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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62)화 (62/172)

62화

아니다. 팔에 번쩍번쩍한 금팔찌를 보란 듯이 끼고 있었으니 저 새끼가 군침을 흘릴 법도 했다. 내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내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무슨 상관일까. 일단 팔에 값나가는 것을 끼고 무방비하게 서 있는데. 저 새끼 입장에서는 안 훔치면 병신인 상황이었을 터이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나를. 그나마 값나가는 거라고는 팔찌가 유일한데. 아니, 목걸이도 있으니 유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돈 주고 산 것도 아니고 이환이 준 거라서 돈이 쪼들려도 언감생심 팔 생각조차 안 해 본 물건인데. 선물 받았다기보다 잠깐 대여한 거라고 생각하며 겨우겨우 부담감을 눌러 놓고 있었는데, 그걸 훔쳐?

나쁜 새끼. 벼룩의 간을 빼 먹을 새끼.

“해민 씨! 쫓아가지 마!”

뒤에서 들리는 여사님의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남자의 뒤를 따라 달렸다. 도롯가에서 골목으로 들어가 달리는 남자의 뒤를 쫓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길이 막히는 일은 없었지만, 그 장점은 저놈에게도 해당되었다.

길을 잘 알고 있는지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놈이 막다른 골목에서 담을 탔다. 아마도 쫓아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막다른 골목으로 유인한 모양이다.

그게 너의 패착이다. 내가 지구력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운동 신경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거든.

크게 뛰어올라 반쯤 넘어간 남자의 허리춤을 붙잡아 매달렸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놔.”

내 팔찌.

“미친.”

“내놓으라고.”

“하, 씨발.”

죽을 기세로 매달리는 나를 떨쳐 내기가 힘들었는지 남자가 담벼락 아래로 내려오며 나를 걷어찼다.

“미친 새끼가, 죽고 싶냐?”

정말 뻔한 패턴으로 주머니에서 폴딩 나이프를 꺼내 칼날을 세웠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칼날이 번쩍거렸다.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칼이 현실적이지 못했다.

“……이십 대 중반? 후반?”

“뭐?”

“왼쪽 눈썹 아래 점. 턱에 점.”

“이 새끼가 진짜.”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내가 특징을 잡아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버럭 화를 낸다. 팔찌를 강탈당한 것도 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도 나인데 왜 자기가 화를 내.

“죽고 싶어?”

“팔찌 놓고 가면 신고 안 해. 팔찌 들고 튀면 신고할 거야. 너 붙잡을 때까지 경찰서 앞에서 시위한다. 매일 찾아가서 달달 볶을 거니까, 귀찮아서라도 너 잡아 오겠지. 넌 어떻게든 잡혀.”

“하, 미친 새끼.”

“해민 씨!”

저 멀리서 여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입막음을 해야 하나, 도망을 쳐야 하나 고민하는 모양새다. 소매치기는 해도 사람 죽여 입막음을 할 배짱은 없는 놈인가. 그러면서도 훔쳐 간 팔찌를 돌려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어느 집 담벼락이 닿았다.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보았지만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었다. 기껏해야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가 전부.

“씨발,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해민 씨!”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남자는 근처까지 다가온 목소리에 욕설을 뇌까리고는 담을 넘어 도망쳤다.

“해민 씨이!”

“여사님. 여기요.”

후들거리는 팔로 땅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헉헉거리며 뛰어온 여사님이 내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곳은?”

“도둑놈은요?”

“막다른 골목이네. 어디로 도망갔어요?”

여사님을 뒤따라온 사내 세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담 넘어 도망쳤어요.”

내 대꾸에 에이, 하고 혀를 찬다. 어떤 스펙타클한 모험을 기대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낯선 사람을 위해 위험한 일에 선뜻 나서 준 사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제가 오면서 신고했거든요. 지금 여기로 온다고 하네요.”

“아, 술이 다 깨네.”

“평소에 운동 좀 해라, 새끼야.”

경찰과 통화를 했는지 한 사내가 내게 말했다. 같은 무리였는지 허리를 굽히며 구시렁거리는 사내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는 또 다른 사내.

“해민 씨. 어디 다쳤어?”

“안 다쳤어요. 걱정하셨죠, 여사님.”

“당연히 걱정했지. 쫓아가지 말라니까. 뭘 훔쳐 간 거야?”

“팔찌요.”

“도련님이 주신 거?”

“……네.”

“그렇다고 그런 위험한 놈을 쫓아가? 그런 물건보다 몸 걱정부터 했어야지.”

엄한 표정으로 꾸중하면서도 걱정을 놓지 못하는 여사님을 보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나 역시도 도둑놈이 휘두르는 칼을 보며 뒤늦게 후회했으니까.

