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잠시 고민하는 내 눈에 내용물이 모조리 꺼내어진 엄마의 짐가방이 들어왔다.
엄마를 입원시킬 때 짐을 싸 가져갔던 가방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아버지의 납골당에 갈 때 입는 용도로 챙겨 두었던 일상복을 꺼내 갈아입고 벗은 병원복까지 야무지게 가방 안에 챙겨 온 모양이다.
병원복이야 습관처럼 벗어서 넣어 두었다고 이해하지만,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빈 소주병과 찌그러진 플라스틱 컵, 구겨진 전단지, 달이 한참 지난 월간지, 돌멩이는 대체 왜 가방에 들어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민 씨. 해민 씨?”
“네?”
“피곤해요?”
팔꿈치를 살짝 잡아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많이 피곤한 모양입니다. 가서 좀 앉아 있을래요? 여긴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이환이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눈을 깜빡이며 잠시 고민했다. 부질없는 고민이다.
이 새벽에 걸려 온 전화에 강제로 잠이 깨 상담 중인 변호사에게 미안해졌다. 저 변호사는 무슨 죄인가. 이환에게 고용된 입장이라서 새벽에 깨워 일을 시켜도 별말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연관 없는 내 일에 동원된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러고 보니 지구대도 벌써 두 번째네.
나만 죄짓고 살지 않는다면 인연이 없으리라 생각한 곳인데, 내 잘잘못과 상관없이 충분히 올 수 있는 장소였다.
“해민 씨.”
“……죄송해요. 제가 자꾸…….”
“아닙니다. 가서 어머니 곁에 앉아 있어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변호사의 말을 배경으로 이환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녜요. 괜찮습니다. 변호사님도 그만 끊고 주무시라고 하세요.”
“…….”
“엄마도 찾았으니까 병원 데려다 드려야 하고요. 언제까지 저기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그렇게 조용히, 각자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으면 싶었다. 이 새벽의 난리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해민 씨.”
“그렇게 할게요, 실장님. 병원 직원이세요? 이송 차량은 가져오셨어요?”
여태 멍하니 있던 내가 갑자기 상황을 정리하려는 모양새로 말을 잇자, 다들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변호사까지 원격으로 연결되어 법을 들먹이는 상황이라 자칫 일이 복잡해지지는 않을까 곤란함을 감추지 못하던 병원 관계자도,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싶어 점차 따분해하던 순경도 한마음 한뜻으로 이게 뭔가 하는 얼굴이었다.
“네, 그럼요. 병원 구급차 끌고 왔습니다. 환자 이송할까요? 동행하시겠어요?”
법적 문제로 끌고 들어갈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병원 관계자가 제일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내 말에 반색하며 답했다.
“네. 지금 바로 가죠. 새벽부터 경찰관님들도 고생하셨습니다.”
“아, 예. 이렇게…… 끝나는 겁니까?”
“네. 뭐 더 할 게 있나요.”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며 고소를 하네 마네 할 여력도 없다. 그런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변호사와의 전화를 끊은 이환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자고 있는 엄마를 깨워 일으켰다. 비몽사몽 하여 일어나지 않으려 버티는 엄마의 힘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보호자님. 괜찮으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병원 관계자가 엄마의 양어깨를 안아 부축했다. 부축이 아니라 거의 연행 수준이기는 하지만, 순경들도 그렇고 병원 직원도 그렇고 치매 환자가 한번 난리를 부리면 막기 힘들다는 사실을 다들 겪어 본 사람들이라서인지 별다른 참견은 없었다.
멀뚱하게 서서 지켜보는 순경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지구대를 나왔다. 구급차의 뒷문을 연 병원 관계자가 엄마를 데리고 들어갔다.
“보호자님. 같이 타시겠어요, 아니면 타고 오신 차로 따라오시겠어요?”
“타고 갈게요. 잠시만요.”
“네, 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볼일 보시고 오세요.”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병원 관계자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어스름하게 밝아지는 하늘이 보였다. 가뜩이나 새벽에 잠드는 이환인데, 얼마 자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회사에 가게 생겼다.
작게 한숨을 삼키며 근처에 서 있는 이환에게 다가갔다.
“실장님.”
“네.”
“저는 병원에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동행해도 된다고 하니까, 저는 저거 타고 갈게요.”
“같이 가겠습니다.”
“실장님은 출근하셔야죠. 한숨도 못 주무셨는데, 여기서 더 피곤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대로 해민 씨만 보내면 피곤한 것보다 걱정되는 마음이 더 클 겁니다. 올 때는 또 어떻게 하려고요.”
“그때는 버스가 다닐 테니까, 버스 타면 돼요.”
