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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75)화 (75/172)
  • 75화

    눈치껏 어질러진 것들을 바로바로 정리하고, 밀가루와 달걀물을 리필해 드리며 여사님을 응원했다.

    “아이고야. 오랜만에 했더니 이것도 일이네.”

    반죽을 싹싹 긁어 마지막으로 팬에 올린 여사님이 허리를 쭉 펴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얼른 반죽 그릇과 다른 접시들을 모아 싱크대로 옮겼다. 그사이에 익은 전이 프라이팬에서 채반으로 옮겨지고, 버너의 불이 꺼졌다.

    “와. 여사님, 진짜 고생하셨어요.”

    기름종이를 깐 넓은 나무 채반 위에 산적, 고추전, 깻잎전, 동그랑땡, 굴전, 육전, 새우전, 버섯전, 동태전이 줄 세워져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 알록달록한 전들이 마치 흐드러지게 핀 꽃 같다. 맛있는 꽃.

    “의자에 앉아 계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식용유와 조미료 병을 원래 자리에 넣고, 기름이 튄 버너를 닦아 한쪽에 치워 두고, 전을 부친 프라이팬 두 개는 기름기를 닦아 포개어 놓고, 반죽을 담았던 그릇은 설거지통에, 마지막으로 바닥에 깔았던 종이를 착착 접어 치우고 주방 바닥까지 말끔하게 닦았다.

    누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내가 생각해도 순식간에 정리가 끝나 버렸다.

    “아니, 해민 씨. 좀 쉬었다가 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하도 날래게 움직여서 먹이 저장하는 다람쥐인 줄 알았네.”

    의자에 기대어 앉아 한숨 돌리고 있던 여사님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옆에서 도와주고 싶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알짱알짱하던 이환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기름 자국은 빨리 닦아야 할 것 같아서요.”

    “잘했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척척 알아서 하니 기특하네. 접시 하나만 가져다줄래요?”

    내가 가져다준 하얀 접시에 전을 종류별로 두어 개씩 덜어 예쁘게 담아 그것을 내민다.

    “도련님이랑 거실 나가서 먹어.”

    “여사님은요?”

    “기름 냄새에 질려서 먹고 싶은 마음이 없네. 난 들어가서 씻고 좀 누워야겠어요.”

    진짜 힘드셨던 모양이다. 아직 더운 날씨에 계속 불 앞에 계셨으니 덥기도 하셨을 테고.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찜질 같은 거 하셔야 하지 않아요?”

    “찜질은 무슨. 방에 안마의자 있어요.”

    도련님이 방에 마련해 줬다고, 거기 누우면 사람 손으로 안마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라는 여사님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마의자……. 그걸 몰랐네.

    그 와중에 이환은 커피나 한 잔씩 하자며 원두를 갈고 있었다.

    실장님……, 아무리 봐도 커피 마실 분위기는 아닌데요.

    차마 입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싱크대에 가득 찬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저녁 먹을 때까지 나는 휴식이야. 그전까지 부르지 말아요.”

    전을 담아 둔 채반 위에 면포를 덮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여사님이 주방을 나가셨다.

    “많이 힘드셨나 봐요.”

    “전 부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요 몇 년간 안 하다 하셨으니 더 힘드셨을 테고.”

    “괜히 저 때문에 하셨을까요?”

    “해민 씨 ‘때문’은 아닙니다. 오랜만에 명절 같이 보내는 사람이 생겨서 기분 내신 것 같은데. 여사님이 힘들 걸 모르고 시작하셨을 리도 없고. 해민 씨는 그냥 모른 척 기분 맞춰 드려요.”

    테이블과 의자를 원래 자리로 복귀시키고, 전이 담긴 채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가스버너도 수납장에 넣어 놓고, 반죽을 담았던 양푼들도 손으로 얼른 설거지해 두고, 싱크대의 물기를 닦은 뒤 마지막으로 식기세척기를 돌렸다.

    옆에서 장인 정신으로 원두를 내린 이환이 커피 두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가자며 턱짓을 했다. 전이 담긴 접시와 젓가락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따뜻할 때 먹으니 맛있네요.”

    “많이 드세요. 더 가져올까요.”

    “아뇨. 기름진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맛봤으니 됐습니다.”

    전을 두어 개 집어 먹은 이환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커피를 홀짝였다.

    확실히 입이 짧아.

    여사님이 이환의 입맛을 괜히 걱정하는 게 아니다.

    “기름 냄새가 나요.”

    팔뚝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자, 피부에서도 기름 냄새가 나는 기분이다. 그 말에 웃던 이환이 내 팔을 잡고 피부 위에 코를 묻었다. 어깨를 움츠리며 팔을 빼내려 했으나 이환의 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간지러워요.”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이를 세워 살짝 깨물기까지 하는 이환을 밀어내고 팔뚝을 문질렀다. 슬쩍 흘겨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얄미웠다.

    “내일 병원에 다녀온다고요.”

    “네. 여사님께 들으셨어요?”

