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66)화 (66/172)
  • 66화

    Rotten Peter Pan

    “해민 씨는 어때?”

    집으로 들어서며 이정이 물었다. 포괄적인 질문이었으나 이환은 가볍게 응수했다.

    “아이 같은 요정님이지.”

    넥타이 매는 법도 모르고, 모든 것이 서투른 아이는 그럼에도 좌절하는 법 없이 의욕적이었다. ‘열심’이라는 글자를 사람으로 빚어 놓은 것처럼 정말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작은 손가락이 곰실곰실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는 맛이 제법 괜찮지. 머리통도 작더니,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체구도 작다. 그 작은 사람이 끙끙거리며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반쪽짜리 혈육인 쌍둥이 남매가 스물넷이었던가. 그 녀석들과 겨우 네 살 차이인데도 유난히 체구가 작고 아이 같다. 대신 속은 더 단단하게 여물어 기특한 한편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밥도 잘 먹고.”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은 마치 작은 짐승 같다.

    고기를 좋아한다 했지만 크게 가리는 음식도 없이 주는 대로 잘 먹는다. 작은 체구에 비해 꽤 많이 먹는 듯 보이지만, 얌전히 깔끔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라도 더 입에 넣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부지런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려 하고, 할 일 없이 방치되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그 모습이 이제껏 아이가 살아온 삶을 대변하는 듯하여,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여유를 강권하는 상황이었다.

    “요정님이 아니라 애완동물 키우는 느낌인데?”

    이환을 잠시 세워 두고 침실로 들어간 이정이 작은 쇼핑백을 가져와 건네며 지적했다.

    “애완동물이라니.”

    “요정님 상대로 모욕적인 말이었나.”

    살짝 찌푸린 이환의 표정을 살핀 이정이 웃음으로 무마하며 농담처럼 넘겼다.

    “선물은 뭐야?”

    “아, 그냥. 내 동생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요정님이잖아. 나타나 줘서 고맙다는 뇌물? 이런 거라도 먹여야 도망 안 가고 오래오래 있어 줄 거 아냐.”

    “요정님은 물욕이 없어.”

    “하지만 사람은 물욕이 있지.”

    날카로운 시선이 이환의 얼굴을 훑었다. 눈썹, 눈, 코, 입, 볼, 턱. 일그러지고 펴지는 얼굴 근육을 관찰하듯 잠시 바라보던 이정이 이내 낄낄 웃었다.

    “요정님도 보석은 좋아할걸. 그거 기억나? 보석 먹는 요정 이야기.”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른 색깔의 보석을 먹는 요정님이었지.”

    평소에는 하얀색, 기분이 좋을 때는 노란색, 화가 났을 때는 파란색,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붉은색 보석을 먹는 요정 이야기.

    “그때 형이 돈 많이 들어가는 요정님이라고 욕해서 내가 화냈던 기억도 나네.”

    하얀색 보석은 다이아몬드일 텐데, 평소에 다이아몬드를 먹는 요정이 특별한 날 다이아몬드보다 더 싸구려 보석을 먹을 리 없다고. 다른 보석들도 죄다 노란색 다이아몬드, 파란색 다이아몬드, 빨간색 다이아몬드일 거라고. 사람보다 더 비싼 보석을 밝히는 속물적인 요정이라고 비웃던 이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

    “응? 형이야 뭐 한결같은 사람이지.”

    “응. 한결같이 요정님을 존중하지 않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어떻게 요정님을 무시할 수 있어?

    질책이 담긴 시선과 질색하는 표정에 이정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요정이든 사람이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거지.”

    “요정님에게는 객관적일 수 없어. 요정님은 절대적이야.”

    열렬한 요정 신봉자에게 객관적인 관점은 불필요했다.

    “우리 환이가 아직 몰라서 그래. 사람이고 요정이고 다이아몬드라면 껌뻑 죽어. 내 와이프도 다이아몬드 아니면 취급을 안 하거든.”

    “재벌 집 장남으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쓰고 다니면서 시니컬한 척하지 마.”

    “우리 환이, 형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나이 먹었다고 이제는 형한테 못된 소리도 한다며 이환의 뺨을 꼬집어 흔든 이정이 정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요정님이 진짜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려나.”

    “내 요정님한테서 관심 껐으면 좋겠는데.”

    “해민 씨한테 한번 물어봐 줄래? 다이아몬드 먹을 수 있느냐고.”

    “해민 씨는 고기 좋아해.”

    “요정님이 육식주의자였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이정이 감탄했다.

    “고기는 무슨 고기 좋아하는데?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요정님의 식단에 관심이 많은 듯한 이정을 이환이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이랑 해민 씨가 같이 밥 먹을 일 없을 테니, 알 필요 없어.”

    “왜 같이 먹을 일이 없어? 환이랑 같이 있다 보면 언젠가 나랑도 밥 먹을 일이 생길 텐데.”

    “응, 그럴 일 없어. 해민 씨에 대한 관심을 버려 줘.”

    철벽보다 더 단단한 방어에 이정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우리 동생 옆에 있는 요정님이니, 형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있어야지.”

    “그 관심을 형수님한테 주지 그래.”

