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항상 당당해야 돼. 십 년 전만 해도 여자가 운전하는 걸 엄청 고깝고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여전히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때는 옆에 와서 힐끗 보고 운전자가 여자다 싶으면 창문 내리고 욕부터 하는 놈들이 많았어요.”
“와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길에서 대뜸 쌍욕을 먹어도 황당할 텐데. 운전하다 욕을 먹으면, 가뜩이나 덜덜 떨리는 상태에서 완전 패닉이 올 듯했다.
“세상이 험하다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면전에서 대뜸 욕먹을 일이 얼마나 있겠어. 그때는 진짜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물부터 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생각하니까 너무 열 받는 거야. 저놈들이 전세 낸 도로도 아니고, 내 차를 내가 운전하는데 뭐가 문제지? 왜 저놈들은 저렇게 당당하고 나는 이렇게 주눅이 들어야 하지?”
“그래서요?”
“그다음부터는 같이 쌍욕을 해 줬어.”
“……네?”
“초보 때는 악을 가지고 운전해야 돼.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무시할 정도로 무던하거나, 아니면 같이 악다구니할 정도로 독기가 있어야 버틴다니까. 그런 시기를 거쳐서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지면 그런 일도 없어져요.”
“…….”
뭔가 유익한 경험담을 들었는데, 그 유익함 속에서 광기를 엿본 기분이다. 떨떠름함을 숨기며 네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에서 운전하게 되면, 도련님한테 비싼 차로 끌고 나가자고 해서 연습해요. 차들이 알아서 피할 테니까, 사고 위험은 좀 적을 거야.”
“수리비 무서워서요?”
“씁쓸한 이야기지만, 뭐 그렇지.”
수리비가 무서운 건 다른 차의 운전자들만이 아닌데. 그 누구보다 두려운 사람이 바로 나임을 여사님은 알지 못했다.
“뭐를 먹을까. 해민 씨, 옆에 가게들 보면서 먹고 싶은 거 찾아봐요. 일단 시장 쪽으로 가 볼 테니까.”
“여사님은 뭐 드시고 싶으신데요?”
“글쎄. 맛있는 게 먹고 싶은데, 딱히 이거다 싶은 건 없네.”
어렵다. 특정되지 않는 맛있는 거.
“해민 씨, 점심때 만날 스테이크니 한우니 이런 거 먹고 다니죠?”
“네.”
“사람이 어떻게 레스토랑에서만 밥을 먹어. 가끔은 불판에 삼겹살도 구워 먹고, 닭발에 소주도 한잔하고, 시장 바닥에서 국수도 한 그릇 먹고 그래야지.”
“그건 맞아요.”
요즘 너무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만 밥을 먹었다. 그 외에는 여사님이 차려 주시는 집밥을 먹지만, 그마저도 가정식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상차림 음식의 퀄리티가 매우 높았다.
꿈도 못 꿀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가끔은 사발면이나 MSG 잔뜩 들어간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내 팔자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음식을 먹어서 이러나, 이런 게 배부른 투정인가 싶었는데. 여사님이 내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해 주어 마음이 편해졌다.
“뭐를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톡톡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며 주변을 훑어보던 여사님이 빨간불에서 초록 불로 바뀌는 신호를 보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해민 씨도 술 마시나? 아, 저번에 맥주 마셨구나.”
“네.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요. ……돈 아까워서.”
술 마실 돈으로 차라리 밥 한 끼를 사 먹겠다. 밥 먹을 돈으로 술을 마시는 아저씨들도 많이 봤지만, 공사장 일이 힘들어도 아직 술을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치킨 어때요. 맥주 한 잔 같이 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곱창? 감자탕도 좋고, 아구찜도 좋고. 이 근처에 막국수 잘하는 집도 있어. 보쌈이나 족발도 좋고. 삼겹살이나 돼지갈비도 좋고. 소도 좋지만 가끔 돼지가 당기더라.”
먹고 싶은 것으로 골라 보라며 선택지를 주었는데, 오히려 더 선택하기가 어려워졌다. 뭐 하나 고르기가 미안할 정도로 국민 음식들이었다.
“와, ……이렇게 어려운 문제는 처음이에요. 검정고시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내 너스레에 여사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부 먹지는 못하겠지만, 몇 가지만이라도 골라 봐요. 탕이나 찜을 먹을까, 돼지를 먹을까?”
“돼지요.”
“그럼 삶은 돼지? 구운 돼지?”
“구워 먹는 돼지!”
죽이 딱딱 잘 맞는다며 여사님이 좋아하셨다. 외식이야 매일 점심마다 하고 있지만, 밥 먹으러 나가며 이렇게 들뜬 건 진짜 모처럼이라서 나 역시 유쾌했다. 외식을 도모하며 여사님이 통 크게 “내가 쏜다.”라고 말씀하셔서 더더욱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좋아, 좋아. 그럼 구워 먹는 고기로 살짝 배를 채우고, 막국수 집에 가요. 막국수는 꼭 먹어 줘야 해. 이 동네 60년 된 맛집이거든.”
“진짜요?”
