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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63)화 (63/172)
  • 63화

    내 질문에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이환이 여사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사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심장이 벌렁거려서 노인네 세상 하직할 뻔한 거 말고는 괜찮아요.”

    고생보다 그게 더 심각한 일인데요!

    팔찌를 도둑맞은 일보다 소매치기범을 뒤쫓아간 게 더 큰 문제였나 보다. 여사님도 그렇고 이환도 그렇고, 도둑맞은 팔찌보다 소매치기범을 뒤쫓은 내 행동에 대해서만 계속 혼내고 있으니까.

    “실장님.”

    처음 보는 사람이 다가와 이환을 불렀다. 그는 나와 여사님에게 살짝 고개인사를 한 뒤, 이환을 이끌어 파출소 밖으로 나갔다. 유리문 너머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분은 누구예요?”

    “도련님 밑에 있는 직원이겠지.”

    “여사님도 처음 보세요?”

    “내가 도련님 회사 직원들하고 만날 일이 뭐 있다고. 김 기사나 저기 백 비서 같은 양반 아니고서야 몰라.”

    그렇긴 하다. 가족이라고 해도 가족이 다니는 회사 사람들을 알고 지내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김 부장 개새끼, 이과장 소 새끼 하고 욕할 때 이름 정도만 들어 보려나.

    “주말 밤인데 죄다 끌려오셔서 죄송하네요.”

    정작 사고 친 사람은 이렇게 편히 앉아 있어서 더 미안했다.

    “잘못은 도둑놈이 했고, 해민 씨는 피해자인데.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그냥 고맙다고 인사나 해요. 그나저나 집에는 언제 가려나. 해민 씨 상처도 소독해야 하는데.”

    “이 정도는 사실 그냥 둬도 괜찮은데요.”

    “껍질 까진 게 더 쓰라려. 잘못하면 곪을 수도 있고.”

    어이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여사님이 파출소 문을 열고 이환을 불렀다.

    “도련님, 우리 언제 가요. 늙은이 이러다 파출소에서 잠들겠네.”

    여사님의 채근에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이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일단 먼저 집으로 가죠.”

    “그래도 돼요?”

    “그럼요. 이야기도 끝났는데 해민 씨가 계속 있을 필요는 없죠. 나머지는 여기 경찰분들이 다 해 주실 겁니다.”

    이만 집에 가자고 내미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분들은요?”

    “저 사람들은 알아서 잘 갈 겁니다.”

    아니, 나 때문에 부른 사람들 같은데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거냐고.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이환이 여사님과 나를 이끌고 파출소를 나섰다. 문 앞까지 따라 나온 경찰이 조심히 들어가시라며 인사를 했다.

    “해민 씨, 타요.”

    파출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님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여사님, 저희 주차해 둔 차는요?”

    “내일 가져오면 돼. 걱정 말고 타요.”

    주차비가 걱정되었으나 여사님이 피곤해 보이셔서 얼른 차에 올랐다. 여사님이 한발 먼저 조수석을 차지하신 탓에 이환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팔찌…… 도둑맞아서 죄송해요.”

    “왜 해민 씨가 죄송합니까. 내가 그놈 잡아서 혼내 줄게요. 팔찌는 더 예쁜 거로 사 주겠습니다.”

    “이제 사 주지 마세요.”

    강경한 목소리로 딱 잘라 거절을 했다.

    “사 주셔도 안 하고 다닐 거예요.”

    내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걸 하고 다녔으니 괜히 애먼 놈들이 탐을 내지.

    애초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번쩍번쩍한 금팔찌를 그리 무방비하게 걸치고 다니면 안 되었다. 목걸이는 옷 안쪽으로 넣고 다니니 보이지나 않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더 일찍 도둑맞지 않았던 게 용했다.

    “제대로 간수도 못 하고. 밖에 나갈 때는 빼고 다닐 걸 그랬어요.”

    “나 때문에 차고 다닌 거 압니다. 자책하지 말아요.”

    내 손을 붙잡아 토닥토닥 두드리며 이환이 위로했다. 물론 팔찌를 도둑맞은 상황에서 조금도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보다 해민 씨 손 다친 게 더 속상하네요.”

    “손목은 그냥 살짝 긁힌 건데요.”

    “다친 건 다친 겁니다. 집에 가자마자 소독부터 해야겠어요.”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아 살피며 이환이 혀를 찼다.

    “저녁은 먹었다고요?”

    “네.”

    “뭐 먹었습니까. 맛있는 거 먹었어요?”

    “네. 여사님이 사 주셔서 갈비랑 막국수랑 메밀전 먹었어요.”

    “다행이네요.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안 좋은 일만 겪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저 때문에 여사님만 고생하셨어요. 기분 좋게 저녁도 먹었는데.”

    “해민 씨 때문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런 말 하면 진짜 혼구녕을 낼 거야.”

    앞에서 듣고 있던 여사님이 노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하지도 말고. 도련님, 해민 씨 좀 혼내요. 아까부터 계속 죄송하다고 하네.”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 속에 걱정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이환도 장단을 맞추듯 “그래야겠네요.” 하고 긍정했다.

