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큰 의미가 담기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이환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기도 했다. 질문을 받은 최대영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화, 환아. 왜 갑자기 정색을 해. 분위기 썰렁해지게. 형이 농담한 거지. 오랜만에 만나서 형이 오버 좀 했나 보다. 기분 풀어.”
그래도 상황을 살필 줄 아는 눈치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으나, 그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는 점에서는 불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들어도 되는 건가?”
예의상 붙이던 존댓말은 사라졌고, 그나마도 무미건조하던 어조는 날붙이처럼 날카롭고 냉랭해졌다.
“에이, 화났어? 형이 잘못했네.”
“형은 씨발. 형 친구라고 형님 형님 해 줬더니 네가 진짜 내 형이라도 되는 줄 알아? 오랜만에 보니까 내가 존나 만만해?”
이환의 저급하고 과격한 말투를 침대 밖에서 듣기는 또 처음이었으나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요정님에게 진심인 이환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참은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환이 동네 건달처럼 건들거리며 시비조로 물었으나, 그를 마주하고 있는 최대영은 불만보다 미약한 불안을 표정에 드러냈다. 그는 슬쩍 이정에게 도움을 청하듯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이환이 예의를 갖춰 그만해 달라고 말할 때는 무시하고 비웃더니, 면전에서 상소리를 듣자 눈치를 보고 변명을 해 댄다. 지금까지 이환의 심기를 긁으며 비웃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 내 말은 좆같아서 그냥 무시해도 된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데 왜 좆같이 굴어. 내가 씨발…….”
감정의 폭주를 참아 내듯 이환은 뒷말을 삼키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파르르 떨릴 정도로 꽉 쥔 주먹이 한계에 달한 이환의 인내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내가…… 요정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요정님이 죽는다고 했어, 안 했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감정을 추스르다 끝내 실패한 이환이 옆에 있던 소파 쿠션을 최대영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점프하듯 최대영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었고, 몇 차례의 주먹질에 바닥으로 쓰러진 그에게 발길질을 해 댔다.
“너 때문에 씨발, 오늘 당장 죽은 요정이 수십은 되겠다. 내 말이 좆같냐? 좆같냐고!”
자업자득이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댈 때부터 싸하다 싶었지.
다 큰 남자들이 뒷골목 취객처럼 때리고 두들겨 맞는 장면을 영화 보듯 멀거니 구경하며 생각했다.
문득 인사로 주먹부터 날렸다던 이환의 어릴 적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사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차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고, 어느 정도 과장 섞인 이야기일 거라고 대충 넘겼는데. 여사님이 말한 폭력적이었다던 이환의 어린 시절이 이러했을까.
커서는 점잖아지셨으나, 한가락 하셨던 본능이 여전히 유전자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봉인되어 있던 폭력 유전자를 깨워 버린 최대영을 향해 속으로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게 왜 이환을 긁어 댔어. 가만히 놔두면 세상 누구보다 얌전하고 젠틀한 사람인데.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점잖고 훌륭한 인성을 가진 사람인데, 하필이면 최대영이 이환의 역린을 건드렸다. 아니, 잡아 뜯었다. 잡아 뜯은 것도 모자라 꼬챙이로 수차례나 쑤셔 댔다.
여러모로 최대영의 무지였고, 불찰이었으며, 잘못이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 선을 이환은 먼저 경고해 주기까지 했다. 최대영은 그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미련하게 선을 넘어 버렸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배짱 좋게 선을 넘은 걸지도 모르겠다.
서른 넘은 나이에 요정님 운운하는 이환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런 이환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알면서도 굳이 낄낄거리며 자극하던 최대영도 정상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미련한 사람.
정상이 아닌 걸 느꼈으면 몸을 사려 피했어야지.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 몸을 말고 개처럼 얻어맞고 있는 최대영을 보면서도 전혀 놀랍지 않은 건, 그가 이환을 살살 긁어 댈 때부터 이 불행한 결말이 예상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런, 우리 환이가 화가 많이 났네.”
두들겨 패는 이환의 형제이고, 얻어맞는 최대영의 친구인 이정이 혀를 찼지만 곤란함이나 난처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즐기듯 약간의 보람과 뿌듯함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속삭이듯 작게 내뱉은 내 물음에 이정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우리 환이가 착해서, 사람은 안 죽여.”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구경하는 이정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니, 댁 동생 말고 저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댁 친구.
누구에게 묻더라도 날뛰는 이환보다 개처럼 얻어맞고 있는 최대영의 안위를 먼저 걱정할 텐데.
형제가 쌍으로 일반적이지 못했다.
역시 이 상황에서 정상인 사람은 나뿐인가.
“……꿀차가 맛있네요.”
