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을 뭉그적거리자 여사님이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 맛있는 거나 실컷 해 먹을까요?”
“맛있는 거요?”
“명절이잖아. 모처럼 전도 부치고, 우리끼리 명절 분위기 좀 내요.”
옆에 와서 앉으라며 소파를 탁탁 두드린 여사님이 어떤 전을 먹고 싶냐고 물었다.
“이전에는 어떤 거 하셨는데요?”
“이전에는 하긴 뭘 해. 그냥 조금 긴 휴일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처럼 보냈지. 제사도 안 지내는데 준비할 게 뭐 있나. 그래도 이번에는 해민 씨도 있으니까, 명절 분위기 좀 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전 부치는 것도 힘들다고 하던데요.”
“조금씩만 할 거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기름 냄새가 나야 명절 보내는 느낌이 나잖아. 아니면 영 심심해. 연휴 동안 얼굴만 멀뚱멀뚱 보고 있어야 한다니까.”
가뜩이나 주말까지 뒤에 붙어서 명절 연휴가 긴데, 이런 소소한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고 강력한 주장이 돌아왔다.
전 부치는 일은 소소한 재미보다 노동에 가까울 텐데.
내 걱정과 달리 여사님은 오히려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 ∞ ∞
명절 당일에 음식을 만드시려나 했는데, 명절 음식은 하루 전날 준비를 하는 거라며 일찌감치 판이 벌어졌다.
아버지와 같이 살 적에 명절을 챙겼는지 모르겠지만 워낙 어렸을 때라 기억나지 않았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로는 명절을 챙긴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명절을 보내려고 음식을 만드는 지금의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제가 뭐 도와 드려야 해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나를 보며 여사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앉아서 이거 꿰고 있어요. 이렇게 고기, 버섯, 파, 버섯, 고기 순서로 이쑤시개에 꽂아.”
양념을 하여 한 차례 구워 낸 소고기와 비슷한 크기로 자른 버섯과 파를 내 앞에 놓아 주며 여사님이 명쾌한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그동안 동그랑땡 반죽 좀 할게요.”
재료들을 잘게 다져 양푼에 넣고 대충 간을 하고 팍팍 뒤섞는 손놀림이 경쾌하다. 물 흐르듯 막힘없는 움직임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쑤시개에 재료를 꿰기 시작했다.
“반죽 엄청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요, 여사님.”
“이걸로 동그랑땡도 하고, 깻잎전도 하고, 고추전도 할 거라서.”
“그 반죽으로요?”
“응, 들어가는 게 비슷비슷해. 솔직히 그 맛이 그 맛이야.”
너무 솔직하신 감상인데.
“그럼 굳이 여러 가지 하실 필요 있어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차피 들어가는 건 똑같으니 하는 김에 여러 가지 해 보는 거지. 똑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잖아. 모양이라도 달라야지. 그리고 깻잎이랑 고추 때문에 씹는 맛이나 향이 조금씩은 다르니까.”
그동안 명절 음식을 안 하셨다더니, 오랜만에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고 꽤나 즐거우신 모양이다.
바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사이에 반죽을 끝낸 여사님은 반죽을 덮어 두고 주변 정리를 했다.
“아이고, 예쁘게도 만들어 놨네. 대충대충 하지, 뭐 이렇게 정중앙에 꽂아 놨어요.”
수북이 쌓인 산적을 보고 여사님이 혀를 차며 웃었다.
주방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어 공간을 마련한 뒤 바닥에 종이를 깔았다. 가스버너 위에 커다란 팬을 올려 두고, 밀가루와 달걀물 그리고 준비해 둔 전들을 펼쳐 놓았다.
“기름 튀니까 조심해야 해. 뜨거우니까 불 근처로는 오지 말고.”
단단히 당부한 여사님이 팬에 기름을 두르고 버너의 불을 켰다. 내가 만든 산적이 밀가루 위를 뒹굴고 달걀물을 입고 기름 위에 올라갔다. 삽시간에 퍼지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자글자글 구워지는 산적을 구경했다.
“역시 명절에는 전이지. 으음, 이 기름 냄새. 다 하고 나면 분명 후회하겠지만, 일단 기분은 좋네.”
“왜 후회해요?”
“젊은 사람들도 허리 아프다고 끙끙거리는데, 노인네 허리가 멀쩡하겠어요.”
“그럼 제가 할까요? 여사님은 의자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아니야. 어떻게 해민 씨를 시켜. 초보자한테 시키기엔 위험하지. 기름하고 불 쓰는 일이라 조심해야 해.”
라면 하나 못 끓이는 유치원생도 아닌데, 여사님은 과하게 걱정을 했다. 지금도 프라이팬 앞을 사수하며 절대 불 근처로는 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예요?”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라 집에 있던 이환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는 주방 바닥에 앉아 있는 여사님과 나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름 냄새 나서 내려왔어요?”
“전 부치려고요?”
“올해는 해민 씨도 있으니까. 기분 좀 내 보려고.”
“여사님 괜찮겠습니까.”
“그건 일단 하고 나서 후회할 일이지.”
남의 몸 얘기하듯 말씀하신 여사님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산적을 꺼내 기름종이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도와 드릴까요.”
“아이고, 됐어. 거추장스럽게 옆에서 알짱거리지나 말아요.”
