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형이랑 형 친구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단호할 정도로 냉정했다. 냉정한 말인데도 그 말을 하는 이환의 표정이 뾰로통해서,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나왔다.
“실장님 친구분들은 어때요?”
“끼리끼리 노니까 내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성격이지 않겠습니까.”
화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이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환과 비슷한 사람들이라.
상냥하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면서…… 순수한 삼십 대인가. 요정과 산타클로스를 믿는, 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개인의 취향일 뿐, 성격에 속하지 않는다. 이환의 순수함이 동심 쪽으로 개발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딴 방향으로 순수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럼 다들 친절하시겠네요.”
“있다면 그럴 겁니다. 친구가 없어서 확실히 모르겠네요.”
“…….”
아무래도 요정과 산타클로스를 믿는 동심이 순수함의 일부가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그게 전부였는지도 모르겠어.
뒤늦은 깨달음에 탄식하며 말을 아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이환이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침착해 보여서요.”
혹시라도 속으로 생각했던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나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 그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요정님이 예지력도 가지고 있었나요?”
“부회장님 친구라는 분이 하는 말을 일 분 정도만 들으면 누구라도 그런 안 좋은 예감이 들 것 같은데요.”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 ‘아, 뭔가 안 좋은 일이 터지겠구나.’ 하는 예감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극딜을 당한다면 ‘안 좋은 일을 내야겠군.’ 하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공포의 주둥아리였다.
예지력이 없어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말에 이환이 낮게 목을 울려 웃었다. 슬그머니 올라온 손이 내 어깨를 감싸고 마치 칭찬하듯 톡톡 두어 번 두드렸다.
“내가 너무 과했습니까?”
농담이 짓궂은 선을 넘어 기분 나쁘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사람을 죽일 듯이 팬 건 너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농담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렸다면, 내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을 공격했다면.
“이번 상황에서는 충분히 때릴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편 들어 주는 거예요?”
“그냥,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요정님이 내 편을 들어 주니 힘이 나네요.”
“편들어 준 거 아닙니다.”
“편들어 준 거 맞는데?”
조금 전까지 사람을 너덜너덜하도록 팬 이환은 어느새 어린 사내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나를 골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 극명한 차이가 신기하고 어색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아, 배고프다.”
“여사님이 기다리시겠어요.”
“그러게요. 별 용건도 없이 시간만 낭비했습니다. 내가 이래서 형이랑 엮이는 걸 안 좋아해요.”
별 볼 일 없는 놈을 만나서 별 볼 일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투덜거린다. 이환의 불평을 흘려듣다 문득 ‘이정이 꿀차를 가져가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가는 길에 안 챙겨 줬지? 그냥 말뿐이었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
“왜요?”
“꿀차.”
“꿀차?”
“부회장님이 꿀차를…….”
안 챙겨 주셔서요, 라고 말을 하려다 자꾸만 혀끝에 맴도는 ‘꿀차’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가 부회장님과 같이 있을 때 꿀차를 마신 적이 있었나요?”
“…….”
이정을 처음 만났을 때 마신 차는 아이스티였다. 이정이 탐내던 것을 뺏어 와 내 손에 쥐여 주고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이환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환의 가족 식사 자리에 곁다리로 끼어 참석했을 때도 밥만 같이 먹었다. 이환과 따로 빠져나와 정원을 산책하며 커피를 마시긴 했지만 꿀차는 구경해 본 적이 없다.
호텔 개관식 때에는 배치되어 있던 샴페인을 마셨고, 운전면허 발급받았던 날에는 이정과 차에서 잠깐 대면했을 뿐이다.
애초에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몇 번의 만남을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몇 번의 만남에서 꿀차를 마신 기억은 결코 없었다.
「저번에 해민 씨가 맛있게 마시는 거 보고, 미리미리 좋은 놈으로 준비해 두라고 했지.」
그런데 이정은 어떻게 내가 꿀차를 맛있게 마셨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했을까.
“언제 마셨던 모양이죠.”
“안 마셨는데요.”
“잘 기억이 안 날 수도…….”
“적어도 부회장님과 같이 있을 때 마신 적은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환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꿀차는 호불호가 거의 없으니까, 당연히 좋아하겠거니 했겠죠. 내려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며 이환이 차를 세워 둔 지하 주차장에 내려섰다.
단순히 좋아하겠거니 생각해서 말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는데. 보았거나 들었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잘 마실 걸 안다는 확신이 있는 말투였다.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으나 계속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기엔 사소한 일이기도 했다.
그깟 꿀차가 뭐라고. 심지어 챙겨 가져가라던 꿀차는 받아 오지도 못했는데.
얼룩처럼 흐릿한 찜찜함을 묻어 두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환의 뒤를 따랐다.
∞ ∞ ∞
운이 좋은 날이 있다.
