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여사님도 식후에 같이 차 드시죠. 어, 오늘부터…….”
머리카락 속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끼며 더듬더듬 말하자, 여사님이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 서운했을까 봐? 이 나이 먹고 도련님이 해민 씨랑 친하게 지낸다고 늙은이가 질투라도 할까 봐 그래요? 해민 씨가 우리 도련님이랑 친하게 지내 줘서 내가 얼마나 고마운데.”
단순히 친하게 지낸다고 말하기엔, 그 친근함의 영역이 살짝 다른 것 같아서 참으로 곤란했다. 이환과 나 사이에 이렇고 저렇고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음을 여사님도 알고 계실 테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죄스러웠다.
“해민 씨가 오래오래 우리 도련님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오래오래요?”
“응. 내 나이가 벌써 몇이야.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도련님 혼자 남을 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나온다니까.”
“그런 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 정정하신데요.”
요즘은 백 세 시대라고 하지 않나. 앞으로도 몇십 년은 너끈히 더 사실 듯 보였다.
“어휴, 목숨만 붙어 있으면 뭐 해. 이제는 관절도 삐걱거리고, 뭐 조금만 하면 어이구 소리부터 나오는걸. 언제까지 도련님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우리 도련님이 눈에 밟혀서 붙어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나도 이제 벌어 둔 돈으로 놀면서 쉴 나이야.”
“실장님이 들으시면 서운하시겠어요.”
“도련님이 서운해한다고 늙어서까지 일할 수는 없잖아. 여기 있는 것도 길어야 일이 년이지.”
이런 면에서는 또 가차 없으시구나.
“우리 도련님이 좀 별나서, 이 자리를 누가 채워 줄까 걱정이 많아요. 해민 씨가 우리 도련님 옆에 있으면서 좀 챙겨 주면, 내가 마음이 아주 편할 것 같은데.”
어때?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 오는 여사님이 오늘따라 조금 무서웠다.
“누구든 여사님보다 더 실장님을 챙길 수 있겠어요. 오래오래 실장님 곁에 계셔야죠.”
“아이고, 늙어서까지 일하다 죽으라는 소리네.”
“아니, 그건 아니고…….”
왜인지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말을 아주 잘해야 본전이고,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기분이다.
“내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도련님이 해민 씨만큼 가까이 두고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 이제껏 없었거든.”
“백 비서님하고도 사이좋아 보이셨는데요.”
“그이야 비서잖아.”
나는 비서도 안 되는 그냥 잡일꾼 나부랭이인데?
“우리 도련님을 위해서 마냥 희생하라는 뜻은 아니고, 여기서 지내는 게 해민 씨한테도 나쁘지 않으면 오래 있어 달라는 거지. 다른 일자리 구할 필요 없이, 원래 있던 곳에 쭉 있으면 좋잖아. 편하고, 익숙하고.”
“네에.”
“꼭 일이 아니더라도, 친구라거나 애인이라거나. 응? 요즘은 친구끼리도 같이 살고, 결혼 안 해도 애인끼리 동거도 많이 한다더만. 결혼까지 해 주면야 나야 좋지만, 그건 너무 욕심이고. 한 오십 년 정도만 우리 도련님이랑 같이 살아 준다고 하면, 내가 오늘 당장이라도 마음 편하게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애인이니 결혼이니 하는 말은 현실성이 없는 말이니 미뤄 두고서라도, 몇십 년이요?
“아휴, 해민 씨가 오늘 당장 그만둘 것도 아닌데. 내가 또 혼자 급발진했다. 늙으면 성격이 느긋해져야 하는데, 도련님 걱정 때문인지 갈수록 성격이 급해진다니까. 이상하게 해민 씨가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왠지 이 집에 정을 못 붙이는 것 같아서, 내가 해민 씨 볼 때마다 불안해서 이래.”
다른 건 다 그냥 하는 소리라고 해도, 나에 대해 느낀 감정이 날카로울 정도로 정확해서 살짝 놀랐다.
언제라도 떠날 사람.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 한번 불면 훨훨 날아가 버릴 사람.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지만,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
“선금까지 받아 놓고 어딜 가겠어요.”
떨리는 입술을 손으로 감추며 농담하듯 말했다.
“여사님이 절 얼마나 챙겨 주시는데. 여사님 때문에라도 훌쩍 못 떠나죠.”
“그럼 앞으로 내가 더 잘해야겠네.”
“지금도 과분할 정도로 잘해 주세요.”
“그렇지? 해민 씨 온 뒤로 내가 더 신경 써서 저녁 차리잖아. 아침이야 도련님이 밥을 안 먹으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죽이지만. 그래도 저녁 식사만큼은 몸에 좋은 거로 준비한다고 매일 메뉴 고민한다니까.”
“간장에 밥 한 그릇만 주셔도 잘 먹으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음식은 자고로 맛있고 몸에 좋은 걸 먹어야지. 간장에 밥이 웬 말이야. 지금은 대충 먹고 몸을 막 굴려도 젊으니까 모르지. 그게 다 나이 들어서 돌아와요. 어딜 가든, 무슨 상황에서든 밥은 꼭 잘 챙겨 먹어야 해. 그래야 나이 들어서 몸이 버텨 주지.”
