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89)화 (89/172)
  • 89화

    “크흠, 뭐,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데. 분위기가 너무 우수에 차 있었나요?”

    뽕을 집어넣은 것처럼 비쭉 솟은 어깨를 모른 척하며 대충 네에, 하고 답을 했다.

    “그냥 좀,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어서요. 집에 오기 전에 털어 냈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해민 씨는 오늘 별일 없었나요?”

    “네, 저도 평소랑 같은…….”

    집에서 하는 일이야 항상 비슷하지. 특별한 일이 있을까.

    오늘이나 어제나, 언제나 똑같다고 말을 하려다 문득 낮의 일이 생각났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웃을 만한 이야깃거리라는 생각에, 오늘은 특별히 서비스한다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낮에 좀 웃긴? 아니, 웃기는 일은 아니고. 이상한? 그런 경험 했어요.”

    “이상한 경험이요?”

    “네. 여사님이랑 장 보러 시장 다녀왔거든요.”

    정장 입은 커플의 막장 스토리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정장 입은 여성의 첫 등장을 빼놓을 수 없어서 자전거와 충돌할 뻔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도를 아십니까’나 ‘조상 복이 많으시네요’를 의심했는데, 자꾸 커피 한 잔만 같이 마시자는 거예요. 진짜 친해지자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나한테 수작 걸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친화력이 남다른 사람인가 싶고.”

    “이유가 없긴 왜 없습니까.”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환이 갑자기 화를 냈다.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상냥하고, 완벽한 사람인데. 누구라도 보면 다 수작 걸고 싶죠.”

    거기에 동의하기엔 이십 년을 너무 멀쩡히 지내 왔다. 아니, 마냥 멀쩡하게 지낸 건 아닌가.

    인력 사무소나 공사판 아재들이 추근거리기는 했지만, 그건 수작보다 그냥 성희롱에 가까웠다. 여자나 곱상하게 생긴 어린놈들을 보면 ‘나이 먹은 남자’라는 자부심으로 어떻게든 찍어누르려 하던 쓸데없는 쓰레기들.

    화를 내고 지적하면 유난스럽게 군다면서 되레 더 화를 냈다. 그럴 때는 꼭 ‘딸 같아서 그래.’ 혹은 ‘사내새끼가 말이야.’라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현장에 들렀던 사무직 이십 대의 여자들은 울면서 돌아가기 일쑤였고, 공사장에 일하러 온 젊은 사내들은 더럽고 치사하다고 치를 떨며 일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모든 아저씨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만 있어도 물은 흐려지기 마련이고,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누구 하나 선뜻 하지 말라고 말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민 씨?”

    “네?”

    “잠깐 멍하기에.”

    “아, 딴생각했나 봐요.”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 차리는 나를 본 이환이 작게 웃었다.

    “그거 압니까? 해민 씨는 꼭 칭찬해 주면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해요.”

    “저랑 어울리지 않는 칭찬이잖아요.”

    “왜 어울리지 않아요. 귀여운 것도 사실이고, 예쁜 것도 사실이고, 사랑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상냥한 것도 사실인데.”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사람의 기준, 가치관, 취향, 호불호 역시 다르기 마련이니까. 이환의 기준도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다만 그 기준으로 나를 칭찬하지만 않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같이 커피 마셔 줬습니까?”

    “아뇨. 곤란하던 차에 그 사람 애인이 왔거든요. 그런데 그 애인이 자전거 넘어질 때 박스에 깔렸던 그 여성분이었어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 짧은 시간에 얼굴이라도 외웠습니까?”

    “천재도 아니고 스쳐 지나간 사람 얼굴을 어떻게 기억해요. 그 시간에 시장에 정장 입고 오는 사람이 드물잖아요. 옷차림도 그렇고, 결정적인 이유는 그 여자분 머리에 멸치가 꽂혀 있었거든요.”

    이환이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정장. 그걸 생각 못 했네요.”

    “근데 그 남자도 정장 차림이라, 정장 입고 시장 구경 나온 커플인가 보다 싶었어요. 특이하지만 그래서 커플인가 싶고.”

    “이상한 커플이네요. 엮여서 고초를 겪은 건 아닙니까?”

    “그 남자가 쩌렁쩌렁하게 이름을 불러서 창피하긴 했는데, 어차피 그 시장에서 서해민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시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서해민이 누구인가 잠깐 의문이 돌긴 하겠지만, 그런 의문보다 사는 게 바쁜 사람들이다. 하루만 지나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 사람이 해민 씨 이름은 어떻게 알고요?”

    “지갑에 있는 신분증을 보여 줬거든요. 내 지갑인 걸 확인시켜 달라고 해서.”

    “계획적으로 수작을 걸었네요. 어쩌면 지갑도 그놈이 훔치고 되찾아 주는 척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 설마요. 그럼 제가 알았겠죠.”

    “누가 물건을 표나게 훔칩니까. 모르게 훔치니까 소매치기를 당하는 거지.”

    맞는 말이기는 한데, 겨우 수작 좀 걸어 보겠다고 소매치기를 하는 건 너무 능력 낭비가 아닐까. 그 정도로 남모르게 훔칠 기술이 있다면, 차라리 돈 많아 보이는 사람들의 지갑을 훔치는 게 시간 대비 효율이 높지 않을까 싶은데.

