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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73)화 (73/172)
  • 73화

    낮에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알게 모르게 싱숭생숭해졌는지, 아니면 추석이 다가오고 있음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느꼈는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까맣게 물든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드르륵, 하고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누가 보낸 메시지인지 대충 짐작이 가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끌어왔다.

    [해민 씨가 보고 싶은 시간이네요.]

    정말 뜬금없는 시간에 뜬금없는 내용으로 보낸 메시지다.

    지난 히트 사이클 이후로 나는 이환과 약간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고, 이환 역시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날 이후로 회사에 있을 시간에 종종 전화를 걸거나 새벽 시간에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헛웃음을 흘리며 그동안 이환이 보낸 메시지를 쭉 올려 보았다.

    [해민 씨] 하고 이름만 달랑 보낸 날도 있었고, [잡니까] 하고 간을 보듯 묻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감수성이 폭발했는지 [어두운 하늘을 보는데 해민 씨가 떠오릅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이 마치 내 마음속에서 빛나는 해민 씨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잠든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오는 탓에 확인은 아침에 일어나서야 하게 되지만, 딱히 새벽에 보낸 메시지에 관한 이야기는 나나 그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감수성이 폭발하는 새벽 시간, 이환의 토막 일기장처럼 변해 버린 내 메시지 함을 보다가 문득 답변을 해 보고 싶어졌다.

    [아직 안 주무세요?]

    [해민 씨야말로 안 자고 있습니까?]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답변이 왔다.

    실장님 타이핑 실력이 남다르시네.

    타이핑도 빠르지만, 그보다 휴대폰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확인과 답변에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랐다.

    [오늘따라 잠이 안 와서요.]

    [저런. 자장가 불러줄까요.]

    [괜찮습니다.]

    [저런.]

    이환의 대답을 목소리가 아닌 글자로 보고 있자 웃음이 나왔다. ‘저런’이라는 단어에 이환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고, 똑같은 글자임에도 ‘저런’이라는 단어에 안타까움과 못마땅함이 구분되어 느껴지는 현상이 신기하기도 했다.

    [실장님은 항상 이렇게 늦게 주무세요?]

    [거의 그렇죠.]

    [늦게 주무시니까 아침에 못 일어나시잖아요.]

    [해민 씨가 깨워주니 괜찮습니다.]

    [여사님이 그동안 힘들었다고 하시던데요.]

    [해민 씨도 힘듭니까?]

    [아니요.]

    [아침마다 해민 씨 얼굴을 보면서 일어나니 좋아요. 힘들다고 해도 계속 부탁했을 겁니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문답이 덜컥 멈췄다. 왜인지 뺨이 간지러운 기분에 손등으로 문지르며 이환의 마지막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질문도 아니라서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돈 받고 일하는 입장이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타이밍은 확실히 아니었다.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할까. 고민이 길어지자 이환이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목소리 듣고 싶은데 전화해도 됩니까.]

    [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함이 사라지고 액정 위에 이환의 이름 두 글자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잠든 줄 알았습니다.

    “잠깐 생각을 하느라…….”

    ―무슨 생각을요?

    “……적당한 대답?”

    휴대폰 너머에서 낮게 웃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새벽에 듣는 해민 씨 목소리도 좋네요.

    “제가 평소에 일찍 자서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오늘은 왜 이 시간까지 잠을 못 자고 있습니까.

    “잠이 안 오는 건 제 의사가 아니에요.”

    ―그렇죠. 똑똑한 해민 씨에게 멍청한 질문을 했네요. 우유라도 한 잔 데워서 가져다줄까요.

    가끔 드는 생각인데, 이환은 자신이 돈을 주는 고용주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이런 핑계로 해민 씨 얼굴 한번 볼까 했는데, 어렵네요.

    “실장님 문 열고 열 걸음만 걸으면 제 방인데요.”

    ―그러니 더 조심해야죠.

    얼굴 한번 보는데 왜 조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자고 있지도 않은데. 생각해 보니 같은 집, 같은 층에 있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도 조금 웃겼다.

    “침실에 계세요, 서재에 계세요?”

    ―서재에 있습니다. 아직 일이 남아서요.

    “일은 회사에서 하셔야죠.”

    물론 회사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농땡이 피우고 이른 퇴근을 노리는 모습 또한 많이 보았다. 그 여파로 일거리를 집까지 가지고 오게 된 것인가 싶어 안타까워졌다.

    ―회사에서 하는 일과 집에서 하는 일이 조금 다르거든요.

    “회사 일이 아니에요?”

    ―회사 일을 왜 집까지 가져와서 하겠습니까. 내 회사도 아닌데,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라고요.

    저번에 그랬지. 회사 경영에 관심도 없고,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도 없다고. 지금 회사에 나가는 것도 월급 안 받고 일하는 거라는 말도 들었었다.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네.

    오히려 이환이 과하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월급도 안 받으면서 회사에는 왜 출근하는 걸까. 그만큼 일을 했으면 월급을 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 회장님이 자식이라고 월급도 안 주고 부려 먹고 있나. 이환이 무능력한 낙하산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업무 능력도 뛰어난 듯했는데.

