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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69)화 (69/172)

69화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시선이 마주치는 시간이 이어지자, 웃고 있던 입매가 내려가고 휘어진 눈매가 가늘게 뜨였다.

“해민 씨한테 관심 꺼.”

“에이, 형 상대로 너무 경계하는 거 아냐?”

툭 내뱉은 말에 장난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내 요정님이야. 나만 볼 거고, 나만 관심 가질 거야.”

“우리 환이, 너무해. 옛날에는 형이 제일 좋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형보다 요정님이 더 좋다는 건가?”

“그땐 요정님이랑 만나기 전이니까.”

“요정님 만났다고 바로 갈아타는 거야?”

“요정님을 형이랑 어떻게 비교해.”

당연히 요정님이 중요하지.

형 따위는 바로 버리겠다는 말에 이정이 충격받은 얼굴로 비틀거렸다.

“형은 다른 요정님을 찾아. 해민 씨는 내 요정님이야.”

내 거야. 내 요정님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말하는 이환을 보며 이정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다, 알았어. 항복.”

“나 몰래 요정님이랑 만나기만 해 봐.”

“그럼 뭐? 형을 때리기라도 하려고?”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나쁘지 않네.”

정말 나쁘지 않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난히 페로몬이 강한 이환은 같은 알파이면서도 이정보다 키도 덩치도 더 컸다. 나이도 어려서 팔팔하지. 체력적인 면으로 맞붙는다면 굳이 상대해 보지 않아도 결과가 짐작되었다.

“그런 걸로 형제끼리 싸우면 안 돼. 형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키면 되겠어?”

“요정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괜찮아.”

“형은 우리 환이랑 같은 편이잖아.”

“아냐, 나는 이제 요정님이랑 같은 편이야.”

설마 진짜 형을 때리겠어, 싶던 이정이 정말 때리겠구나, 하고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랬다, 동생 키워 놨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요정님한테 쪼르르 달려가 붙는다며 한탄하는 이정을 가볍게 무시했다.

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이 주차장에서 나온 차에 냉큼 올라탔다.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이정의 시선이 닫히는 대문 너머로 아련하게 사라졌다.

“후우.”

낮게 한숨을 뱉어 낸 이환이 시트에 등을 기댔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어 GPS 신호를 확인해 본다. 여전히 본가로 오며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위치 인근이다.

집을 나오기 전, 여사님에게서 해민을 데리고 나가 밥을 먹고 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회사와 집만 오가느라 답답했을 거라고, 단번에 바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 한 번씩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군것질도 하고 평범한 음식도 먹고 해야 한다고.

여사님이 틀린 말을 하시지는 않기에 이환은 흔쾌히 모른 척을 했다. 일탈이란 비밀스러워야 더 즐거운 법이라고 하셨던가. 비록 남들은 다 알고 서해민만 비밀이라 생각하는 일탈이지만, 그래도 즐거워 한다면 그것으로 괜찮았다.

그런데…….

“왜 위치가 다르지?”

해민의 목과 팔이 분리가 되지 않는 이상 신호가 같은 위치에 떠야 하는데, 팔찌와 목걸이에서 보내오는 GPS 신호가 미세하게 떨어져 있었다. 지도를 확장해 살피자, 점점 벌어지는 거리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사고인가? 손목이 잘렸나? 아니면 설마…… 목이?”

“왜 그러십니까, 실장님.”

당황하여 흘러나온 이환의 목소리에 잠자코 운전을 하던 김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호가……, 붙어 있어야 할 GPS 신호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손목이 잘렸거나 목이…….”

GPS 신호라는 말에 잠시 침묵하던 김 기사는 일단 이환부터 진정시키고자 했다.

“잃어버리셨나 보네요.”

“……네?”

“생체 칩을 이식한 게 아니라면, 물건을 잃어버리신 게 아닐까요.”

“……아.”

보통은 물건 분실을 생각하지, 신체 절단부터 떠올리지는 않는다. 해민과 관련되면 판단이 흐려지는 이환을 알기에 김 기사는 침착하게, 최대한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화를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대놓고 물어보면 곤란해지실 수 있으니, 지금 뭐 하고 계시는지 넌지시 물어보시죠.”

“아……. 고맙습니다, 김 기사님.”

“별말씀을요. 어서 전화해 보십시오.”

그래, 결코 신체 절단은 아니겠지. 아마도 팔찌나 목걸이를 중간에 잃어버린 모양이다. 해민이 곤란해하고 있을지 모른다며 이환이 통화를 시도했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해민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놀란 목소리도 아니고, 고통에 젖은 목소리도 아니다. 안도 섞인 한숨을 삼키며 이환이 애써 평소처럼 물었다.

“나 집에 가는 중입니다. 해민 씨도 저녁 먹었겠죠?”

―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팔찌와 목걸이는 제대로 하고 있냐고 물어볼까. 왜 집에서 나올 때는 같이 있던 팔찌와 목걸이가 지금은 떨어져 있느냐고 물어볼까.

“맛있는 거 먹었어요?”

―네……, 맛있는 거…… 먹었죠.

묻고 싶다. 물어보면 안 되겠지만, 격하게 묻고 싶었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한 이환이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화장실이에요? 아니, 밖인가? 소리가 좀 울리는데.”

이환의 물음에 흡,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하고 타인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밖이네요?”

지금 같이 있는 남자는 누구냐고, 누구 차에 탄 거냐고, 그 남자와 어딜 갔고 어디서 내리려는 거냐고, 여사님은 어디에 가셨냐고.

치밀어 오르는 질문들을 힘겹게 내리눌렀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약간의 망설임과 곤란함, 난처함 등이 섞여 나왔다.