얼마간 서서 기다리자 경찰들이 찾아왔다. 불타는 주말 저녁에 시간을 내어 자리를 지켜 준 사내들에게 경찰관이 한 명, 그리고 나와 여사님에게 다른 경찰관이 한 명 붙어 자초지종을 들었다.

사건을 접수하려고 경찰들과 함께 서에 가기로 했다. 신고도 해 주고 함께 있어 준 사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경찰차에 올랐다.

“나는 아직도 심장이 떨려. 갑자기 해민 씨가 소리 지르며 뛰쳐나가서 얼마나 놀랐던지. 돈보다 중요한 게 사람 목숨이에요. 칼도 가지고 있었다면서.”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누르며 여사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도련님이 아시면 난리 나겠네.”

“실장님한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비밀을 도모하려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화가 왔다. 액정 위에 이환의 이름이 떠 있었다.

“…….”

“아휴, 난 몰라.”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여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비밀스러운 수습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그냥 무시할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진짜로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부재중 전화 56통의 악몽이 재현될 것이다.

“……여보세요.”

―나 집에 가는 중입니다. 해민 씨도 저녁 먹었겠죠?

“네.”

저녁만 먹었다 뿐인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맛있는 거 먹었어요?

“네……, 맛있는 거…… 먹었죠.”

이런 건 집에 와서 이야기해도 될 텐데, 굳이 전화로 묻는 이유는 뭘까. 경찰차 뒤에 타서 저녁밥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해민 씨.

“네, 실장님.”

―화장실이에요? 아니, 밖인가? 소리가 좀 울리는데.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경찰차가 멈추고 차 문이 열렸다.

―밖이네요?

잠시 말이 없던 이환이 다시 물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환하게 불이 켜진 파출소를 바라보며 먹먹한 목소리로 이환을 불렀다.

“……저 지금 ……파출소예요.”

놀러 온 건 아니고요. 어쩌다 보니 여기 오게 되었네요.

담담한 내 고백에 이환은 잠시 침묵했다.

∞ ∞ ∞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이환이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파출소에 등장했다. 그와 비슷하게 그가 부른 변호사라는 사람과 백윤경과 누군지 모를 사람까지 찾아왔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나와 여사님은 파출소 한쪽에 놓인 의자에 방치되어 앉아 있었고, 이환과 그의 사람들이 경찰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함이 오간 뒤, 경찰들은 마치 서비스 직원처럼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채 열심히 상황 설명을 했고 이환과 그의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질문을 했다.

“일이 커진 것 같아요.”

“일이 커지긴. 이만하길 다행으로 생각해야죠. 해민 씨가 다치기라도 했어 봐. 아주 난리 났을 거야.”

“죄송해요, 여사님.”

이미 난리는 나 버렸잖아요.

저녁 한 끼 먹으러 나왔다가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맥주 한 잔으로 기분 좋게 식사를 마무리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파출소에서 마무리를 하게 생겼다.

“해민 씨. 다친 곳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상황을 맡겨 두고 빠져나온 이환이 다가와 물었다.

“네. 멀쩡해요.”

“칼까지 휘둘렀다면서요.”

“그냥 위협만 하려던 것 같아요. 실제로 찌르거나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 오는 소리에 도망쳤거든요.”

“애초에 따라가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도둑이 강도로 변하는 건 아주 쉬워요. 그런 사람들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조금만 자극해도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팔찌를 훔쳐 가서 어쩔 수 없었다. 내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이라 부담스러우면서도, 이환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내 팔목에 보관해 두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어찌어찌 차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그걸 눈앞에서 도둑맞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이환의 성격에 선물로 준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물어내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부채감이 배가 되어 짓누르는 기분이다.

빈 손목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자, 이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손목, 다쳤네요.”

“팔찌를 빼 가면서 쓸렸나 봐요.”

찔리거나 베이지는 않았지만, 잠금장치를 풀어 팔찌를 빼 가며 손목을 긁었는지 피부가 얕게 까져 벌겋게 부어 있었다.

“병원 가서 치료부터 해야겠네요.”

“……집에 가서 소독하면 됩니다.”

이런 거로 병원 가면 욕 먹어요. 내 핀잔에 이환은 욕 좀 먹고 말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모처럼 여사님이 내 의견에 힘을 실어 준 덕분에 병원행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님은 왜 오신 거예요?”

“…….”

왜인지 이환은 말이 없었다.

“혹시 제가 사고 친 줄 아셨어요?”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이환을 보며, 내가 사고 치고 다니게 생겼나 하고 잠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구나. 이거 그거죠? 묵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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