 매장까지 찾아갈 필요 있습니까. 라운지에 앉아서 말 한마디면 되는데.”
“그렇……죠.”
전용 라운지에 앉아서 말 한마디로 쇼핑하는 걸 업무 첫날에 겪어 봤지.
“점심에 일본 가서 우동 먹고, 저녁에 횡성 가서 한우 먹는 거?”
“일본 가서 먹을 정도로 우동이 가치 있는지는 둘째 치고, 굳이 가야 합니까. 요리사를 불러오면 될 것을.”
“……왜 말하라고 하신 거예요? 저랑 토론하세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묻자, 이환이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스테이크 더 먹을까요?”
“아뇨.”
화제 전환에 실패한 이환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디저트 먹을까요?”
“……네.”
여전히 마음은 상해 있었으나, 그래도 디저트는 먹고 싶었다.
이환의 손짓에 직원이 다가와 빈 접시를 치웠다.
“디저트를 내올까요?”
“네. 케이크도 같이 가져와요.”
직원의 물음에 답한 이환이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파티는 저녁에 할 거지만, 둘이 있을 때 먼저 축하해 주고 싶어서 작은 케이크로 주문했습니다.”
직원이 디저트와 함께 가져온 케이크는 조금 특이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케이크는 윗면이 납작한데, 이 케이크는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원형이었다.
“하얀 찐빵 같아요.”
“…….”
내 감상을 들은 이환은 잠시 침묵했다.
“너무 신기해요.”
크기도 손가락을 쫙 펼친 손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작아서 더욱 찐빵 같았다.
“초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직원이 길쭉한 초 두 개와 짧은 초 이십 개, 숫자로 2와 0 모양의 초를 가져와 보여 주었다.
선택의 폭이 넓은 건 좋은데 짧은 초 이십 개는 좀…….
떨떠름함을 감추며 숫자 2와 0 모양의 초를 손에 들었다.
“초를 켜 드릴까요?”
직원의 물음에 힐끔 이환의 눈치를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찐빵, 아니, 케이크 위에 2와 0 모양의 초가 꽂혀 ‘20’을 만들었다. 직원이 초 위에 불을 붙여 주었고, 내내 알 수 없는 곡을 연주하던 연주자들이 장엄하게 ‘생일 축하합니다’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
감격스럽기보다 조금 부끄러웠다. 맞은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환의 표정에 뿌듯함이 어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다행스럽게도 이 수치스러운 마음이 겉으로 표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노래 불러 줄까요?”
“괜찮습니다.”
딱 잘라 거절을 하고 흔들리는 불꽃을 후 불어 껐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뿌연 연기가 꼬리를 말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소원도 안 빌고 끈 겁니까?”
“……빌어야 해요?”
“당연하죠.”
그사이에 윗부분이 녹아 찌그러진 20이 된 초를 빼내며 “누구한테요?” 하고 물었다. 찐빵 위에 두 개의 구멍이 생겼다.
“항상 궁금했어요. 초 불 때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그건 누구한테 비는 소원일까. 누가 소원을 들어주는 걸까.”
“내가 예전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
빵 칼을 건네주며 이환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민 씨는 남들이 무심코 넘기는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가진다고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아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의문은 한 번쯤 떠올려 보지 않을까. 누구한테 비는 소원인지, 그래서 소원은 누가 들어주는 건지. 그걸 알아야 소원을 빌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역시 우주의 기운이겠죠.”
“우주요?”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 비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싶어서요. 별님에게 소원 빌고, 달님에게 소원 빌고 하잖아요.”
신에게 기도하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라면, 애초에 신이 내 팔자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부터 의문이고 원망스러우니까. 그냥 우주의 남아도는 기운이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믿는 쪽이 더 좋다.
“드세요, 실장님.”
반으로 자르려고 했는데 약간 삐뚤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며 절반의 케이크를 접시에 덜어 이환에게 내밀었다.
“케이크를…… 반으로 잘랐군요.”
“네, 같이 나눠 먹어요.”
“그렇죠. 둘이 먹어야 하니까 반으로…….”
조금 떨떠름한 표정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반 남은 케이크를 내 앞으로 끌어왔다. 딱 세 번의 포크 질로 케이크가 사라졌다. 케이크의 모서리를 포크로 깨작거리며 맛보던 이환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해민 씨는…… 먹는 모습도 복스럽고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케이크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할까요? 집에 가져가서 먹을래요?”
“아뇨. 여사님이 기합을 넣고 계셔서, 배 좀 비워 둬야 해요. 나오기 전에 여사님이 장 볼 것들 정리해 둔 종이를 봤는데, 파티 하고 나서 소화시키고 자려면 꽤 고생할 것 같아요.”
“그 정도입니까?”
“네.”
내 대답에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나도 해민 씨를 좋아하지만, 여사님도 해민 씨를 참 좋아하세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고마워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래서 파티를 집에서 하겠다는 말에 그러자고 한 겁니다.”
“…….”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이환이 한숨 섞인 웃음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