돈 많은 높으신 분이 주는 꿀차라서 그런지 아주 진하고 달다. 이제껏 눈치를 보느라 방치하던 꿀차를 홀짝홀짝 아껴 마시며 중얼거리자, 크흠 하고 만족스러운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저번에 해민 씨가 맛있게 마시는 거 보고, 미리미리 좋은 놈으로 준비해 두라고 했지. 백 퍼센트 천연 유기농 로얄제리야. 몸에 아주 좋…….”
“한 잔 더 부탁드립니다.”
몸에 좋은 거는 두 번 마셔 줘야지.
반쯤 남은 꿀차를 단번에 삼키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실컷 분풀이를 해 대던 이환이 내 목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왜 그렇게 붙어 있어.”
이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곁에 다가앉아 있던 이정이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재빨리 제 자리를 찾아갔다.
“해민 씨가 꿀차 맛있대. 챙겨 줄 테니까 갈 때 가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제 형제와 나를 번갈아 보던 이환은 피 묻은 주먹을 바지 자락에 쓱쓱 닦으며 다가왔다. 터벅터벅 걸어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꿀차 맛있었어요?”
“……네.”
꿀차의 호불호보다 저기 널브러져 있는 최대영의 생사가 더 중요해 보였으나, 흥분 상태의 이환을 자극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을 듯하여 모른 척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요정은 이슬과 꿀을 먹고 산대요. 해민 씨는 정말 요정님이네요.”
저는 이슬만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라서, 밥을 먹고 삽니다만.
“요정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첫 웃음소리가 흩어져서 생겨난대요.”
“…….”
“당신은 내가 웃었을 때 태어났나요?”
이환의 물음에 어떤 답변을 돌려주어야 할지 깊게 고민했다.
그는 종종 뜬금없는 타이밍에 생뚱맞은 질문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하곤 했다.
그래도 최대한 의연한 태도로 이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계산을 해 보아도 그와 나의 나이 차이가 ‘불가능’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환의 나이 서른넷, 내 나이 스물.
내가 그의 첫 웃음에 태어났다면, 적어도 그가 열네 살 때 처음 웃었다는 말이 된다. 이환이 엄청 근엄하고 진지한 아이였거나, 그냥 개소리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인데.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었으나 현명하게도 이환의 앞에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나이가 맞지 않는데요.”
대신 치명적인 오류를 짚어 주자, 이환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웃었다.
“저런, 내 요정님이 아니었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만질 수 없는 요정보다 만질 수 있는 해민 씨가 내 곁에 있는 게 더 좋으니까.”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손등엔 어느새 말라붙은 붉은 얼룩이 꽃송이처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 ∞ ∞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네요.”
세면대에서 손을 뽀득뽀득 깨끗하게 씻어 낸 이환이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에 토라진 아이처럼 투덜거리는 모습은 평소처럼 해맑았으나, 조금 전까지 사람 하나를 죽일 듯이 패는 장면을 보아서인지 살짝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패는 이환과 아이처럼 해맑고 천진한 이환. 도저히 섞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극과 극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이환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니까 덩달아 진짜 아무것도 아닌 상황인가 싶기도 하고. 부회장님의 집무실 바닥에 너덜너덜한 상태로 방치된 최대영을 정말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가 걱정도 되고.
“정말 그냥 가도 괜찮을까요. 119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쪽팔려서 안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쯤 털고 일어나서 형이랑 커피 마시고 있을 거예요.”
“많이 다치신 것 같던데요?”
“걱정하지 말아요. 능력껏 아프면서도 병신 될 일은 없게 때렸습니다.”
그게 능력껏 되는 일인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능력껏 했다고 보기엔 너무 마구잡이로 패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광경이라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고소라도 하면 어쩌죠.”
“형이 알아서 할 겁니다.”
“부회장님 믿고 때리신 거예요?”
집안 믿고 망나니처럼 날뛰는 흔한 재벌 2세처럼, 너도 집안에서 말끔하게 뒤처리해 주리란 생각으로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때린 거냐고.
설마 하는 의심과 돈 많은 집 자식들이 다 그렇지 하는 비난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환이 그럴 리가 없다는 부정의 마음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형이 그렇게 믿을 만한 어른은 아니죠. 그저, 뒤처리는 일을 벌여 놓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는 형도 생각하고 있었을 테고요.”
조금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에 이환의 눈치를 살폈다.
이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욱해서 때린 건 이환인데 왜 일을 벌인 책임이 이정에게 있는지, 정말 이정이 이환의 말처럼 이러한 사고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
“부회장님도 그렇고, 그분도 그렇고. 성격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그런 걸 보고 ‘끼리끼리 논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