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지금까지 힘든 일도 없었는데요. 실장님도 그렇고, 여사님도 힘든 일은 전혀 안 시키시잖아요.”
“해민 씨 마음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힐링하러 온 거니까, 여기 있는 동안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늘어져 있어요.”
엄마를 보러 병원에 다녀온 뒤 지친 내색을 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일부러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걸까.
가만히 생각에 빠진 내게 이환이 와인을 따라 건넸다. 왜인지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꿀꺽꿀꺽 마시다 힐끔 눈치를 살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눈치 보지도 말고.”
원 없이 마시라는 양 단번에 비운 잔에 와인을 넘치게 따라 준다.
“너무…… 급하게 마신 것 같아서.”
“원샷을 하든 나발을 불든, 뭐라고 할 사람 없습니다. 병째 줄까요?”
어떻게 마시든 무슨 상관이냐고, 마음껏 마시라며 흔쾌히 와인 병을 건네준다. 얼결에 와인 잔과 와인 병을 양손에 쥐고 진짜로 나발을 불게 생겼다.
홀짝거리며 와인을 축내고 있자, 이환이 계기판의 버튼을 눌러 무언가를 작동시켰다. 잠잠하던 수면이 물결치며 물이 끓어오르듯 물방울이 보글보글 솟구쳐 올랐다.
손으로 물을 퍼 얼굴을 씻고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이환이 욕조 턱에 느긋하게 머리를 기댄다. 늘어져 있다는 단어를 몸소 보여 주는 이환을 바라보며 남은 와인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털어 마셨다.
이환이 마신 반 잔을 제외하면 진짜로 혼자 한 병을 다 마셨네.
쓴맛이 강하지 않고 적절한 단맛이 입에 짝짝 달라붙어 포도 주스 마시듯 마셔 버렸다. 그마저도 아쉬워 입맛을 다시며 깨지지 않게 와인 병과 잔을 욕조 너머 바닥에 내려놓았다.
단맛이 강해도 술은 술인지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손으로 꾹꾹 누르던 뺨을 욕조 턱에 기대어 문질렀다.
“실장님.”
신기한 동물 구경하듯 나를 지켜보는 이환을 가만히 불러 보았다.
“네, 해민 씨.”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나한테요?”
“네.”
“궁금하면 물어봐야죠.”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그래야 대답을 들을 수 있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 물어도 되는 질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묻지 못했다. 사실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이게 진짜 궁금한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우리는……, 아니, 실장님과 저요. 실장님과 저는…… 히트 사이클일 때만 같이 자나요?”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이환은 살짝 입을 벌린 상태로 답이 없었다.
“평소에는 안 해요? ……섹스요.”
섹스.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 단어가 어색해서 두어 번 반복해서 발음해 보았다. 섹스, 섹스. 발음을 할수록 이환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 크흠, 그건 해민 씨의 의사에 달렸죠.”
“제 의사요?”
“해민 씨가 원한다면 평소에도 할 수 있을 테고, 해민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히트 사이클 때도 하지 않을 겁니다.”
“섹스요.”
“네, ……그거요.”
잠자리에서는 이보다 더한 말도 막 내뱉으면서, 왜 섹스라는 단어는 말하기를 꺼리는지 모르겠다. 침대 위에서 이환이 내뱉는 자지라든지 구멍이라든지 하는 말이 더 야한 단어가 아닌가.
“섹스.”
“네.”
“세엑스.”
“알아들었으니 그 단어는 그만 강조합시다.”
조금 난처하고 또 조금은 곤란한 표정의 이환이 귀여웠다. 서른 넘은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이 무례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환은 아무튼 귀여웠다.
“해민 씨. 혹시 취했습니까?”
“취한 건 아니고요. 그냥 조금…… 용감해진 것 같아요. 거침없어진 건가.”
“그게 취한 거 아닐까요.”
“만취는 아니고요. 텐션이 살짝 높아졌어요.”
스스로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을 내렸다. 이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실장님.”
“네.”
“저 질문 또 있어요.”
“…….”
지금의 상황에서 질문을 허용하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일까. 그러한 고민이 이환의 얼굴에 드러났다. 눈을 끔뻑거리며 빤히 바라보자 힘없이 헛웃음을 흘리며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어보세요.”
“왜 실장님은 먼저 하자고 안 해요? 섹스요.”
내 물음에 이환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실장님이 먼저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환의 러트 사이클과 내 히트 사이클이 겹쳐서, 어찌어찌 얼렁뚱땅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고. 두 번째는 페로몬 자극제를 먹어서 끙끙 앓고 있는 이환에게 내가 찾아갔다. 세 번째는 히트 사이클이 와서 내가 또 이환을 찾아갔지.
생각해 보니 진짜로 이환이 먼저 나를 찾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주면 먹지만 안 주면 굳이 찾아 먹지는 않는 그런 상황인가. 그럼 나는 딱히 찾아 먹을 만큼 맛있지 않은 음식에 속하는 건가. 음식과 비교하기엔 좀 무리인가. 그럼 생필품?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도 딱히 어려움이 없는…… 마늘 프레스?