어떻게 도련님에게 이런 일을 시키냐는 마음 반, 그리고 진짜 거추장스러운 마음이 반. 그 속마음이 너무나도 정직하게 여사님의 얼굴에 드러나서 웃음이 나왔다.
“해민 씨는 뭐 하는 중입니까?”
“고추에 반죽 채워요.”
“같이 할까요?”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보며 물어서, 자연스럽게 여사님의 눈치를 보았다. 곁에서 이환의 질문을 함께 들은 여사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님의 허락까지 받아 낸 이환이 신이 난 얼굴로 손을 씻고 다가왔다.
“잘하고 있는 해민 씨 건드리지 말고. 도련님은 깻잎전 만들어요. 깻잎전 알죠? 깻잎 반 접어서 그 사이에 반죽 넣는 거.”
“……알겠습니다.”
내 옆에 바짝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즐거워 웃던 이환이 여사님에게 한 소리를 듣고는 시무룩해져서 깻잎을 손에 들었다.
“만들어 본 적 있으세요?”
“해민 씨는요?”
“저는 처음이에요. 그래도 여사님이 잘 알려 주셔서 괜찮아요.”
“저도 처음입니다.”
아니, 이렇게 불안할 수가. 너무 당당하게 도와주겠다고 말해서 해 본 적이 있나 했는데, 그냥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나 보다.
“도련님, 그거 너무 두꺼워요. 좀 덜어내. 깻잎 터지려고 하네. 그리고 그렇게 볼록하게 만들면 어떻게 해요. 송편도 아니고. 납작하게 눌러야지. 깻잎전 먹어 봤잖아요.”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되어 바로 여사님의 지적이 날아왔다. 이환을 아끼는 여사님이라면 터진 깻잎전이나 송편 같은 깻잎전도 잘했다 칭찬하실 줄 알았는데, 묘하게 객관적인 여사님의 기준이 이번에도 발휘되려는 모양이다.
그 뒤로도 계속 타박을 듣는 이환이 불쌍해서 내 앞에 있던 고추와 이환의 앞에 있는 깻잎 그릇을 바꾸었다.
“제가 깻잎전 할게요. 실장님이 고추전 하세요.”
그래도 고추전은 반으로 가른 고추에 반죽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되니 조금 쉬웠다. 감동한 표정의 이환을 모른 척하며 여사님에게 물어 적당한 두께의 깻잎전을 차곡차곡 만들어 쌓았다.
“해민 씨는 처음 만들어 본다면서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칭찬하는 사람이 이환이라 기분이 묘했으나 일단 감사 인사를 했다.
이환과 내가 예술 작품을 만들 듯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깻잎과 고추 속을 채워 나가는 동안, 산적을 다 구워 낸 여사님이 버너 하나를 더 챙겨 와 프라이팬 두 개로 전을 굽기 시작했다.
“여사님, 깻잎전 다 만들었는데 제가 팬 하나 맡을까요?”
“아냐, 기름 위험해. 익는 거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해서 두 개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다 했으면 옆에서 전이나 몇 개 주워 먹으라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전을 내게 내밀었다. 괜찮으니 맛 좀 보라는 권유에 아직 뜨거운 김이 빠지지 않은 산적을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 바삭한 달걀옷, 짭조름하게 양념된 고기, 담백한 파, 쫄깃한 버섯. 입에서 느껴지는 맛과 향과 식감까지 완벽했다. 가끔 명절 지나고 얻어먹은 전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기름 전 내도 나지 않았다.
“맛있어요.”
“그렇지?”
“실장님도 드셔 보세요.”
산적을 하나 집어 이환에게 내밀자, 그가 냉큼 고개를 숙여 입으로 받아먹었다. 손으로 받아 갈 거라는 예상과 다른 그의 행동에 놀라는 한편, 이러다 이쑤시개까지 먹을 것 같아 손가락에 꽉 힘을 주었다.
“맛있네요.”
오물거리며 입에 있는 것을 삼킨 이환이 이쑤시개를 꼭 쥔 내 손을 겹쳐 잡고 나머지 산적을 쑥 빼 먹었다. 전에서 배어 나온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여사님도 하나 드셔 보실래요?”
“난 나중에. 만들어 둔 건 굽기만 하면 끝이니까, 해민 씨랑 도련님은 정리하고 손 씻어요.”
손으로는 바쁘게 전을 뒤집으면서도 눈으로 주변을 훑고 막힘없이 지시를 내린다. 만들어 놓은 고추전과 깻잎전을 여사님의 손이 닿는 근처에 몰아 두고, 그사이에 산더미처럼 쌓인 양푼과 그릇들이 말라붙기 전에 차곡차곡 쌓아 물에 불려 놓았다.
“그렇게 우두커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 말고, 냉장고에서 계란 좀 꺼내 와요.”
아무리 소중한 도련님이라도 일할 때 옆에서 알짱거리면 귀찮은 모양인지, 살짝 짜증 섞인 잔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실장님, 불쌍해.
왜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괜히 내려와서 끼어들었다가 잔소리만 듣고 있다. 솔직히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도와주려는 마음을 기특하게 봐줄 수도 있을 텐데. 평소 이환에게 너그럽던 여사님이 오늘따라 조금 냉정하셨다. 아무래도 일을 벌이긴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더 많아져 힘드신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