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90)화 (90/172)

90화

―OO지구대입니다. 정명숙 님 아들 되시죠?

“……네.”

긴장으로 굳었던 등에 힘이 풀렸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네, 네 하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벽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웠던 벽이 금방 뜨끈뜨끈해졌다.

놀란 마음에 잠은 달아났는데, 움직이고 싶지 않은 무력감이 몸을 지배했다. 그래도 움직여야 한다. 항상 그래 왔듯이, 나는 도망칠 용기가 없기에 이번에도 움직여야 했다.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대충 물을 묻혀 머리를 정리했다.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 침실에서 지갑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손에 들었다.

“해민 씨?”

“…….”

잠결에 불렀나 싶어 가만히 숨죽이고 서 있자,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은 이환이 정확히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 해요?”

잠꼬대는 아니었구나.

희미한 바람이 푸시식 죽어 버렸다.

그는 달빛에 의지하여 어색하게 서 있는 나와 내 손에 들린 휴대폰, 지갑, 옷을 차례차례 눈에 담았다.

“해민 씨.”

이환은 내 이름을 부르며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잠깐…… 외출 좀 하고 오겠습니다.”

“지금 몇 시죠?”

“네 시…… 십칠 분이요.”

“그래요. 네 시 십칠 분. 아직 새벽이네요. 지금 나가 봐야 합니까?”

“네.”

이환은 그래요, 하고 추임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잠꼬대였나.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다시 잠들 것 같은데.

이환의 반응을 살피며 숨죽이고 있자, 고개를 잘게 끄덕끄덕하던 그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잠기운이 사라진 까만 눈동자가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아, 망했구나.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옷 들고 어디 가려고요.”

“실장님 깨지 않도록 밖에서 갈아입으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갈아입고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올 테니까.”

침대에서 일어선 이환이 두 팔을 위로 뻗어 쭉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실장님, 제가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급하게 가야 합니까?”

“네.”

“그러니까요.”

“……네?”

“태워 줄게요. 같이 갑시다.”

“……택시 타고 다녀올게요.”

택시비가 아까웠으나 시간이 급박하기도 했고, 새벽 시간이라 버스도 지하철도 운행하지 않았다. 돈을 떠나서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다.

“이 시간에 어떻게 해민 씨 혼자 택시 태워 보냅니까. 내 요정님을 위험하게 둘 수는 없죠.”

“이 시간에 택시 타고 다니는 사람들 많아요.”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다니다 범죄에 노출되는 사람들도 많죠. 옷 갈아입고 있어요.”

그리 말한 이환이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굳이 질문하여 확인받지 않아도, 그가 나갈 준비를 하려고 제 방으로 돌아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곤란하게 됐네.

이마를 긁적이다 어쩔 도리가 있나 싶어 일단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기다리자, 어느새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온 이환이 방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와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검은색 세단을 탔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실장님.”

“네, 해민 씨.”

“저 혼자 가고 싶어요.”

새벽에 일어나 옷까지 갈아입고 나온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으나,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다시 자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새벽에 먼 거리를 운전하고 상황을 수습하는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그의 아침 출근에 문제가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해민 씨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지만, 이번에는 안 됩니다.”

너무나도 단호한 목소리라 얌전히 내비게이션에 가야 할 경찰서를 찾았다.

“이렇게 먼 거리를 이 야심한 시각에 어떻게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 했어요?”

위치를 확인한 이환이 차를 출발시키며 혼을 내듯 말했다. 나는 조수석에 얌전히 찌그러졌다.

“무슨 일이라고 말 안 하던가요?”

“…….”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같이 들어가기 싫다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 줘요.”

“엄마가 거기 있대요.”

딱히 비밀은 아니었다. 치부라면 치부일 수 있겠으나, 어차피 그가 내 상황을 모르지도 않고 이 이상 초라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바닥이었으니까.

“해민 씨 어머니가 계신다던 병원과는 꽤 먼 곳인데요.”

“아버지 납골당이 그 근처거든요. 무작정 택시를 탔나 봐요. 택시비를 안 내고 내려서 운전기사가 신고하는 바람에 지구대로 모셔 왔대요. 병원 쪽으로 연락하고, 보호자 연락처를 받아서 저한테 전화한 거라고. 병원 측 사람도 온다고 했으니까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죠.”