“진짜인지는 모르지. 자기네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해. 그래도 맛은 있어요.”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맛 하나만큼은 보증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킨에 맥주 한 잔씩 하고 들어가면 되겠다.”
“다 먹을 수 있을까요.”
“괜찮아. 입에 넣으면 다 들어가. 과식만 안 하면 돼요.”
고기를 먹고 막국수를 먹은 다음 치킨을 먹겠다는 계획부터 과식이 예정되어 있는데요.
“고기는 일 인분씩만 먹어요. 밥은 먹지 말고 고기만 먹어, 고기만. 그리고 막국수를 한 그릇씩 먹은 뒤에, 입가심으로 치킨 반 마리에 맥주.”
여사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어디까지나 링에 올라가기 전의 그럴듯한 계획이지만, 일단 지금 듣기에는 원대했다.
“해민 씨랑 이렇게 나오니까 너무 좋다. 가끔 장 보러 나와서 점심 사 먹고 들어가기도 하거든요. 나 혼자 먹으려고 밥 차리기엔 귀찮고, 또 남이 차려 주는 밥이 먹고 싶을 때가 있어서. 그런데 이상하게 외식할 때 혼자 먹으면 맛이 덜해. 참 이상하지.”
그러니까 오늘 모처럼 같이 나온 김에 돼지와 막국수와 치킨 정도는 먹어 주고 들어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 돈 내주는 사람이 그러하다니 나야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뿐.
근처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해 두고 먼저 갈비를 먹으러 갔다. 넓은 갈빗집은 토요일 저녁이라는 특수를 타서 꽤 붐볐다. 겨우 테이블 하나를 잡아 고기를 시켰다. 가볍게 일 인분씩 총 이 인분. 서비스로 나오는 된장찌개를 보자 맛이나 보자며 밥 한 그릇을 시켜 여사님과 반씩 나눠 먹었다.
이때부터 조금씩 여사님의 원대한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돼지갈비를 배추에 싸 먹고, 상추에 싸 먹고, 깻잎에 싸 먹고, 명이나물에도 싸 먹었다. 나온 반찬도 깨끗이 비웠다. 맛만 보자던 된장찌개도, 밥과 함께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오랜만에 먹으니 진짜 맛있다.”
“그러게요. 양념이 괜찮은 것 같아요.”
“응. 이 집 고기도 괜찮네. 일 인분씩 먹으니 먹다 만 기분인데, 다음에 날 잡고 와서 배부를 때까지 먹어 볼까요?”
그렇게 먹고 난 뒤에 근처에 있는, 육십 년 전통 맛집이라는 막국숫집에 갔다. 막국수만 먹기엔 아쉬우니 막국수와 함께 잘 나간다는 메밀전도 하나 시켰다.
여사님의 말처럼 막국수는 맛있었다. 몇십 년 전통은 모르겠지만, 직접 메밀면을 뽑아서 만든다더니 면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했다. 기본 반찬은 무생채와 백김치 두 가지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맛있어서 리필을 해 먹었다.
“저 메밀전 처음 먹어 봐요.”
“간장 찍지 말고 그냥 먹어 봐요. 이게 삼삼하면서도 고소하거든.”
막국수와 메밀전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을 때, 배가 터질 듯한 포만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소화가 되어 가는 탓에 더 배부르게 느껴지는 듯했다.
“치킨은 못 먹을 것 같은데요.”
“그러게. 너무 배부르네. 막국수를 조금 남길 걸 그랬나.”
막국수의 문제만이 아니라, 된장찌개에 밥을 먹었을 때부터 잘못된 듯합니다.
“이래서야 치킨은 못 먹겠네. 그래도 그냥 들어가긴 아쉬우니까 맥주나 가볍게 한잔할까요.”
안주로 치킨을 시키면 되겠다며 근처 술집을 찾는 여사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치킨을 먹으며 맥주를 한잔하는 것과 맥주를 마시며 치킨 안주를 먹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바나나 일곱 개를 두고 아침에 세 개를 먹을지 저녁에 세 개를 먹을지 고민하는 자발적 원숭이인가.
부른 배를 움켜쥐고 넋부랑자처럼 멍하니 서 있노라니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치는 일이 생겼다. 주말 저녁이다 보니 벌써부터 취한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러다 괜히 시비 걸려서 욕먹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길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였다.
“엇.”
회식인지 친목 모임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앞으로 지나가면서 몸이 떠밀렸다. 그리고 팔이 쓸리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에 긁힌 건지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허전함을 느끼고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도둑! 도둑이에요!”
나를 지나쳐 간 사람들, 그리고 나와 가까워지던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유일하게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한 사람이 무리를 헤치며 앞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새끼.
검은색 바람막이 점퍼에 남색 모자.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 새끼가 유력한 용의자다.
“저기요.”
사람들을 헤치며 남자를 불렀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무리를 빠져나가 홀로 걸어가던 남자가 내 부름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그리고 내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확신했는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같은 무리인 척 섞여 걸었지만 저렇게 급발진해서 도망가는 것을 보면 위장이었던 모양이다.
개새끼. 돈 많은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을 소매치기할 것이지, 하필이면 골라도 나같이 가진 것 없는 놈을 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