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것 보십시오. 진즉 풀어 줬어야지. 참으니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해민 씨가 걱정이네요. 베타 입장에서는 날벼락이었을 텐데.”
이환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깨닫고 안심했다. 그 뒤로 서해민에 대한 얄팍한 걱정이 들긴 했으나, 거기까지는 윤경이 걱정할 범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이제 갓 성인이 된 소년의 멘탈이 멀쩡하기를 바랐고, 이번 일을 빌미로 지저분하게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페로몬이 약한 오메가였던 모양이야. 히트 사이클과 겹치는 바람에 상황에 휩쓸려 버렸어.”
침중한 목소리로 말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단정하던 이환의 헤어스타일에 새집이 만들어졌다.
“그럼 억지로 덮쳤다고 고소가 들어올 가능성은 없겠네요. 설마 노팅을 한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당장 산부인과부터 물색해야 한다. 러트 사이클에 히트 사이클, 노팅까지 겹치면 빼도 박도 못하게 임신이니까.
아이를 지울지 낳을지도 결정해야 하고, 낳는다면 해민이 키우게 할지 이환이 데려와 키울지도 정해야 한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서해민을 어디에 둘지도 정해야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서해민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결정해야 한다.
이래서 오너 일가가 밖에서 씨를 뿌리고 다니면 밑에 있는 놈들이 죽어난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나마 이환이 그런 쪽으로는 깔끔해서 이제까지 걱정할 일이 없었는데. 한 번의 실수일지 이번 일을 시작으로 늦바람이 불어닥칠지 가늠이 어려웠다. 늦바람이라면 그런 쪽으로 확실하게 정리할 전문 인력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지금은 처음이니만큼 제 손으로 정리를 해야겠지. 아무래도 돈 좀 쥐여 주고 아이를 지우는 편이 제일 깔끔한데, 서해민이 선선히 말에 따를까.
머릿속으로 가능성 있는 다양한 상황을 떠올리고 그에 따른 해결책까지 마련해 둔 윤경이 진지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제가 체크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미리 알아 두어야 수습하기가 편하니까.”
이번에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이 날아왔다. 하필이면 선인장이라 작은 크기에 비해 위험도가 높았다.
“네가 싫다, 백윤경.”
다행히 노팅까지는 안 한 모양이다. 임신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안심하는 한편,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사고는 본인이 쳐 놓고, 왜 저한테 화풀이를 하십니까?”
“그러게. ……내가 싫다.”
러트 사이클에 첫 경험이라. 혼이 쏙 빠질 정도로 황홀한 섹스를 경험했을 텐데, 후폭풍으로 밀려오는 자괴감이 꽤나 큰 모양이다.
자신의 첫 경험 때는 어떠했는가.
그냥 좋았다. 마냥 좋았다. 하고 나서 며칠은 계속 좋았다. 또 하고 싶다, 이 생각만 했던 것 같다.
현자 타임? 첫 경험 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싸고 또 싸고 계속 싸고 싶었지.
좋아해, 사랑해, 결혼하자.
평소 안 하던 사랑 타령까지 해 댔다. 물론 결혼하자고 말한 뒤에 일순 철렁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 애랑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첫 경험이란 강렬하고 열정적이고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비단 저만의 일은 아니고, 거시기 달린 사내라면 대부분 그러할 터이다.
이환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저 자괴감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실장님.”
“…….”
“고이 간직해 오신 동정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실장님은 어엿한 남자이자 알파가 되신 겁니다.”
“해민 씨 입장을 생각해 봐.”
혹시나 삼십사 년을 지켜 온 동정에 미련이 남는 것일까 하는 마음에 충고 겸 위로를 내뱉었으나, 이환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서해민이 문제였나.
서해민의 입장이라면…….
“그건 좀…… 싫겠네요.”
“싫어?”
“일단 나이 차이가 열네 살입니다. 해민 씨 유치원 다닐 때 실장님은 대학교 입학하셨겠죠.”
이환의 얼굴에 자괴감이 짙어졌다.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임을 생각해 보자면, 고용을 빌미로 한 강압적 성행위로 느꼈을 수도 있고.”
“…….”
“해민 씨 본인이 오메가임을 진짜 몰랐다는 가정하에 첫 경험이었다면, 페로몬 작용으로 인한 성 경험에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쾅, 하고 책상이 울렸다.
윤경은 알파의 대가리란 대체 얼마나 단단한가 하는 감탄과 비싼 돈 들여서 튼튼한 책상을 구입한 보람을 느꼈다.
“자해는 그쯤 하시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보다 수습할 생각을 하시죠.”
“수습이 가능하긴 한가.”
“아니면 깔끔하게 돈 좀 쥐여 주고 내보내시든가요.”
재벌들이 가장 쉽고 빠르고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말해 주었으나 돌아온 건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윤경은 억울했다. 정작 사고는 본인이 쳐 놓고 왜 이쪽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내가 진짜 미친놈이지. 어떻게 그런 작고 어린 사람을 상대로.”
“확실히 어리긴 하죠. 작기도 하고.”
“닥쳐.”
“넵.”