쿡쿡 쑤시는 눈두덩을 손으로 문질러 비비며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 말이 없던 이환이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후로 딱히 말을 걸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조용히 상황을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엄마는 왜 오늘 이 시간에 병원을 나왔을까. 경비가 느슨한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병원을 나올 수 있었을까. 택시는 어떻게 탔을까. 아버지 납골당의 주소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택시 기사는 무슨 생각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이동했을까. 엄마는 왜 아버지 납골당에 가려고 했을까.

엄마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를 제외하면, 경찰서에 도착하면 알게 될 의문들이었다. 내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고민해 봤자,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고민을 하든 안 하든 경찰들이 알아서 정황 조사를 끝내 두었겠지.

그냥 만사가 귀찮고 피곤했다.

이 새벽에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새벽의 도로를 달려 경찰서를 향하고 있는 거지. 왜…… 엄마는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거지?

왜.

왜.

왜 가만히 죽어 주지 않는 거지?

“해민 씨?”

“네?”

“잠들었었나 보네요. 도착했습니다.”

상념에 빠져 있었나. 아니, 잠들었던가.

눈을 뜨자 환하게 불이 밝혀진 지구대가 보였다. 차에서 내리자 따라 내린 이환이 다가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강아지처럼 물기 어린 까만 눈동자가 같이 들어가면 안 되냐는 바람을 꾹꾹 눌러 담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지구대에는 우리보다 한발 일찍 도착한 병원 관계자가 경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대 안으로 들어서는 나와 이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서해민 씨?”

“저요.”

이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는 듯한 부름에 손을 들어 답해 주자, 경찰이 나를 엄마에게로 안내했다.

“아니이, 올 사람 다 온 것 같은데. 차비는 그래서 누가 주는 거냐고! 새벽 장사 공칠 일 있어? 대체 몇 시간째요, 몇 시간째.”

“그러게 돌아가 계시면 연락드린다니까…….”

“뭐 믿고 돌아가.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가 나온 줄 알아, 이 양반아?”

“선생님, 진정하세요.”

“진정 말고 돈 달라고! 누구야, 저 여편네 아들이라는 놈이!”

엄마와 택시 기사, 지구대 순경들, 병원 관계자와 우리까지. 복작복작한 지구대 안에 한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택시 기사입니다. 아무래도 저쪽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엄마에게 안내해 주던 순경이 곤란한 투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네.”

지구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엄마를 내려다보고 택시 운전기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나보다 이환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는 차비가 얼마인지 묻고, 새벽 손님을 받지 못해 손실이 얼마인지 아냐는 택시 기사의 생떼에 수표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실장님.”

“어머니는 보고 왔습니까.”

“네. 택시비가 그렇게 많이 나왔대요?”

내 물음에 수표를 황급히 주머니에 집어넣은 택시 기사가 헹,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지구대를 나가 버렸다. 누가 붙잡지는 않을까 급한 걸음으로 나간 택시 기사는 지구대 앞에 세워 둔 택시에 올라타 빠르게 꽁무니를 감추었다.

황망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이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별다른 변명 없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사소한 일에 힘 뺄 것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죠.”

그렇게 말한 이환이 내 어깨를 감싸 순경들과 병원 관계자를 향해 다가갔다.

병원 측에서 하는 말은 별것 없었다.

새벽 시간에 엄마가 짐가방을 들고 병원을 나갔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화장실이 급했던 경비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지만, 애초에 병원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뻔히 보이는 변명이었지만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을 나와 길을 걷다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고 추정하는데, 엄마가 병원복이 아닌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라서 택시 기사도 별 의심을 안 했다고 한다. 그러다 납골당에 도착해서 택시비를 계산하지 않고 짐가방마저 두고 내리려는 엄마와 실랑이를 하고, 또 그러다 경찰을 부르고.

결국 다 같이 지구대로 오게 되었지만, 잠시 멀쩡하던 엄마는 다시 치매 환자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짐가방 안의 물건으로 신원 확인이라도 해 보자 하다가 가방 안에서 병원복을 발견한 뒤 병원에 연락.

실종된 환자를 찾겠답시고 병원이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었다는 병원 관계자의 엄살은 뒤로 미뤄 두고서라도 내게까지 연락이 닿은 건 정말 다행이라고 했다.

다행.

무엇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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