    “어떻게 혼을 내 줘야 할까요. 해민 씨가 엄청 싫고 무서운 방법으로 혼을 내야겠는데.”

    아니, 죄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혼이 나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이환이 음, 하고 말을 끌었다.

    “해민 씨가 죄송하다고 말을 한 숫자만큼 팔찌를 사 줘야겠습니다.”

    “네?”

    “오늘 몇 번 죄송하다고 했습니까.”

    “차에 타신 뒤로는 두 번이었습니다.”

    보통 있는 듯 없는 듯 운전만 하시던 기사님이 끼어들어 넌지시 말했다. 방심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허, 하고 헛숨을 내뱉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개는 확실히 적립되었는데. 아직도 죄송합니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걸 말할쏘냐.

    꾹 입을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 ∞ ∞

    “해민 씨.”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는데, 식당을 나가지 않고 잠시 앉아 있던 이환이 나를 불렀다.

    “네, 실장님.”

    “차 한잔할까요.”

    “아, 커피 가져다드릴까요?”

    평소 커피 정도는 본인이 타 마시기에 뜬금없는 요구가 의아했다. 물론 고용주가 커피를 요구하든 홍차를 요구하든 조금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환은 본인이 움직이는 게 더 빠르고 편하다는 이유로 커피만큼은 직접 타 마시곤 했다.

    오늘은 남이 타 주는 커피가 마시고 싶은가 보지.

    “그럼 커피랑 해민 씨 마실 것도 준비해서, 삼십 분 뒤에 이 층 티 테이블에서 보죠.”

    “저도요?”

    “같이 티타임 갖자는 요청입니다. 나만 마실 거였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죠.”

    커피 타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같이 차 마시자는 뜻이었구나.

    배가 불러서 당장 뭘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환이 무언가 할 말이 있거나 혹은 분위기를 잡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분 뒤에 가지고 올라갈게요.”

    “부탁해요.”

    살포시 웃으며 식당을 나가는 이환을 보다가 빈 접시를 재빠르게 포개어 쟁반에 올렸다.

    싱크대에 그릇을 옮겨 놓고 애벌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식기세척기에 넣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고, 되는 것들만 식기세척기에 차곡차곡 넣어 둔 뒤에 돌려 놓고, 싱크대에 남아 있는 칼이나 냄비는 재빠르게 손 설거지로 마무리.

    여사님이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해 준다고 해서 그냥 몽땅 넣고 돌리는 줄 알았는데, 실상을 알고 보니 그냥 전부 손으로 설거지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복잡했다. 이럴 거면 왜 식기세척기를 쓸까 의아했지만, 식기세척기에 살균 기능도 있다고 하니까. 부자들이 유기농 사 먹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이해하기로 했다.

    “해민 씨는 손이 참 야무져.”

    옆에서 지켜보며 식기세척기 사용 가능한 주방용품 구분에 도움을 주던 여사님이 칭찬했다.

    “그 나이에는 사실 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두는 것도 안 하거든.”

    “나이 문제인가요. 필요에 의한 행동이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다 해요. 처음엔 어설퍼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요.”

    “그러게. 마냥 칭찬할 일만은 아니네.”

    어려서부터 안 해 본 잡일이 없으니 손끝이 야무지다는 칭찬을 들을 만도 하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던 여사님이 씁쓸하게 웃더니, 그래도 참 착하다며 내 등을 두어 번 쓸어 주셨다.

    “아까 도련님이 차 마시자고 하시던데.”

    “네. 이제 준비해야죠.”

    “해민 씨 마실 건 내가 타 줘야겠다. 뭐 마실래요?”

    “제가 할게요.”

    “내가 해 줄게. 설거지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이 정도는 내가 해 줘야지.”

    내내 옆에서 도와주느라 편히 쉬지도 못하셨으면서.

    “꿀차 어때요?”

    “꿀차 좋아요.”

    “나도 한 잔 마셔야겠다.”

    물을 끓이던 여사님이 원두를 찾아 꺼내는 나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언제 원두 내리려고. 캡슐 머신 써요.”

    “보니까 원두커피를 자주 드시더라고요.”

    “그렇기는 한데 캡슐 커피도 잘 드셔. 별말 없었으면 그냥 머신으로 내려요.”

    이환을 끔찍이 생각하는 여사님이지만, 묘한 곳에서 슬렁 넘기는 부분도 있었다.

    “캡슐 커피가 싫었으면 커피 머신부터 가져다 버렸을 양반이야. 호불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데. 그 집 사람들이 다 그래요. 성질내며 악을 쓰거나, 입 꾹 다물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밀고 나가거나, 사람 교묘하게 조종해서 제가 원하는 대로 만들거나. 성격만 다르지 다들 본인들 원하는 건 기어코 하는 사람들이라니까.”

    빈 컵에 꿀을 듬뿍 담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달짝지근한 꿀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실장님은 어느 쪽이신데요?”

    “글쎄.”

    아무래도 두 번째이려나. 성질내며 악을 쓰는 이환은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내 물음에 여사님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꿀차와 커피를 쟁반에 담아 건네주었다.

    “올라가 봐요.”

    “감사합니다.”

    주방을 정리하며 꿀물 한 잔을 더 타는 여사님을 보다가 쟁반을 들고 이 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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