한국인은 밥심, 이라는 구호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집에서 밥에 흥미 없는 사람은 한 명으로 족해요.”
“실장님도 막상 차려 놓으면 잘 드시잖아요.”
“해민 씨가 있으니까 잘 먹는 거지. 그전에는, 어휴, 말해 뭐 해.”
“그런 거 못 느꼈는데. 근데 입은 좀 짧으신 것 같았어요. 많이 안 드시더라고요.”
밥도 나보다 절반은 덜 먹는 듯하고, 과일을 깎아 줘도 한두 개 집어 먹는 수준이고, 지난 추석에 전을 만들 때도 그렇고 여사님이 잡채나 만두를 했을 때에도 맛만 보는 수준으로 먹었다.
“그렇다니까. 해민 씨 온 뒤로 그나마 먹는 시늉 하는 거야. 먹는 거에 그리 의욕도 없는 사람이 해민 씨는 챙겨 먹이고 싶어서.”
“설마 그러시려고요.”
“웃긴 양반이라니까. 내가 뭐, 도련님 없으면 해민 씨를 굶기거나 대충 먹일까 봐 그러는지, 아주 그냥 걱정이 넘쳐.”
이환이 내 걱정을…… 많이 하긴 하지. 과할 정도로 신경 쓰고 염려하고 보살핀다.
어떻게든 주는 월급 이상으로 부려 먹으려고 하던 다른 고용주들을 떠올리면, 이환은 고용주로서의 악독함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해민 씨.”
“네, 여사님.”
“곧 해민 씨 생일이잖아요.”
“네?”
“해민 씨 생일. 11월 11일이잖아.”
“아…….”
하루하루 날짜 지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생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챙겼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해서, 언젠가부터는 ‘생일’이라는 단어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네요. 11월이었죠.”
“뭐야, 남의 생일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일 챙긴 지 오래되어서요.”
부모님과 같이 살았을 때에도 생일이라고 특별히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끓여 주는 미역국 한 그릇. 그것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그리 기쁘지 않은 얼굴.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아버지의 입장을 떠올려 보았다. 그에게는 자식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보다 제 인생이 뒤바뀐 원망스러운 날이 아니었을까. 나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만 생기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엄마가 끓여 주는 미역국은 아버지의 처지와 있어야 할 자리를 확인시켜 주는 족쇄와도 같았다. 그래서 케이크나 선물은 없었지만, 매해 생일마다 미역국은 잊지 않고 끓여 주었다. 그마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사라진 요식 행위일 뿐이지만.
“그날은 해민 씨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한 상 가득 차릴 거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미리미리 말해 줘요. 그런데 내가 피자나 스파게티 이런 건 못 해서 큰일이네. 할 줄 아는 건 한식뿐인데. 호텔에 연락해서 셰프님 좀 보내 달라고 할까 봐.”
그 셰프님 몸값이 얼마인데 이런 일로 부른단 말인가.
여사님의 말에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뭐 특별한 날이라고요. 전 괜찮으니까 괜히 고생하지 마세요. 셰프님도 안 부르셔도 되고요. 여사님이 잘 챙겨 주셔서 매일 저녁이 생일상인데요.”
“왜 특별한 날이 아니야. 그날 그 시간을 기점으로 해민 씨가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데. 기념하고 축하해야 하는 날이지.”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 잊지 않고 챙겨 준 엄마 때문에 기념이라고 하면 치가 떨린다. 축하는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고.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 생전에 한번 본 적 없는 남의 생일도 공휴일로 지정해 가면서까지 그리 거창하게 챙기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생일을 그냥 넘길 수 있나.”
“축하까지 받을 일인가 싶어서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축하받을 일이지. 해민 씨는 나이답지 않게 야무지고 똘똘한데, 가끔 이렇게 자신감이 없더라. 안 되겠어. 해민 씨는 남에게 축하받기 전에, 먼저 스스로 축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 파티 플래너를 부를까 했는데, 파티 준비는 해민 씨가 직접 해요.”
“네?”
갑자기 파티요?
음식 해 먹자던 이야기가 어느새 파티로 발전한 거지? 거기에 파티 준비라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거실을 어떻게 꾸밀 건지 고민하는 게 해민 씨 숙제야. 그동안 나는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생각해 볼게요.”
“제가 옆에서 도와 드릴 테니 그냥 음식만 해 먹어요.”
“그럼 파티 기분이 안 나잖아. 풍선도 달고 꽃가루도 뿌리고 해야지.”
“괜히 청소하기만 힘들어요. 집 어지르면 실장님도 안 좋아하실 테고.”
“무슨 소리야. 해민 씨 생일이라면 도련님이 더 좋아할걸.”
“…….”
무적 방패가 될 줄 알았던 집주인의 예상 반응이 갈렸다.
“아니다. 도련님이라면 집에서 하는 거 싫어할 수도 있겠어.”
“그렇죠?”
“해민 씨한테는 뭐든 최고로 해 주고 싶어 하는 양반이니까. 우리끼리 준비하는 게 성에 안 찰 테지. 연회장 빌려서 엄청 크고 화려하게 하고 싶어 할 거야.”
“…….”
그거야말로 아주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