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확실히 연휴가 끝나서인지, 출근 시간이 지난 평일 오전이라서인지 길이 막히지 않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도 굳이 찾아서는 듣지 않을 클래식 음악이 함께 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휙휙 옆을 지나는 가로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가끔 이환이 던지는 말에 대꾸하며 영양가 없는 대화도 하고, 지나가다 한 번쯤 들어 봄 직한 낯설면서도 익숙한 클래식 음악을 따라 흥얼거려 보기도 하고.
운전하는 옆에서 하는 일 없이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며칠을 누워서 게으름을 부렸는데도 하품이 비죽 나왔다. 가물가물하는 눈을 손으로 부비적거리고 있자, 옆에서 이환이 “이제 경기도 들어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왔을 뿐이지만, 왜인지 거의 도착한 기분이다. 거리로 따지면 절반 조금 더 왔을 뿐이고, 수도권에 들어온 만큼 차가 밀렸으면 밀렸지 더 속도가 나지도 않을 텐데.
“바로 출근하실 거예요?”
“점심 먹고 옷 갈아입고 나가야겠죠. 밥도 안 먹고 그냥 보낼 생각입니까?”
월요일 아침부터 땡땡이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느긋했다. 보통은 밥 먹을 생각보다 얼른 출근할 생각을 할 텐데,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면 어제저녁에 일찌감치 출발했으려나.
“도착하면 점심시간이겠네요. 여사님이 시간 맞춰 식사 준비하신다고 하니, 바로 먹고 나갈 겁니다.”
“아, 여사님은 잘 쉬고 오셨대요?”
그러고 보니 휴가 내내 여사님에게 연락 한 번을 안 했다. 어디 가면 간다고 연락해야 할 사람도 없고, 안부 전화할 사람도 없다 보니 생각을 못 한 데에 가깝지만. 그래도 잘 쉬고 계시는지 안부 메시지라도 하나 보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네, 푹 쉬고 오셨답니다.”
“언제 돌아오셨대요?”
“일요일 오전에요.”
“기다리신 거 아녜요? 미리 연락이라도 해 드릴 걸 그랬어요.”
나 역시 출발이 월요일 아침이라는 이야기를 어제저녁에 닥쳐서 들은 탓에 연락이고 뭐고 할 정신도 없었다만.
“어제 통화했으니 기다리시지 않았을 겁니다. 잘 쉬고 조심히 오라고 하셨으니까 걱정 말아요.”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환이 놀고 있는 오른손을 들어 내 뺨을 툭 건드렸다. 엄지가 뺨을 쓱 문지르고 떨어졌다.
“실장님, 전화 왔는데요.”
이환의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이정’이라는 담백한 저장 명을 보았으나 모른 척하며 말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수신 거절을 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그 행동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님을 짐작게 했다.
“안 받아도 괜찮아요?”
“귀찮아서요.”
“또 오는데요?”
이환과 같은 피가 흐른다고 주장하듯, 이정은 그 뒤로도 계속 전화를 걸어 왔고 이환은 족족 수신 거절을 했다. 이정의 전화번호를 스팸 처리하지 않은 게 용했다.
“차라리 받는 게 더 안 귀찮지 않을까요. 급한 일일 수도 있고요.”
“급한 일이면 메시지를 남겼을 겁니다.”
역시 한두 번 있던 일은 아닌가 보다.
어지간히도 귀찮고 짜증이 났는지 아예 전원을 끄려던 이환은 힐끔 내 표정을 곁눈질하고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운전 중이야.”
‘여보세요’도 아니고 대뜸 내뱉은 말에 스피커폰으로 연결된 휴대폰 너머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휴라고 놀러 갔다 왔어?
“어. 그리고 운전 중이야.”
―지금 서울 올라오는 길이구나?
“응. 운전 중이야.”
운전 중이니까 빨리 끊으라는 이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정은 그저 추임새처럼 듣고 넘겼다. 끝까지 운전 중임을 어필하는 이환도 그렇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이정도 그렇고. 마치 전화를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로 신경전을 펼치던 조금 전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듯했다.
왜…… 전화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게 없지.
옆에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져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 중인데 옆에 누가 있네?
그 작은 소리를 용케 들었는지 이정이 날카롭게 물어 왔다.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하고 미안하다고 눈짓을 하자, 이환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 씨.”
―해민 씨랑 같이 갔구나?
“운전 중인데, 별 용건 없으면 끊지?”
―용건 없으면 형이 전화도 못 해?
“끊는다.”
―용건! 환아, 용건!
냉정한 이환의 말에 이정이 울부짖었다.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환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 용건.”
―대영이 입국했어.
“그게 누군데.”
옆에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럽고 피곤한 통화다.
나름의 소식을 전해 오는 이정에게 묻는 이환은 진심으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영이 기억 안 나? 최대영. 형 친구, 옆 동네 문방구 집 아들.