    “와이프는 내 관심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관심보다 눈에 보이는 현물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정의 뒤로 그의 아내가 눈을 흘기고 지나갔다.

    그래, 물을 마시러 주방에 들어가는 형수를 보며 일부러 꺼낸 말이다. 오늘 밤 냉전이 펼쳐지겠군.

    이런 이정의 모습은 배우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으며 이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요정님은 저대로 둬도 괜찮겠어? 못된 형제들에게 붙잡혀 해부당하기 직전인데.”

    정원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이환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수영과 마주 보고 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해민이 있었다. 이환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얼핏 못마땅함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날파리가 붙었네.”

    쌍둥이 중의 사내자식.

    마주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주변을 맴돌면서도 정작 다가와 말도 못 붙이는 답답한 놈.

    언제 한 번은 크게 결심한 듯 각오를 다진 얼굴로 다가와 “형님, 존나 멋지십니다.”라고 외치고는 그대로 도망치던 이상한 놈.

    다시 생각해도 정상이 아닌 놈이었다.

    저놈이 서해민에게 왜 달라붙어 있지? 머리는 정상이 아니어도, 눈알은 정상이었던가. 저놈 눈에도 서해민이 탐나 보였던 모양이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남들 눈에 안 좋아 보이겠느냐마는.

    쯧, 하고 혀를 차는 이환의 귀에 그의 발길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가서 구해 줘야지. 우리 왕자님.”

    어릴 때 종종 어머니가 부르던 호칭을 입에 올리며 이정이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

    그의 형은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저를 보며 웃었다. 이십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하지 않는 얼굴로 웃으며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던 얼굴을 이제는 내려다보게 된 이환은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그 감정을 모른 척 숨기며 몸을 돌렸다.

    “간다.”

    “요정님 간수 잘하고.”

    웃음기 섞인 인사를 무시하며 해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이환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선물이랍시고 건네준 여성용 시계 상자를 이정의 면상에 집어 던졌고, 예상치 못한 러트가 터진 그다음 날에는 ‘아이 같은 요정님’ 발언을 했던 저를 반성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러트 사이클을 보내고 난 뒤에는 항상 기분이 저조한 모습을 보이곤 하던 이환이 왜인지 멀끔하고 살짝 개운한 얼굴로 나타났다. 미묘한 변화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백윤경이 의아함을 감추며 일정 브리핑을 했다.

    “아, 해민 씨는 오늘 출근 안 합니까?”

    항상 껌딱지처럼 달고 다니던 서해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묻자, 이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해민 씨는…… 아파.”

    “저런. 여름 감기라도 걸렸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 종일 방치되어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해민과 과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이라도 걸렸나 싶어 물어보았으나 이환은 말을 아꼈다. 상사의 이상한 태도를 지적하지 않으면서도 일단 염두에 둔 윤경이 이환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러트 사이클 동안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줄을 서서 대기 중이었다. 맡은 업무에 한해서는 성실하나 가끔 무언가 비위가 상하면 어깃장을 놓는 상사의 성격을 알기에 옆에서 조율이 필요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일단 카페인부터 주입한 다음, 슬슬 시동을 걸어 볼까.

    슬쩍 눈치를 살피는 윤경의 눈에 쾅, 하고 책상에 이마를 박는 이환이 보였다.

    “……실장님?”

    “난 쓰레기야.”

    아침부터 자아 성찰이라.

    놀랍고 황당하고 당혹스럽고 낯선 장면이었으나, 유능하고 냉철한 비서인 윤경은 일단 눈앞의 장면을 부정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러트 사이클을 보내고 온 상사가 무언가 한 꺼풀 벗어던진 듯 개운한 얼굴을 하고 출근하여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아 성찰을 하고 있다.

    “실장님. 혹시…… 러트 사이클 때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윤경의 물음에 이환의 축 늘어진 어깨가 움찔했다.

    “설마, 여사님을…….”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질러 버린 이환을 상상하던 윤경의 머리로 무선 키보드가 날아왔다.

    “아니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가까스로 피해 낸 윤경이 벽에 부딪혀 박살 난 키보드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커피와 함께 키보드도 하나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군.

    “그럼 설마 해민 씨를?”

    그 집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이환과 여사님, 그리고 최근 입주한 서해민뿐이다. 지금까지 성욕을 꾹꾹 눌러 참아 오던 이환이 처음으로 사고를 쳤다면 그 상대야 뻔했다. 그러한 예상에 힘을 실어 주듯 이환이 이마로 책상을 쾅쾅 때렸다.

    “그 정도로는 책상이 부서지지 않으니 적당히 하세요. 신체 건강한 젊은 남자들이 사고 좀 칠 수 있지, 뭘 그렇게 유난을 떱니까? 솔직히 그 나이 먹도록 동정인 게 자랑도 아니고.”

    무성애자도 아니고 무성욕자도 아니다. 육체적인 성 기능에도 문제가 없다. 그저 강박적으로 참고 절제할 뿐.

    저러다 아랫도리가 썩는 건 아닐까, 상사의 컨디션을 살펴야 하는 비서로서 걱정을 느낄 정도였는데 다행히 거시기의 기능은 정상 작동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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