“나 신경 쓰지 말고 해민 씨 볼일 봐요. 나는 얌전히 뒤따라갔다가 해민 씨 일 다 끝나면 얌전히 태워 오기만 할 거니까.”
조용히 운전기사 노릇만 하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면 알아서 출근할 테니까 그쪽으로는 걱정하지 말라고.
내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은 이환이 장난스레 뺨을 톡 두드렸다.
“가 봐요.”
“저는 구급차 타고 갈 건데, 정말 따라오실 거예요?”
“네.”
“……왜요?”
“도움을 주고받는 것과 별개로, 옆에 누가 있는 것만으로 의지가 될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옆에 가만히 서 있음으로써 나에게 의지가 되고 싶다고.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의 마음에 뒤늦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저는 따로 가야겠네요. 뒤따라갈 테니 먼저 출발하세요.”
“아, 그러실래요?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뒷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던 직원에게 다가가 말했다. 구급차의 문을 닫아 주고 이환이 올라타 있던 세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같이 가요, 실장님.”
“네, 그래요.”
왜 구급차를 타고 가지 않느냐고, 왜 어머니 곁에 있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구급차의 뒤를 쫓기만 했다. 고요한 차 안에서 엄마가 누워 있을 구급차를 응시했다.
“고소할 생각은 없습니까? 오늘 일은 환자 관리 부실로 엄연히 병원 측 과실인데.”
“다친 사람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는데요. 병원하고는 법적 싸움하는 거 아니랬어요. 그건 수술 문제인가. 그래도 개인이 고소하고 싸울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싸우고 싶으면 싸워도 됩니다.”
“실장님이 제 편이니까?”
“그렇죠.”
무조건 내 편인 사람. 언제나 그렇듯 내 뒤에서 나를 지지하고 지탱해 주는 사람. 내가 찾지 않아도 먼저 내 곁에 자리해 있는 사람.
“……실장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아픈 가족이 있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아픈 엄마에게 냉담한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내 편이라는 사람에게 나의 추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나를 그가 몰랐으면 바랐다.
“내게 감추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는 항상 해민 씨 편이에요.”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토해 내고 싶은 비밀을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살고 싶어요. 숨 쉬고 싶어요.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조여 오던 여자의 손이 떠올라 눈을 깜빡였다.
“……괜찮다고 말해 주세요.”
모든 건 다 과거의 일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내가 아직 숨 쉬고 있다고.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이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다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15
아무 일 없이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이환을 구해 주고 이 집에서 숙식을 시작하며 크고 작은 일을 연달아 겪어 왔는데, 그 시간들이 마치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었던 것처럼 어느 순간 일상이 너무나 평온하고 잠잠해졌다.
“해민 씨, 월급 넣었으니까 확인해 봐요.”
엄마의 병원 탈출 사건을 마무리 지으며 병원 측에서 먼저 사과와 함께 한 달 입원비를 돌려주었기에, 지난달부터는 가불도 받지 않았다. 병원비를 제외하면 따로 돈 쓸 일도 없고, 월급은 병원비를 내고도 남을 만큼 넉넉해서 푼돈이지만 조금씩 돈도 모이고 있었다.
“해민 씨가 온 지 벌써 세 달 됐네. 앞으로도 오래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다.”
“하는 일도 없이 월급만 따박따박, 심지어 선금으로 받아 가는 제가 뭐 예쁘다고요.”
“하는 일이 없긴 왜 없어. 오히려 너무 열심이라 요즘에는 아줌마도 일주일에 한 번만 부르잖아.”
일 시키는 사람도 없으니 쉬엄쉬엄해도 좋으련만, 과하게 부지런하다며 타박을 들었다. 시킨 대로 쉬엄쉬엄 놀면서 일한다는 칭찬을 듣는 것보다 훨씬 좋은 타박이었다.
주는 월급이 아깝다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월급 받는 만큼은 일을 해야지.
“해민 씨가 온 뒤로 도련님도 뭔가 의욕적인 모습이고. 집이 조용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
“전에는 안 의욕적이셨어요?”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살고, 해야 할 일이니까 하고, 먹어야 하는 밥이니까 먹고. 이런 느낌? 노인네보다 삶의 즐거움이 없었다니까. 해민 씨 온 뒤로는 웃음도 많아지고 부드러워지셨어. 일 층 내려와 있는 시간도 늘고. 예전에는 밥만 먹으러 내려왔었거든.”
여사님이 묘사하는 과거의 이환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베이스가 웃는 얼굴인 사람처럼 언제나 다정하게 웃고 있는 이환만 떠올랐다. 식사 시간에도 조금 일찍 내려와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 근처에서 구경하기도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도 종종 거실이나 티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러다 이환과 함께했던 사람이 거의 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