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78)화 (78/172)
  • 78화

    “커플 티네요.”

    항시 정장만을 고수하던 모습과 달리 하얀 반소매 티셔츠에 올리브색 면바지를 입은 이환이 낯설었다.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말하는 모습과 별개로 커다란 덩치에 정장 차림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는데, 평범한 사람처럼 편하게 입은 지금의 모습은 체대 출신의 이십 대 청년 같은 느낌이다.

    다정한 말투 때문인지 해맑게 웃는 얼굴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를 바라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섰다.

    비슷한 티셔츠라고 해도 0이 두세 개 더 붙어 있는 가격 차이 때문일까, 옷을 걸친 사람의 체형 때문일까. 대충 주워 입은 듯 평범하고 편한 티셔츠에 면바지일 뿐인데도 왜인지 세련되어 보인다. 그에 더해 집 안에서부터 끼고 있는 선글라스와 옆에 놓아둔 커다란 캐리어까지. 지금 바로 공항에 나간다고 말해도 그럴듯해 보였다.

    “그냥 흰색 티셔츠인데요.”

    그와 별개로 똑같이 흰색 티셔츠를 입었다고 커플 티라고 하는 건 좀 무리가 있지.

    딱 잘라 정정하자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입매가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그래도 해민 씨는 귀여워요.”

    하얀색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손에는 이환이 내어 준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

    사실 간단하게 속옷 몇 개만 가방에 챙겨서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나가려고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여유로운 나를 의심스럽게 보던 이환이 내 계획을 알아차리고 기막힌 표정을 지었더랬다.

    모름지기 휴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야 한다고, 외출복을 고르고 짐을 챙기는 것부터 즐거운 과정에 포함된다고.

    작은 캐리어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 주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며 등을 밀어 방으로 들여보냈다. 휴가에 어울리는 예쁜 옷이란 뭘까. 즐겁기보다는 꽤나 어렵고 고민스러운 과정이었다.

    이것저것 고르다 결국 입은 건 평소보다 더 무난한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였고, 캐리어 안에는 가방이 통째로 들어가 있지만 이환은 알지 못하겠지.

    “선글라스도 끼고요.”

    드레스 룸에서 가지고 왔는지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펼쳐 내 얼굴에 씌워 준다. 순간 시커멓게 변한 시야가 어색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이제 좀 휴가 가는 느낌이 나네요. 갑시다.”

    돌돌돌 캐리어를 끌면서 이환과 나란히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소처럼 세단을 타려나 싶었는데, 이환이 리모컨을 누르자 저 멀리 한쪽에 주차되어 있던 푸른색 차가 삐빅 하며 시동이 걸렸다.

    그가 모델처럼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비스듬히 서서 리모컨을 한 번 더 눌렀다. 푸른색 차의 뚜껑이 살짝 들리더니 마치 변신 로봇처럼 트렁크가 열리며 합체하듯 접혀 들어갔다.

    눈앞에서 보는 스포츠카의 뚜껑 열리는 장면은 조금 멋있기도 하지만 또 조금은 유치하기도 한, 미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옆에서 구경하는 건 멋있지만, 저걸 직접 타기엔 조금 부끄러운 마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이환은 캐리어를 들어 뒷좌석에 실었다. 여사님이 미리 만들어 두셨다던 불고기 통도 아이스박스에 담겨 얌전히 캐리어 옆자리를 차지했다. 스포츠카는 보통 2인승에 트렁크도 좁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4인승 오픈카라서 그런지 짐 실을 곳이 부족하지 않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장님, ……이거 타고 가나요?”

    “도로를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서울 도로는 매연이 엄청난데요. 요즘 미세먼지도 극성이고.”

    강원도 어디를 가려는지는 모르겠으나, 강원도에 가기 전에 일단 서울 도로를 달려야 한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공기도 좋지 않고, 이렇게 뚜껑을 열고 달린다면 차들로 가득한 도로 한가운데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다 마셔야 한다는 뜻과 같았다.

    버스를 타도 창문은 거의 열지 않는데, 굳이 차 뚜껑까지 열어 놓고 매연을 죄다 들이마시겠다고?

    “낭만이…….”

    “건강에 안 좋아요, 실장님. 매연이 몸에 얼마나 나쁜데요.”

    낭만이나 로망이 내 건강과 목숨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흡연도 안 하는데 매연으로 폐암에 걸리고 싶지 않다.

    게다가 매연도 매연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또 어찌할 것인가. 몸소 경험해 보지 않아도 그 시선이 선망이나 동경보다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라 짐작되었다.

    단호하고 강경한 내 반대에 이환이 시무룩하게 리모컨을 눌렀다. 조금 전 트렁크 쪽으로 들어갔던 뚜껑이 처량하게 올라와 차 위를 덮었다.

    “탑시다.”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며 이환이 토라진 아이처럼 운전석에 올랐다.

