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먼저 자리해 기다리고 있던 이환이 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보며, 티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캡슐 커피 괜찮으세요?”
“그럼요.”
뭔들 괜찮지 않겠냐는 얼굴을 보며 내가 이환을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었나 잠시 생각했다. 이제껏 이환이 까탈스럽게 구는 모습은 정작 본 기억이 없는데도. 내심 부자들은 가리는 게 많고 까다로울 것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민 씨.”
“네, 실장님.”
의자에 앉아 컵을 테이블 위로 옮기고 쟁반을 치웠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분위기에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팔찌 찾았어요.”
“아, 팔찌를 찾, 네?”
뭘 찾아요?
잘 듣고 있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습관적 맞장구를 치다가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생각해 보니 팔찌가 눈에 띄긴 하더군요. 내 욕심에 해민 씨를 위험하게 만들었구나 반성했습니다.”
반성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그보다 팔찌를 어떻게 찾았는지에 대해 듣고 싶었다.
“해민 씨 말처럼 집에서만 하고 있어도 좋고, 불편하면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됩니다. 나 때문에 일부러 하고 다니지는 말아요. 선물이 해민 씨를 부담스럽게 한다면, 선물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습니까.”
아니, 팔찌를 끼고 다니는 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그걸 선물로 받는 순간부터 부담인데. 이환이 생각하는 부담의 범위는 내가 느끼는 부담의 범위보다 훨씬 더 작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내 앞으로 밀어 놓은 보석함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범인을 잡았거든요.”
“이렇게 빨리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한 삼 일 되었나. 그 도둑놈이 어지간히 소매치기를 하고 다녔거나 아니면 초짜였거나, 그도 아니라면 경찰들이 일을 엄청나게 열정적으로 했던 모양이다.
“제가 경찰서에 다시 가야 할 일은 없고요?”
이런 일을 겪어 봤어야 알지. 또 가서 무슨 서류를 작성하거나 범인과 대면을 해야 하지 않냐는 물음에 이환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증거까지 다 모아서 가져다줬으니, 해민 씨 증언이 없어도 징역형이 떨어질 겁니다.”
“증거를…… 가져다줘요?”
증거를 왜 이환이 가져다주지?
눈을 끔뻑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다 혹시 하는 생각에 입술을 벙긋거렸다.
“설마…… 실장님이 잡으신 거예요?”
“내가 잡은 건 아니고요. 그쪽 일 잘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니, 경찰을 두고 왜 그런 일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엔 찜찜하기도 하고,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래도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이죠?”
다행인가? 잘 모르겠다.
“해민 씨, 계속 신경 쓰고 있었잖아요.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표 안 내려고 혼자 속으로 많이 고생했던 거 압니다.”
“…….”
“범인도 잡혔고, 팔찌도 돌려받았고. 이제 털어 버려요.”
내가 계속 신경 쓰고 있으니, 경찰에게만 맡겨 두지 않고 직접 사람을 시켜 잡아 오다니. 마음 써 주는 이환이 고마운 한편, 그의 실행력에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왜인지 면구스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가 갑갑해서 괜스레 보석함을 열어 보았다.
“……실장님.”
“네.”
“이거, 제 팔찌 맞아요?”
“그럼요. 오랜만에 다시 봐서 낯섭니까?”
“아뇨. 같은 모양이긴 한데요. ……새것처럼 보여서요.”
분명 같은 팔찌이긴 했으나, 눈으로 보아도 손으로 만져 보아도 어느 모로 보나 새것이었다. 팔찌를 선물 받아 착용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받았을 때와는 달리 약간의 착용감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광택이라거나, 잔기스라거나.
지금 이건 착용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실장님?”
“해민 씨가 관찰력이 뛰어나네요.”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는 이환을 보며 못 알아채는 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팔찌 찾은 것도, 범인 잡은 것도…… 혹시 거짓말이에요?”
“아뇨. 그건 진짜입니다.”
“그런데 왜 팔찌가…… 새것이 되었을까요.”
혹시 팔찌를 이미 팔아 버려서 범인이 돈으로 보상해 줬나? 그래서 새것으로 사 온 걸까.
“원래 팔찌를 돌려받았는데,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의 손 탄 물건을 해민 씨에게 주기가 싫더라고요.”
옆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에서 꺼낸 팔찌를 테이블 위에 툭 던지듯 올려놓으며 이환이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케이스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팔찌. 사용감이 남아 있는 저것이 내가 끼고 있었고 도둑맞았던 바로 그 팔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건…….”