―……저 지금 ……파출소예요.

“…….”

이건 예상 못 한 전개인데.

잠시간 말을 잊었던 이환이 이내 다급히 물었다.

“다친 곳은 없고요?”

―네.

“여사님은요?”

―같이 계세요.

“그래요. 다친 곳은 없군요. 다친 곳은 없고 파출소네요. 그럼 괜찮습니다.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누가 뭐 물어봐도 대답하지 말고, 사람이 올 테니 기다리라고만 하세요.”

―실장님?

“괜찮아요, 해민 씨. 걱정 말아요. 금방 가겠습니다.”

어느 파출소인지를 짧게 확인하고 전화를 끊은 이환이 재빨리 백윤경과 변호사를 호출했다. 시큐리티 쪽으로도 연락을 넣어 사람을 부른 뒤에 한숨을 돌린 그가 “김 기사님.” 하고 불렀다.

“네, 실장님.”

“좀 밟으셔야겠습니다.”

∞ ∞ ∞

이환은 제 앞에 놓인 팔찌를 집었다. 마치 염주처럼 팔찌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하나하나 손끝으로 굴리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눈앞의 남자를 불렀다.

“민 상무님.”

“네, 실장님.”

“입은 열던가요.”

“하는 얘기는 똑같습니다. 그냥 길 가다가 비싸 보이기에 훔쳤답니다.”

민 상무의 말에 이환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해민의 팔찌를 훔쳐 간 도둑은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잡아 왔다. 해민이 기억하고 있던 범인의 인상착의와 GPS 신호 추적으로, 장물을 넘길 새도 없이 붙잡혀 온 놈은 안가로 끌려가 심도 깊은 상담을 받고 있었다.

시큐리티 직원들이 번갈아 심문하고, 놈이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행적을 탈탈 털고, 통화 내역과 금융 기록을 추적 조사 중이었으니, 그놈이 무엇을 숨기든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혹여 이쪽과 엮인 게 없다고 해도, 그간의 먼지라도 털어 형량을 높여야 조금 속이 풀릴 성싶다. 물론 그 전에 개인적인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어디 소속이래요?”

“경찰들은 그냥 뜨내기 잡범이라고 하는데, 조사해 보니 삼 년 전까지 중구 흑곰파에 있다가 팔 개월 감방 들어갔다 나왔다고 합니다.”

“출소한 지 이 년 조금 넘었네? 그동안 쉰 거야, 아니면 안 걸린 거야?”

“지방에서 계속 이동한 모양입니다. 그러다 반년 전에 올라와서 화성에 자리를 잡았고요.”

“서울 온 건?”

“일주일 전입니다.”

톡톡,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못마땅함이 느껴졌다.

“다른 조직 들어갔다거나 연줄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러기엔 조무래기입니다.”

“그러게. 흑곰파라, 이건 어디서 노는 애들이야.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인데.”

“하청에 하청 정도라면 조금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든 선을 이어 보려고 해도 기껏해야 그 정도의 피라미라는 뜻이다.

우발적 범행이냐 계획적 범행이냐의 문제인데,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다.

“더 만져 보겠습니다.”

“그래요. 어차피 본인도 뭐에 엮였는지 모를 것 같은데, 적당히 주물러서 내일쯤 경찰에 넘겨요.”

피라미라면 본인이 어떤 줄에 엮여 움직였는지도 모를 터이다. 그 정도 되면 놈을 풀어 주든 감방에 처넣든, 조사하는 데에 별 상관은 없겠지.

놈은 대충 마무리해서 넘겨주고 따로 조사를 하라며 이환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까지 조사해 온 파일을 내려놓고 돌아 나가는 민 상무를 잠시 불러 세웠다.

“민 상무님, 직원 두 명만 붙여요.”

“그놈한테요?”

“서해민한테.”

“옆에서 케어할까요.”

“아니, 당사자 모르게. 집에서 잘 안 나가기는 하는데, 한 번씩 나갈 때마다 불안할 것 같네.”

“오늘부터 보내 두겠습니다.”

“그래요.”

진짜 용무 끝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 상무가 자리를 떴다. 왜인지 목이 타는 기분에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냄새나세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백윤경이 물었다.

“어.”

“그러기엔 좀 자잘하지 않습니까.”

“자잘하지. 자잘하고 유치하고 졸렬하고. 원래 하는 짓이 그랬잖아.”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한 이환이 되찾아 온 팔찌를 백윤경에게 던졌다. 두 손을 모아 받으려다 실패한 윤경이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주웠다.

“가서 똑같은 걸로 새로 사 와.”

“같은 거 말씀이십니까?”

“어. 누군지도 모르는 놈 손 탄 걸 해민 씨한테 줄 수는 없지.”

우리 요정님이 얼마나 순백의 천사 같은 사람인데, 뭐가 묻었을 줄 알고. 지지야, 지지.

생각만으로도 싫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GPS 잊지 말고.”

“…….”

“왜? 내 선견지명 못 봤어? GPS 없었어 봐.”

이렇게 빨리 문제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빨리 범인을 잡고, 이렇게 빨리 물건을 회수할 수 있었겠냐고 묻는 이환의 얼굴은 당당했다.

“결과가 좋다고 과정까지 다 좋은 건…….”

“결과도 과정도 다 좋다.”

“보니까 이제 팔찌 안 하고 다닐 것 같던데요.”

“유비무환. 잔말 말고 해 와.”

“넵.”

아무리 봐도 안 하고 다닐 것 같은데.

이환은 구시렁거리는 백윤경을 끌고 비밀스러운 미팅 장소로 사용하는 빌라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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