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79)화 (79/172)
  • 79화

    “수돗물에서도 요정이 살아요?”

    문득 든 의문에 묻자 이환이 잠시 침묵했다.

    “……해민 씨는 남들이 무심코 넘기는 사소한 것에도 관심이 많군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였으나 얼핏 당황한 표정을 본 듯하다.

    이환이 요정님에 관해 당황할 때도 있구나.

    고용주의 당혹스러운 심경을 너그러이 모른 척하며 주변을 구경하는 시늉을 했다.

    “1층은 전부 거실인가 봐요. 뻥 뚫려 있네요.”

    주방, 식당, 거실, 티 테이블이 있는 휴식 공간이 전부 나뉘어 있던 집과 달리 별장은 구역의 경계가 없었다. 정중앙에 졸졸졸 물이 솟아오르는 인공 연못이 있고, 한쪽에 주방, 근처에 테이블, 창가 근처에 침대처럼 넓은 소파가 드문드문 놓여 있을 뿐이었다.

    “가족들이 어디에 있든지 한눈에 보이길 원했거든요.”

    한 달에 한 번 가족 식사 모임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지금의 이환과 달리 어릴 적 이환은 가족을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짐 올려다 놓고 저녁부터 먹을까요?”

    냉장고를 열어 본 이환이 재료는 충분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안내해 주겠다며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뒤를 따랐다.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여사님이 해 두신 불고기부터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여기 몇 년에 한 번씩 오신다더니, 냉장고에 식재료가 있어요?”

    “관리인이 있어요.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해 두어서 장을 봐 두었을 겁니다.”

    “아아.”

    “해민 씨는 이쪽 방. 캐리어만 두고 나와요.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제가 얼른 밥 할게요.”

    방문을 열고 캐리어를 대충 밀어 넣었다.

    불고기는 양념이 되어 있으니 제일 급한 게 밥이다. 반찬은 적당히 있으려나. 반찬도 좀 챙겨 올걸.

    뒤늦게 후회하며 밥할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나를 붙잡은 이환이 느긋하게 손을 마주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괜찮아요. 즉석밥 먹으면 됩니다.”

    “……실장님도 그런 거 드세요?”

    “먹을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요? 해민 씨는 즉석밥 안 먹습니까?”

    “아뇨. 저보다는 실장님이……. 실장님은 갓 한 밥만 드실 것 같아서요.”

    “거의 그렇기는 하지만, 그거야 여사님이 식사를 차려 주시니까. 여사님 안 계시면 나도 남들처럼 라면 끓여 먹고 배달 음식 시켜 먹고 그러지 않을까요.”

    이환에 대해 알아 갈수록 재벌가 자식답지 않게 참으로 까다롭지 않은 남자라고 느꼈다. 의외로 까다롭지도 않고 소탈한 면도 있, 아니, 소탈하지는 않다. 그냥 까다롭지만 않을 뿐이다.

    여하튼 재벌가의 자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던하고 번듯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동심만 조금 자제하면 진짜 완벽할 텐데. 하다못해 요정을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속으로만 생각하면 참 좋을 텐데.

    “왜 그렇게 봅니까?”

    냉장고에 넣어 둔 불고기 통을 꺼낸 이환이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안타까워서요.”

    “네?”

    “네?”

    “하하, 뭐가 그렇게 안타까워요?”

    나도 모르게 속내를 말해 버렸나 보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이환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으나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즉석밥을 먹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미안합니다. 내일은 꼭 밥을 해 줄게요. 해민 씨가 즉석밥을 싫어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대충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였는데, 오히려 이환이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그래도 나름 여러 종류를 사다 놓으셨네요. 백미밥, 현미밥, 흑미밥, 잡곡밥. 오, 약밥도 있습니다. 해민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

    즉석밥이 쌓여 있는 찬장 앞에 나를 세워 놓고 결정권을 준 이환이 불고기를 팬에 덜었다.

    비싸서 사 먹을 생각도 안 하던 즉석밥이 이런 취급을 당하는 날도 있네.

    어이없는 마음에 웃다가 불고기를 볶는 이환을 만류했다.

    “실장님. 제가 할게요. 앉아 계세요.”

    “아닙니다. 휴가 온 거니까 해민 씨야말로 편하게 있어요.”

    “그래도 제가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즉석밥은 골랐습니까?”

    “아직…….”

    “얼른 골라서 렌지에 돌려요. 도와주고 싶다면 야채 좀 씻어 주고요.”

    같이 준비합시다, 라며 결코 팬을 넘겨주지 않으려 하는 이환에게 밀려났다. 어쩔 수 없이 즉석밥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리고, 야채를 꺼내 씻었다.

    “오늘은 저녁 먹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쉽시다. 대신 내일은 하루 종일 물놀이하면서 바비큐 구워 먹죠.”

    “물놀이요?”

    “앞에 수영장에서.”

    “……저 수영 못하는데.”