“새로 사 왔습니다.”
남이 입었던 빤스나 양말도 아니고. 도둑맞았던 귀금속을 되찾았는데, 잠시 남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고 새것으로 다시 사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거 가지고 있을게요. 새로 사 오신 건 환불해 오세요.”
“안 됩니다.”
손을 뻗어 원래 내 팔찌를 집으려 하자, 이환이 한 박자 빠르게 그것을 집어 쇼핑백 안에 쏙 던져 넣었다.
“내가 불쾌해서 싫습니다. 해민 씨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릴까 봐 걱정도 되고요.”
협상의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한숨이 나왔다.
“해민 씨가 흔쾌히 받아 준다면, 새롭게 사 주기로 했던 팔찌 두 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아니,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협상 제안을?
“그래도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이 예전 것을 주겠지만. 벌 받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게 저인가요?”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정말 저인가요?
이환의 양심에 호소했으나, 양심 대신 동심밖에 남지 않은 남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지고 있겠습니다.”
케이스에 들어 있는 새 팔찌를 손에 쥐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해민 씨.”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나. 일단 긴장부터 되었다.
“네, 실장님.”
“이거 가지고 있어요.”
이환이 내게 건넨 것은 약봉지였다. 뜬금없는 약봉지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안을 열어 보자, 작은 종이상자가 보였다.
“약이네요?”
갑자기 약을 왜 나한테? 상비약이라고 해도 너무 뜬금없는데.
상자를 꺼내 겉면을 살피자 ‘페로몬 억제제 오메가용’이라고 적힌 문구가 보였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을 담아 이환을 바라보았다.
“페로몬이 짙어지고 있어요. 지난달 해민 씨에게 히트 사이클이 온 날짜에서 한 달이 지나기도 했고요.”
“그, 그럼 이렇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러다 또 이환에게 러트 사이클이 올지도 모르고, 나도 지난번처럼 몸이 또 이상해질지도 모르고.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나를 진정시키듯, 이환이 내 손을 붙잡아 토닥거렸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때는 해민 씨나 나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서로 면역이 없었던 탓에 휘둘린 감이 커요. 이제는 페로몬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니, 미리 주의하면 됩니다. 걱정 말아요.”
“약은…… 언제 사 오신 거예요?”
“퇴근하고 오는 길에요. 해민 씨 페로몬이 평소보다 살짝 짙은 걸 아침에 느꼈거든요. 아직 몸이 아프다거나 이상하지는 않죠?”
“……네.”
“아마 새벽이나 내일 아침쯤에 체감할 수 있을 겁니다. 옆에 뒀다가 그때 바로 먹도록 해요. 약을 먹으면 조금 멍하고 갑갑한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몸이 무겁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고요. 처음 먹으면 약 효과 때문에 당황할 수도 있는데 한숨 자면 조금 나을 겁니다. 출근 전에 여사님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내일은 방에서 푹 쉬도록 해요.”
새벽이나 아침.
손에 쥔 약상자를 꽉 움켜쥐며 이환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제가…… 며칠 다른 곳에서 지내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히 실장님까지 휩쓸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안 됩니다. 내가 옆에 없어서 해민 씨가 체감하는 히트 사이클 증상이 약해진다고 해도, 그게 히트 사이클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에요. 괜히 다른 곳에 있다가 나 같은 놈이 주변에 나타나면 어쩔 겁니까.”
이환 같은 놈은 이환밖에 없던데. 의사도 이환과 비슷한 말을 하긴 했지만, 이환 같은 사람을 또 만나기란 확률적으로 낮지 않을까. 오메가는 그 낮은 확률마저도 걱정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들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럴 바에야 내가 며칠 호텔에서 지내겠습니다.”
“아녜요!”
나 때문에 고용주를 집에서 내쫓을 수는 없다. 차라리 이환의 말을 듣고 얌전히 약을 먹은 뒤 방에 처박혀 쉬는 편이 낫다.
“그냥 약 먹고 얌전히 방에 있을게요.”
“잘 생각했습니다. 자기 전에 미리 마실 물도 챙겨 들어가도록 해요.”
웬만하면 방 밖으로 나와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돌려 말해 주는 배려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 씨 고생할 거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네요.”
다가온 손이 살며시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아직은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게 아니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환의 손이 스치는 피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