로또 1등에 당첨된다거나 알지도 못했던 부유한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는 등, 인생이 뒤바뀔 정도의 큰 행운은 아니지만, 마트에서 하나 남은 세일 상품을 발견하거나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샀는데 사은품으로 음료수가 주어지는 등의 예상치 못한 소소한 운이 따라붙을 때가 그러하다.
운이 나쁜 날이 있다.
눈앞에서 타야 하는 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치거나 인력 사무소에서 두 시간 넘게 대기하고서도 일감을 받지 못해 하루를 공치거나 의도치 않은 실수로 하루 일당을 날릴 때 ‘재수가 옴 붙은 날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오늘은 특별히 운이 좋은 날도 아니었고 운이 나쁜 날도 아니었다. 오늘은, 그저 이상한 날이었다.
여사님과 장을 보러 나갔을 때였다.
여사님은 마트에서 배달을 시키기보다 시장을 둘러보며 직접 장 보는 것을 선호하셨는데, 시장 초입에서 여사님의 지인을 만났다. 지난번 추석 때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던 친구분이었다.
엄청 반가워하며 장을 보기 전에 차 한 잔 마시자고 여사님과 나를 근처 카페로 이끌었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다 대화에 끼기도 뭐한 분위기인지라 멀뚱멀뚱 옆에 앉아 있다가 먼저 장을 보고 있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하며 같이 나가자고 일어서는 여사님을 도로 앉히고 친구분과 편히 말씀 나누시라고, 시장 구경하면서 몇 가지만 먼저 사 두겠다고, 신선도가 중요한 식재료는 여사님의 검수가 필요하니 나중에 꼭 확인해 달라는 농담까지 덧붙였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혼자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양옆으로 물건을 늘어놓은 가판대, 오가는 사람들, 그 사이로 짐을 싣고 달리는 자전거. 혼잡한 시장 골목을 헤집으며 오늘 사야 할 물건들을 찾고 있는 내 옆으로 박스 대여섯 개를 겹쳐 싣고 오던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어이쿠.”
자전거가 넘어지며 그 박스가 내게로 쏟아졌다면 엄청 불운한 일이 되었겠으나, 갑자기 뒤에서 미는 힘에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나를 민 범인인지 아니면 운 없이 내 뒤에 걸어왔을 뿐인지 모를 누군가가 대신 박스에 깔렸다. 자전거를 몰고 가던 운전자도, 밀쳐진 나도, 박스에 깔린 누군가와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모두 당황한 순간이었다.
“괜찮아요?”
“네?”
넘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왜 나한테 물어.
멀쩡히 서 있는 내 팔을 붙잡으며 묻는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보다 뒤늦게 나 대신 넘어진 누군가에게로 몸을 돌렸다.
“괜찮으세요?”
“…….”
멸치를 뒤집어쓴 상태로 바닥에 넘어져 있던 사람이 눈을 끔뻑거렸다.
사람이 당황하면 고장 난 기계처럼 잠시 작동이 멈추기 마련이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넘어진 사람의 어깨 위에 쏟아진 멸치를 털어 주며 손을 내밀었다.
“괘, 괜찮습니다.”
박스 안에 담긴 것이 엄청나게 무거운 물건이 아니라 다행이다. 다만 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인 여성의 머리에 머리핀처럼 꽂혀 있는 멸치가 자꾸만 시선을 끌어당겼다.
“아저씨!”
여자는 내민 손을 붙잡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자전거 운전자를 노려보았다. 박스가 뒤집히며 여자의 위로 쏟아졌던 멸치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무것도 안 붙잡고 일어나시네. 코어 힘이 남다른 분이다.
“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안에 든 게 멸치가 아니라 다른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니, 그런 건 옆에 가는 사람이 알아서 조심을 했어야지.”
“뭐예요? 사람이 쓰러졌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고, 뭐? 알아서 조심했어야지? 이 아저씨가 말이면 단 줄 아나.”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는 미뤄 두고서라도 일단 괜찮냐는 질문부터 나왔어야 하는데, 저 아저씨도 참 경우가 없다.
멀쩡히 걸어가다가 왜 앞으로 떠밀렸는지, 누가 나를 뒤에서 떠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앞으로 밀려나지 않았더라면 상자에 깔려 넘어지는 게 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전거 운전자의 태도가 더 밉살스럽게 보였다.
“사과하실 마음이 없으시더라도 일단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는 물어보셔야죠. 이렇게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에 박스를 잔뜩 포개어 다니면서 고정도 안 한 건 아저씨 잘못이 맞거든요.”
“뭐래, 학생이 뭘 안다고 나서?”
“그, 그래요. 그쪽은 가던 길 가세요!”
마음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을 더했다가 양쪽으로 공격을 당했다.
자전거 운전자는 몰라도 여자는 내 말에 긍정할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