“심리 상담이라도 받게 해야 할까.”
“그건 좀 너무 나가신 것 같습니다. 유난 떨지 마시죠. 실장님이 그러시면 해민 씨가 더 부담스러울 겁니다.”
이환의 반응이 웃겨서 조금 놀린 감도 있지만, 이제는 진지해질 때였다.
“평소보다 다정하게, 아니,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평소에 서해민을 애지중지하던 이환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서 더 애지중지했다가는 부담스러워서라도 도망간다. 이건 백 퍼센트의 확신이었다.
“평소처럼?”
“네. 평소처럼 행동하시면서,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괜히 무릎을 꿇는다거나 석고대죄를 한다거나 오버하지는 마시고요.”
“머리를 박아도 부족해.”
“그렇지만 진짜로 박지는 말아 주십시오. 아침에 출근하실 때 분위기가 나빴습니까?”
“그건…… 아닐걸.”
그래, 그랬다면 아마도 이환의 상태가 지금보다 더 저기압이었을 테니까.
서해민이 아침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딱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이야기만 잘 진행된다면 별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상황이 아주 최악은 아닙니다. 일단 해민 씨도 많이 당황했을 테니까, 놀라지 않게 상황 설명부터 해 주시고요. 오메가인 거 진짜 모르는 것 같았습니까?”
“그래. 형질 검사를 아예 안 받았던 모양이더라. 내일 병원에 데려가서 확실히 알아봐야겠지.”
“그럼 그전까지 잘 다독여 주십시오. 문제 될 일은 전혀 없고, 뭐든 서해민 씨 의견에 따르겠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원하는 만큼 준다고 하세요. 그게 제일 깔끔합니다.”
진지하게 윤경의 이야기를 듣던 이환이 주변을 더듬었다.
“왜 그러십니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자 모니터를 양손으로 움켜쥐는 이환을 보고 윤경이 달려가 몸으로 막았다.
“아, 왜요!”
“넌, 새끼야. 생각이 글러 먹었어. 인간성 없는 새끼.”
“이게 다 재벌들 사고 수습하는 비서의 자세거든요!”
“우리 집안에 이따위 사고 치는 놈들은 이제껏 없었어. 넌 대체 어디 가서 뭘 배워 온 거야? 너 다른 그룹 비서 놈들이랑 작당하냐? 너 스파이야?”
괜히 조언 한마디 했다가 소속 검증까지 당할 판이다. 모니터를 움켜쥔 손을 붙잡고 늘어지며 윤경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 말은, 일단 뭐든 해민 씨가 하자는 대로 따르라는 겁니다.”
“…….”
이환의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을 알아차린 윤경이 모니터를 뺏어 슬쩍 밀었다. 전원이 연결된 모니터가 밀리지 않음을 통탄하며 눈치껏 이환이 앉아 있는 의자를 뒤로 밀어냈다.
“실장님은 지금 해민 씨가 걱정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해민 씨가 어떤 기분일지, 어떤 마음일지, 지금 당장 짐 싸서 나간다고 하는 건 아닐지.”
“…….”
“그러니까 일단 잘 달래 놓는 게 우선이죠. 감정적으로 문제가 보이면, 무조건 실장님 잘못이라고 하세요. 그냥 다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나를 원망해라, 나를 때려라. 그렇게 말하면 진짜 원망하거나 때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걸 원한다면, 생각해 보시고 실장님이 감당 가능한 선에서 적당히 보상해 주세요.”
“너!”
“농담 아닙니다. 그렇게 하세요. 서해민 씨가 무슨 생각인지, 어떤 마음인지는 실장님도 저도 모릅니다. 이번 일로 그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버리려 할지도 모르죠. 일단 생각만이라도 해 두세요.”
“……그래.”
착잡한 마음은 알겠으나, 이환도 현실이 마냥 핑크빛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저 서해민이 적당히 욕심부리기를 바랄 뿐이다.
속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했듯이 사람 속은 누구도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정작 해민 씨는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게 뭐. 알파랑 잤는데 어쩌라고. 스무 살에 첫 경험이면 딱 적당하지.’ 이러면서 의외로 엄청 긍정적일 수도 있잖습니까. 생각보다 쿨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별로인데.”
“일단 실장님은 밀린 업무부터 보시죠. 퇴근하실 때, 제가 케이크라도 하나 사 오겠습니다. 그거 들고 들어가셔서 부드럽게 이야기 나눠 보세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이환을 어르고 달래며 비서는 오늘도 상사의 욕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도 월급 주는 사람이고,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셔야 할 사람이었다. 어쩌다 저런 사람 밑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했을까. 저 자신을 반성하며 퇴근 시간에 맞춰 케이크를 사러 갔다.
“아, 혹시 짧은 문구 같은 거 넣을 수 있습니까?”
그래도 나름 기념일이나 마찬가지인데.
표정 관리에 실패한 빵집 직원의 질색하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제가 원하는 문구까지 집어넣은 케이크를 퇴근하는 이환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은지, 케이크를 꺼내 확인한 이환의 표정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탈동정<축>첫경험]
이환의 손을 떠난 케이크가 윤경을 향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