마늘 빻는 기계와 내가 과연 동급인가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하다가 찰박찰박 물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실장님, ……저랑 안 하고 싶어요? 섹스요.”
“일단 그 단어는 금지입니다. 굳이 질문할 때마다 끝에 붙여서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듣습니다.”
“언제까지 금지인데요? 평생?”
“평생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오늘은 금지입니다.”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했으나 이환의 탄압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는 재차 확인시키듯 “금지예요!” 하고 강경하게 말했다.
“내가 해민 씨를 찾아가지 않는 건……. 일단 내가 먼저 해민 씨를 찾아가기엔 나 스스로가 너무 파렴치하게 느껴지고, 한 번으로 끝낼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한번 해민 씨 방문을 열게 되면 그 뒤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찾아가게 될 것 같아서.”
“히트 사이클이나 러트 사이클이 아닐 때도, 평소에도 저랑 하고 싶으세요? 그, 짝짓기요.”
내 물음에 이환이 마른세수를 했다.
“짝짓기도 금지입니다.”
“왜 다 금지예요?”
“일단 오늘은 말하지 말아 봐요. 그냥 ‘그거’라고 합시다.”
오늘따라 이환이 까다로웠다. 여기서는 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놓고 정작 말하는 건 자유롭지가 못했다.
“‘그거’, 평소에는 안 하고 싶어요?”
“그럴 리가요.”
“하고 싶어요?”
“……네.”
“그럼 평소에도 하고 싶은데 참는 거예요?”
“계속 질문할 겁니까?”
“네.”
이환이 힘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뒤로 젖혀 뒤통수를 욕조 턱에 기댔다. 그의 표정 대신 들어 올린 턱만 보였다.
“실장님.”
“잠시만 이렇게 있어도 될까요.”
“왜요?”
“조금 피곤해져서, 아니, 아닙니다. 해민 씨가 이렇게 솔직하게 질문할 일이 많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내가 복에 겨웠네요. 물어보세요. 또 뭐가 궁금합니까.”
복에 겨운 사람치고 진이 빠진 얼굴이다.
“대답 안 하셨는데.”
“무슨 질문이었죠?”
“평소에도 하고 싶은데 참는 거냐고요. 그거요.”
“네, 참습니다. 나이 먹은 놈이 인내심이라도 있어야죠.”
반쯤 포기 조로 내뱉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가만히 마주 앉아서 문답을 나눴을 뿐인데, 왜 갑자기 지친 얼굴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도 하고 싶을까요.”
“……알아맞혀 보라는 퀴즈 같은 겁니까?”
“아뇨. 그냥…… 궁금해요. 평소에도, 히트 사이클이 아닐 때에도 기분이 좋을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이제까지 내가 기분 좋았던 게 페로몬의 영향인지, 아니면 진짜 ‘그거’가 기분 좋았던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내내 성실히 답을 주던 이환이 이번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그는 섣불리 입을 여는 대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 속에 담긴 다정함이 익숙해서 웃음이 나왔다.
“실장님.”
“네.”
“오늘 밤에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실장님이 저한테 와 주세요.”
“실험이라도 해 볼 생각입니까?”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기분이 좋은지 알고 싶어요.”
“이렇게 취해서는 모를 것 같은데요.”
“안 취했는데.”
“아주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걸 보면 취했습니다. 만취 상태는 아니지만, 정상도 아닙니다.”
기분이 살짝 상기되기는 했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평소보다 거침없긴 하다. 이러면 정확하게 알 수가 없나.
다리를 구부려 끌어안고 턱 끝으로 무릎을 꾹꾹 누르며 고민했다.
“실장님.”
“네.”
“그거는 꼭 저녁에만 하고 싶어요? 아침에는 안 하고 싶어지나요?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것 같은데.”
나름대로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을 들은 이환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해민 씨는 이만 자야겠네요.”
“저 아직 안 졸린데요.”
“못다 한 문답은 자고 일어나서 합시다. 자고 일어나서도 해민 씨에게 질문할 용기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고 일어나면 확실히 대답해 주겠습니다.”
왠지 귀찮으니까 재우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항변하려 했으나 나를 달랑 들어 욕조 밖으로 꺼낸 이환이 커다란 수건으로 내 몸을 돌돌 말아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실장님.”
“이제 자러 갈 거니까 질문은 그만합시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지금 취급이 요정님보다 짐 덩이에 가까운 것 같아요.”
내 지적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옆구리에 끼어 있는 탓에 들썩거리는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러게요. 내가 요정님 대접에 소홀했네요. 미안합니다.”
얌전히 나를 내려놓은 이환이 사과의 말을 전해 왔다. 그러고는 등과 오금 아래에 손을 받쳐 덥석 안아 들고 개선장군처럼 힘차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공주님 자세로 누군가에게 안겨 이동되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달랑달랑 발끝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기분이 매우 침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