    “수영을 못해요?”

    “네.”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이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딱히 수영을 배울 일이 없었다. 동네 목욕탕을 제외하고 물에 들어갈 일도 없는데 수영은 무슨. 남들이 한 번씩은 가 봤을 해수욕장에도 가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수영장도 안 가 봤다.

    정말 물에 들어갈 일도, 기회도 없었네.

    “내가 가르쳐 줄게요.”

    “가라앉을 것 같은데요.”

    “해민 씨는 가벼워서 물에 둥둥 뜰 것 같은데?”

    무게와 상관없이 부력의 문제가 아닐까 싶지만, 대충 무시했다. 어차피 이환도 과학적 근거에 따른 대답을 원하고 내뱉은 개소리는 아닌 듯 보였으니까.

    “수영장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아서 빠져 죽을 일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농담처럼 내뱉은 이환의 말이 의도치 않게 위안을 주었다.

    ∞ ∞ ∞

    저녁 식사 후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더니, 이환은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시관이나 상황실에서 볼 법한 커다란 LED 화면에 영화를 틀어 놓고 러그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시간을 보냈고, 해가 완전히 떨어져 어두워지자 몸이나 잠깐 담그자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수영은 내일 하자더니 왜 밖으로 데리고 나갈까 의아했는데, 앞마당 한쪽에 설치된 데크 위에 커다랗고 둥그런 욕조가 보였다.

    “욕조가 밖에 있네요?”

    분수는 집 안에 있더니, 정작 욕조는 집 밖에 있네.

    어린 이환의 상상력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뭐든 뷰가 중요한 법이거든요.”

    이환이 버튼을 누르자 욕조 안으로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괜히 한강 뷰가 비싼 게 아니죠.”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뷰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나 보다.

    별장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보며 자연을 한껏 느끼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동감하기엔 어려워서 선뜻 욕조 안으로 들어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제가요?”

    “네. 수건 좀 가지고 오겠습니다.”

    욕조 앞에 나를 덩그러니 세워 두고 이환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콸콸 쏟아지던 물이 어느 수준에 이르러 저절로 멈추었다. 둥근 욕조 안에 찰랑찰랑 흔들리는 물을 보며 과연 이 안에 옷을 입고 들어가도 되는지 아니면 옷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지, 마지막 보루로 속옷을 입고 들어가도 괜찮을지 치열하게 고민했으나 정답은 알지 못했다.

    “해민 씨? 왜 안 들어가고 그렇게 서 있어요?”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온 이환이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 두며 물었다. 바구니 안에서 와인 병과 와인 잔 두 개를 꺼내 욕조 가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모양새가 아직까지 내가 멀뚱멀뚱 서 있는 이유를 찾고 있는 듯했다.

    “옷을 어디까지 벗어야 할지 고민 중이라서요.”

    솔직한 대꾸에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마치 시범을 보이듯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졌다. 가볍게 입고 온 티셔츠와 면바지가 땅으로 떨어지고,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아무리 사유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야외인데, 벗는 행위에 거리낌이 없다. 너무나 당당하여 오히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걸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벗고 들어갈까요, 입고 들어갈까요?”

    유일하게 남은 브리프의 허리 밴드에 손가락을 걸치고 이환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같이…… 들어가나요?”

    “그럼요.”

    SG 그룹 오너 가족의 별장에 멋대로 들어올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완전히 알몸이 되기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입고 들어가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나 남은 속옷마저 시원하게 벗어 버린 이환이 보란 듯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배신당한 사람처럼 이환을 보고 있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물을 튀겼다.

    “내키지 않으면 입고 들어와도 됩니다. 정해진 건 없으니 뭐든 해민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신발을 신고 들어와도 괜찮다는 말에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졌다. 옷 하나 벗는 것으로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내가 순간 바보 같아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커다란 나무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다. 저 나무들 너머 실제로 높은 담도 존재한다. 이곳에 멋대로 들어올 사람도, 멋대로 훔쳐볼 사람도 없다. 이환의 말처럼 무엇이든 해도 좋을 공간이었다.

    “벗고 들어갈게요.”

    내 말에 이환은 손가락을 튕기며 한 차례 더 물을 뿌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이환의 옷을 집어 욕조 옆에 있는 선베드에 걸쳐 놓고, 내 옷도 벗어 나란히 올려놓았다. 벗은 속옷을 아무렇게나 두기가 부끄러워 옷 사이에 구겨 넣고,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욕조로 다가갔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와요.”

    내민 손을 붙잡고 욕조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적당히 따스한 물 온도에 거부감 없이 몸을 담갔다.

    “발 쭉 뻗어요.”

    웅크리고 있는 내 발목을 잡아당긴다. 이환과 마주 보고 앉아, 그의 엉덩이 옆으로 발을 뻗었다.

    “편하게 있어요, 편하게. 이번 휴가는 해민 씨가 좀 쉬었으면 해서 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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