    “요즘은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어서 지갑을 훔쳐 봤자 돈이 안 될 겁니다.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만들어서 신뢰를 쌓고 사기를 치거나 급하다고 돈을 빌리는 수법이죠.”

    “아하.”

    그런 거 티브이에서 많이 봤는데. 하마터면 그런 일을 내가 겪게 될 뻔했다. 그래 봤자 뜯길 돈도 없었을 테지만.

    “아, 그런데 커플이 아니고 부부 같기도 했어요. 집에 아이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웃긴 게 남자는 모르는 여자라고 막 욕하고 발뺌하고.”

    “저런. 아주 쓰레기 같은 놈한테 걸릴 뻔했습니다.”

    그런데 사기를 치려면 보통 사는 곳 근처는 피하지 않나. 언제 아는 사람을 만날지 모르는 게 동네인데. 게다가 여자와 만날 약속도 하고 나왔다던 사람이 동네 주민일지도 모를 사람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다? 좀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다.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놈이 이상한 놈이었던 겁니다. 이상한 놈한테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사람도 이상하긴 한데요. 상황도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세상이 정상은 아니죠.”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마무리 지어도 되는 이야기인가.

    문득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이환이 한숨을 토해 냈다.

    “해민 씨가 너무 순진해서 걱정이네요. 혼자 두기가 너무 걱정됩니다.”

    “제가요?”

    “네. 사기꾼이 분명한 놈인데도 모르잖아요.”

    사기꾼이 분명하긴 한 건가. 남자가 이상한 사람이긴 했는데, 사기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 않나. 아니, 딱히 사기꾼이 아닐지라도 좋은 의도로 접근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애초에 좋은 의도였다면 그렇게 수상하게 접근할 이유도 없고.

    확실히 오늘 일은 내가 부주의한 게 맞다며 반성을 했다.

    “맞아요. 제가 오늘은 좀 허술했어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 경계심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모르는 사람이 접근하면 일단 경계부터 해야 하는데, 해민 씨는 너무 착해요. 그래서 내가 항상 걱정입니다.”

    밑바닥에서 고생하며 구른 만큼 인간 불신은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이환은 나보고 순진하고 착하다고 말한다. 오늘은 내가 어리바리하게 굴었던 게 맞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내놓기 무서울 정도로 순진한 것은 아닌데. 이환의 머릿속 나의 이미지는 세 살배기 아이와 동급인가.

    “누가 웃으면서 접근한다고 해도 일단 경계부터 합시다. 세상에 이유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장님은 처음부터 이유 없이 잘해 주셨잖아요.”

    “이유가 왜 없어요. 해민 씨가 나를 구해 줬고, 내가 해민 씨한테 반했으니까 너무 좋아서 잘해 준 거지.”

    이보다 더 합당한 이유가 또 있냐며 이환은 당연함을 주장했다.

    “앞으로 누가 웃으면서 다가오거나 이유 없이 잘해 주면, 일단 신상부터 파악하고 나한테 연락해요. 내가 먼저 조사해 본 뒤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려 주겠습니다.”

    “……네?”

    “요즘은 세상이 팍팍해서 그런지 사기꾼이 너무 많아요.”

    “저는 사기당할 돈도 없는데요.”

    “해민 씨. 사람은 몸뚱이만 있으면 돈 만들 방법이 아주 많아요.”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진득이 바라보는 눈동자는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네에.”

    “누가 사탕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요.”

    “그 수준은 일찌감치 졸업했어요.”

    “졸업이 어디 있어요? 나이 여든 먹어도 조심해야 합니다.”

    사탕을 그때까지 조심해야 해?

    어이없는 마음에 눈을 흘기며 헛웃음을 뱉었으나 이환은 진지하기만 했다.

    ∞ ∞ ∞

    드르르르륵. 드르르르륵.

    나무판을 잘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소리에 퍼뜩 놀라 눈을 떴다.

    어둑한 새벽.

    혼자 자기엔 넉넉하지만 성인 남자 두 사람이 자기엔 버거운 더블 사이즈의 침대에 모로 누워 나를 감싸 안고 있는 남자의 팔을 살며시 걷어 냈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온 뒤, 이환은 겁을 주었던 것과 달리 나를 찾아와 섹스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종종 새벽에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와 나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런 날 아침에는 늘 멋쩍은 얼굴을 하고 귀밑을 붉히며 제 욕실로 꽁무니를 뺐다.

    “잘 때는 이런 얼굴이었네.”

    인상을 쓸 때마다 찌푸려지는 미간의 주름도 없고, 웃을 때마다 휘어지는 입술도 잠잠하다. 그저 아이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동안 잠시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울렸다. 작은 소리라 생각한 건 잠결이었던 모양인지, 고요한 침실에 울리는 진동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이환이 깨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조용히 방을 나와 문을 닫고 전화를 받았다.

    ―서해민 씨?

    “네. 누구세요?”

    잘못 걸린 전화도 아니고, 정확히 내 이름이 들려왔다. 웬만한 용건이라면 해가 뜬 뒤에 전화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새벽 네 시에 걸려 온 전화는 그만큼 중요성과 불길함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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