    새삼스럽게 든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고 끙끙거리자 이환이 “해민 씨?” 하고 나를 불렀다.

    “실장님이 왜 월급도 안 받으면서 출근하시는지 갑자기 의문이 생겨서요.”

    ―아버지와 내가 고집을 꺾지 않은 탓이죠.

    무언가 많은 사정이 있으나 결국엔 가족 간의 문제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보다 해민 씨.

    “네, 실장님.”

    ―내가 해민 씨를 생각하며 시를 썼습니다.

    “……음, 시요?”

    갑자기? 이 시간, 이 타이밍에, 뜬금없이?

    하필이면 새벽 세 시에 시를?

    ―달을 본다. 네가 있다. 별을 본다. 네가 있다. 하늘 속에 네가 있고, 구름에도 네가 있다.

    갑자기 낭독을 하신다고요?

    ―거울을 본다. 그곳에 네가 있다.

    아무리 시적 허용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거울에는 ‘네’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유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거울에 ‘나’ 대신 ‘너’가 보이는 건 좀 무서운 일이 아닌가.

    ―세상 모든 것들 속에 네가 있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에 네가 있다.

    이환은 이과 출신이 아니었을까.

    내가 시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기도 하지만, 이환 역시도 시와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새벽 세 시가 이렇게나 위험한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새벽 메시지를 그냥 계속 무시할 것을. 괜히 아는 척을 해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며 후회했으나 이미 타격을 받아 버린 뒤였다. 앞으로 새벽에 답장을 보내거나 전화를 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만 얻었다.

    짧은 공백을 깨며 전화가 왔다.

    무시했다.

    길게 진동하던 휴대폰의 떨림이 멈추었고, 곧바로 다시 울렸다.

    역시나 무시했다.

    그러자 짧은 진동과 함께 액정 위에 메시지가 떴다.

    [해민 씨?]

    전화에 이어 메시지도 무시했다.

    [해민 씨, 갑자기 전화가 끊겼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끊은 겁니다.

    [해민 씨, 잠들었나요?]

    그냥 잠들고 싶네요.

    [피곤했던 모양이네요. 푹 자고 아침에 봅시다.]

    연달아 울리던 휴대폰이 잠잠해졌다. 덩달아 크게 뛰던 심장이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새벽에 안 자고 괜한 짓을 했다가 무서운 경험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동으로 되어 있던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고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 ∞ ∞

    이환과 점심을 먹고 헤어져 집에 오니 여사님이 거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끼적이고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밥 맛있게 먹고 왔어요?”

    “네. 여사님도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나는 그냥 대충 때웠어. 좀 이따 장 보러 나가려고.”

    시장 볼 것을 적는 중이라며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집에서 혼자 드신 거예요? 오늘은 장 보러 늦게 나가시네요.”

    보통은 점심시간에 맞춰 장 보러 나가며 식사를 사 드시고 오는 듯했는데, 오늘은 집에서 혼자 드신 모양이다. 장 보러 나가는 시간도 평소보다 늦고.

    “내일부터 추석 연휴잖아. 연휴 때 뭐라도 해 먹을까 해서 고민 중이었어요.”

    “아.”

    “해민 씨는 제사 지내러 가야 하나?”

    “아뇨. 여사님은요?”

    “나야 뭐 가족이 없으니. 친정 쪽 부모님은 딸년 부끄럽다고 연 끊은 지 오래고, 이미 돌아가셔서 제사를 지내도 오라비가 지내고 있겠지. 장례식 때 문전박대당한 뒤로는 걸음도 안 해요.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어 관심도 없어.”

    없느니만 못한 가족이라며 여사님이 혀를 찼다.

    없느니만 못한 가족.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에 힘을 주면서도 속으로 긍정했다.

    “해민 씨는 모친 뵈러 가려나?”

    “아, 추석 당일에 병원 잠깐 다녀오려고요. 괜찮을까요.”

    “괜찮지. 연휴잖아. 휴일이야, 휴일. 나는 갈 곳 없는 노인네라 여기 버티고 있는 거고. 도련님도 당일 새벽에 본가 가셔서 점심에 올 거예요.”

    “연휴 내내 본가에 계시지는 않네요.”

    “회사 사장들이며 아는 사람들이 인사한다고 찾아오니까. 가족들끼리 밥 먹는 건 기껏해야 아침 한 끼지.”

    계열사 사장님 정도 되면 엄청 높은 사람들일 텐데, 회장님이 맨 위에 버티고 계시니 그 높으신 양반들도 명절 때 인사하러 찾아오는구나.

    새삼스럽게 SG 그룹 회장님의 위치에 감탄했다.

    “해민 씨도 새벽에 나가려고?”

    “아뇨. 그냥…… 잠깐 얼굴만 보고 오려고요. 아침 먹고 출발해서 점심 먹기 전에 올까 해요.”

    “왜 그렇게 서둘러. 천천히 있다 오지.”

    괜히 눈치 보지 말고 모친과 오붓하게 지내고 오라며 배려를 해 주셨으나, 내게는 달갑지 않은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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