“몰라.”
―대영이 서운하겠네. 대영이는 너 엄청 보고 싶어 하던데.
“난 딱히 안 보고 싶은데.”
―지금 형이랑 같이 있거든? 서울 도착하면 이쪽으로 와. 점심 같이 먹자.
“해민 씨랑 같이 있어. 집에 가서 점심 먹을 거야.”
―그럼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가.
둘이 대화를 하고 있기는 한데, 대화가 통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분명히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 딴소리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우리 환이 얼굴 잠깐 보고, 점심은 따로 먹지 뭐. 기다린다.
이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이정이 전화를 뚝 끊었다. 힐끔 쳐다보니 이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부회장님 친구분이라는데, 진짜 모르세요?”
“누군지 짐작은 가는데, 별 볼 일 없는 놈입니다.”
“……문방구 집 아들이라서요?”
의외로 이정이 집안을 보지 않고 친구를 사귄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형 친구에게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딱지를 붙인 이환의 태도도 새로웠고.
“대화 물산 둘째일 겁니다.”
“문방구 집 아들이요?”
“이것저것 가져다 파는 건 같으니까요. SG에도 물산이 있어서, 옆 동네 문방구라고 형이 부르던 기억이 나네요. 형과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이정이 집안을 보지 않고 친구를 사귄 건 아니었나 보다. 대화 물산이 옆 동네 문방구 수준은 아닌데, SG 그룹에서 보면 문방구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별 볼 일 없는 놈은 아니지 않아요?”
“만나 본 적 있습니까?”
“아뇨.”
“만나 보면 해민 씨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환의 별 볼 일 없다는 기준은 집안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였나.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한낱 고용인에게도 예의를 차려 대할 정도로 점잖고 선의로 가득 찬 이환에게 밉보였을까.
이정의 친구가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래도 완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입국했다는 말을 들어 보면 외국에 있다가 한국 들어와서 부회장님을 만나러 온 거 아닐까요. 실장님도 오랜만에 얼굴 보자는 뜻 같은데.”
“친한 사이도 아니고, 해민 씨랑 같이 점심 먹어야죠. 시간 아깝게 굳이 보러 갈 필요는 없습니다.”
“전 괜찮은데. 서울 들어가서 아무 데나 내려 주시면 알아서 갈 수 있으니까,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오세요. 점심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 말에 이환이 잠깐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이환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다는 뜻을 담아서 고개를 끄덕이자 시선을 마주한 이환이 이내 눈을 휘어 웃었다.
“같이 가죠.”
“……네?”
“잠깐 얼굴만 보면 되니까 같이 갑시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해민 씨와 같이 있다고 했는데도 부른 걸 보면, 해민 씨랑 같이 와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걸 더 바랄 수도 있고.”
“왜 그걸 바라요?”
“굳이 보여 주고 싶은가 보죠.”
뭐를? 누구를? 옆 동네 문방구 집 아들을?
내가 인맥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대화 물산 아들과 만나는 자리에 동행할 이유가 있을까. 의아한 마음에 물었으나 애매한 이환의 대답에 오히려 의문만 더 늘어났다.
웃고 있는데도 왜인지 약간의 짜증이 느껴지는 이환의 얼굴을 훔쳐보며, 이환 역시도 나와의 동행이 그리 기껍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진입하여 이정이 있는 회사 건물에 당도할 때까지 먼저 집에 가 있으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
“오, 이게 누구야. 진짜 환이 맞아?”
SG 그룹 사옥의 최상층에 위치한 부회장 집무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서며 과장되게 두 팔을 벌려 이환을 맞이했다.
가볍게 포옹해 주고 몸을 떨어뜨린 이환이 내 손목을 붙잡아 소파에 앉았다. 너무나도 담백한 그의 행동에 남자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엉덩이를 내렸다.
“환이가 너 기억 안 난다잖아.”
“진짜 기억 안 나? 나 고등학교 때 가끔 너희 집 놀러 가서 너랑 놀아 주고 그랬는데.”
“아까는 농담한 거였어요. 대형이 형, 잘 지냈어요? 외국 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영이, 최대영.”
상석에 앉아 있던 이정이 이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속삭인다고 보기엔 조금 큰 목소리여서 가장 멀리 앉아 있는 내게도 들려왔다.
“그렇죠, 대영이 형.”
이환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름을 고쳐 불렀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 혹시 일부러 이름을 틀리게 불렀나 하는 의심이 생기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프로젝트 두 개 날려 먹고 이집트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직도 거기 계세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달리 심드렁한 목소리 속에 뼈가 담긴 듯해 옆에서 듣고 있기가 참으로 민망했다. 저 이야기의 대상이 나였다면 엄청 부끄럽거나 엄청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힐끔 맞은편의 남자를 살피자, 역시나 기분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