    “서울, 아니, 경기도 벗어나면 열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엄청, 멋질 것 같아요.”

    “……그런가요?”

    서너 살짜리 꼬맹이 비위 맞춰 주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어렵다.

    뚱한 이환을 상대로 뒤늦게 그의 낭만을 칭찬하자, 말없이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이환이 부루퉁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네. 뚜껑 열리는 차를 제가 언제 또 타 보겠어요. 엄청 기대돼요.”

    “언제든지 말만 해요. 내가 자주 태워 주겠습니다. 아니, 해민 씨가 타고 다녀도 괜찮겠네요.”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

    그나마 시무룩해진 기분이 금방 회복되어서 다행이다. 샐샐거리며 차를 떠넘기려는 수작을 차단하자마자 다시 시무룩해져 버렸지만.

    ∞ ∞ ∞

    차례를 지내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거나 길어진 연휴를 알차게 보낼 계획인 사람들로 도로가 혼잡했다. 연휴가 길면 집에서 푹 쉴 일이지 왜 죄다 밖으로 기어 나왔을까 생각했으나, 이번만큼은 나 역시 밖으로 기어 나온 사람들 중의 한 명임을 깨닫고 작게 혀를 찼다.

    꽉 막힌 서울 도로를 오늘 내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걱정될 만큼 굼벵이 같은 속도로 이동했다. 길만 뻥 뚫리면 세 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을 들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서울을 빠져나오자 그때부터는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네 시간을 조금 넘겨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도착하기 얼마 전부터는 뚜껑을 열고 달리며 이환이 원한 오픈카의 멋짐도 경험했다.

    “내려요.”

    길게 늘어선 높은 담, 커다란 철문을 통과하여 쭉 이어진 길 끝에 영화에서 볼 법한 으리으리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끄며 이환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지금까지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던 클래식 음악도,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날리던 바람도 잠잠해졌다.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차에서 내려섰다.

    스포츠카. 남이 보기엔 멋질지 몰라도 직접 타는 입장에서는 그리 편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환이 선글라스를 줬던 건 바람에 눈이 아플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얄팍한 의심을 삼키며 뒷좌석에서 캐리어를 들어 바닥으로 내렸다.

    “여기가 별장이에요?”

    “네. 들어가죠.”

    아이스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커다란 캐리어를 돌돌 끌며 저택의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건물 앞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한 커다란 수영장을 힐끔거리며 이환의 뒤를 따랐다.

    “가족들과 자주 오세요?”

    소파 근처에 대충 캐리어를 세워 두고 주방으로 향하는 이환에게 물었다. 한쪽 벽면이 전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건물 앞쪽의 수영장이 훤히 보였다.

    너무 오픈된 구조가 아닌가, 여기서 SG 그룹 오너 일가가 지내기엔 보안이 위태롭지 않을까 하는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혼자 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휴가를 가도 다들 해외로 나가서.”

    “그런 것치고는 엄청 화려하게 지어 놓으셨는데.”

    “어렸을 때, 우리가 원하는 멋진 별장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어렸을 때요?”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이죠. 몸이 안 좋으셔서 항상 침대에만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지낼 별장을 만들어 보자고 형이랑 많이 고민했어요. 실상은 어머니랑 형이 내 재롱을 지켜보는 수준이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곳에 별장을 지어요. 주변에 나무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거실에서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수영장이 있는 거예요. 노천 온천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별장 옥상에 누워서 해돋이를 봐요.

    아이가 내뱉은 아이디어 하나하나를 모아 만든 별장이 바로 이곳이라고. 어찌어찌 괜찮은 부지를 찾아서 사들이고 별장을 지어 놓기는 했는데 그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전에 같이 온 적은 없다고. 가끔 이삼 년에 한 번꼴로 저만 와서 며칠 지내다 가는 곳이라고 이환이 덧붙였다.

    어린아이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스케일이 놀랍다. 아니, 사실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이미 금보다 더 비싼 서울 땅에 집 네 채를 지어 두고 자식들에게 한 채씩 살게 한 회장님 댁을 가 본 적이 있어서, 이게 회장님 스케일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깨달았을 뿐이다.

    “생각해 보니 진짜 다른 가족들은 온 적이 없네요. 완공되고 나서 형이랑 처음 한 번 와 본 뒤로는 항상 혼자 왔는데. 다른 가족들이 따로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이곳을 찾는 이환조차 이삼 년에 한 번꼴로 방문한다니, 이렇게 좋은 별장이 아까워졌다.

    “그런데 분수가 집 안에 있어요.”

    아이의 아이디어를 충실히 담아낸 탓일까. 멋진 별장인데 몇몇 곳엔 이해가 되지 않는 인테리어가 존재했다. 예를 들면 뻥 뚫린 일 층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원형 분수 같은 것.

    “아, 그거요. 요정의 연못입니다. 요정들이 지낼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수돗물에서도 요정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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