    “그래서 욕심내셨나 보네요. 해민 씨 빈손으로 보내기 싫어서, 넉넉하게 챙겨 가라고.”

    “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사님이 진짜 그런 생각이셨다면, 괜한 수고를 하신 셈이다. 집에서 정성들여 만든 전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라는 여자에게 명절 전은 술에 곁들일 술안주일 뿐이다.

    “힘들었습니까?”

    “아뇨.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여사님이 고생하셨죠.”

    “그런데 요정님 표정이 왜 이렇게 시무룩하지?”

    내 턱을 잡아 올려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며 이환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시무룩합니다.”

    “아닌데, 이건 시무룩한 얼굴인데.”

    “저야말로 아닌데요.”

    “힘내라고 뽀뽀해 줄까요.”

    “사양하겠습니다.”

    누구를 위한 뽀뽀인가.

    그보다 이환의 입에서 나온 귀여운 어감의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기만 했다. 단호하게 사양했으나 못 들은 양 이환이 입술을 마주 댔다. 둘 다 전을 집어 먹은 탓에 약간의 기름기가 남은 입술이 문질러졌다. 고소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급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혀가 들어오지 않고 입술만 가볍게 붙여 쪽쪽 소리를 내는 접촉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내 요정님은 이런 걸 좋아했나 봐요?”

    “……제가요?”

    “나랑 스킨십하고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봐서. 아가라서 그런가, 스킨십도 가벼운 걸 좋아하네요.”

    “아닙니다.”

    “아닌데. 지금도 웃고 있는데.”

    진짜인가 싶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 웃고 있어요. 그냥…….”

    “그냥?”

    “그냥 실장님이랑 뽀뽀랑 안 어울려서 웃은 거예요.”

    “아주 큰 오해네. 나처럼 뽀뽀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다기엔 이제껏 이환과 했던 농도 짙은 스킨십만 떠올랐다. 매번 잠자리에서 물고 빨았던 탓에 조금 과격하고 살색 난무한 장면만이 선연했다.

    “야한 생각 했습니까? 얼굴이 붉어졌는데.”

    “……아니요.”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타격이 컸다. 휘휘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떨치며 이환의 어깨를 밀쳤다. 단단한 몸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환의 몸에 제 손을 가져다 댄 꼴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밝은 시간에 나를 막 만지는 겁니까?”

    “아닙니다.”

    “나를 막 끌어안고 있는데?”

    “밀어내는 거죠.”

    “한마디도 안 져 주네요.”

    “오해는 바로잡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요.”

    실망한 표정이었으나 그렇다고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가는 문답이 즐겁다는 듯 살짝 올라간 이환의 입꼬리를 보며, 덩달아 올라가려는 내 입매를 단단히 단속해야 했다.

    13

    이환은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 본가로 향했다. 가기 싫은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버티는 그를 얼러서 겨우 내보내고, 여사님과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모처럼 죽이 아닌 시원한 콩나물국에 어제 부쳐 둔 전을 데워서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니 속이 든든했다.

    “저도 다녀올게요.”

    “이거 가져가고.”

    이환의 예상처럼, 여사님은 집을 나서는 내 손에 가방 하나를 쥐여 주었다.

    어제 힘들게 만든 전을 따뜻하게 데워서 통에 담아 식지 말라고 보온 가방에 넣는 수고까지 하셨기에 고마우면서도 죄송했다. 정성과 고생이 담긴 음식을 받아먹을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가져다주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이런 거 안 드세요.”

    “명절이잖아. 시늉은 해야 하는 법이야.”

    병원 선생님들 드시라고 드려도 좋고, 정히 먹는 사람이 없다면 다시 가져와도 괜찮으니 일단 가져가라고. 기어이 가방을 챙겨 들게 한 여사님이 나를 걱정스레 보았다.

    “정말 차 안 끌고 가도 되겠어?”

    오늘 병원에 다녀온다는 말을 듣고 이환이 김 기사님을 부르려 했다. 이환의 일도 아니고, 나 때문에 애먼 사람을 명절 아침에 부르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더니 그러면 차를 끌고 가라며 차 키를 주고 갔다.

    내 운전 실력을 보고도 용케 차 키를 주고 갈 생각을 했다며 얌전히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나왔지만.

    “내가 태워다 줄까?”

    “버스 타면 금방 가는데요. 집에서 쉬고 계세요.”

    “그럼 택시라도 타고 가요. 콜 불러 줄게.”

    조금만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가라는 여사님을 진정시키며 슬렁슬렁 천천히 다녀오겠다고 설득했다. 혼자 심부름 보내는 어린 자식을 보듯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에 웃음이 나왔다.

    “길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세요?”

    처음 혼자 외출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서울 처음 올라온 촌놈도 아닌데 이런 걱정은 너무 새삼스럽다.

    “가까운 곳도 아닌데, 편히 갔으면 해서.”

    “버스 타도 편해요.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그러면 조심조심해서 다녀와요.”

    내 등을 두어 차례 쓸어 준 여사님이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보온 가방을 품에 안고 천천히 골목을 걸어 내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부촌의 골목길을 걷는 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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