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60)화 (60/172)

60화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환경, 그런 것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더욱 확고하고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경험해 봐야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파악하기가 수월하죠.”

확실히 범인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환과 나의 차이를 느꼈다.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그 사람을 구성하는 세계는 넓어져요. 나는 해민 씨가 많은 것을 경험한 뒤에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단단히 서 있기를 바랍니다.”

점심 한 끼 먹는 것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고, 그러한 생각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왜인지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끌어당겨 웃으며 올라온 것을 뱉어 내지 않으려 목구멍을 꽉 조였다.

“……이러다 입맛만 고급스러워질 것 같은데.”

“고급스러워진 입맛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먹으라며 웃는 이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인 한 잔 더 할까요.”

손을 까닥여 직원을 부른 이환이 와인을 부탁하고, 내 앞에 길쭉한 케이스를 밀어 주었다. 지난번의 경험으로 이 고급스러운 상자가 귀금속 케이스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작 주문 넣었던 목걸이입니다.”

조심스럽게 열어 보자 까만 보석이 눈에 띄는 펜던트 목걸이가 보였다. 달 모양의 펜던트는 작고 하얀 보석이 박혀 있고, 달 옆에 존재하는 별처럼 손톱 크기의 까만 보석이 달려 있었다.

“달하고 별이네요.”

펜던트가 크지 않아서 부담 없이 걸고 다닐 사이즈였지만, 그 작은 펜던트 안에 담긴 예술혼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달을 채우고 있는 보석은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데에 맞춰 크고 작음이 달랐고, 까만 보석을 감싼 별 모양의 장식도 세심하게 처리가 되어 있었다.

까만 보석은 뭔지 모르겠고, 하얀 보석은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팔찌에 줄지어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수가 적어 그나마 덜 부담스럽다. 그래 봤자 팔찌나 목걸이나 내가 걸치고 다닐 만한 물건은 분명 아니지만.

“팔찌도 주셨는데 또 받을 수는 없어요.”

“지난번에 줬던 어머니 유품 대신입니다. 그때는 잘 받았잖아요.”

그건…… 비싸 보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물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하트 목걸이가 무엇보다 귀중하겠지만, 여사님의 말에 따르면 실상은 돌아가신 사모님과 아무 연관도 없는 시장표였다고도 했고.

“그래도 계속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받아 줘요.”

“……무슨 이유요?”

대체 무슨 이유가 있기에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팔찌니 목걸이니 하는 것들을 주는 걸까.

팔찌를 받은 뒤에 쇼핑백에 적힌 브랜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많은 수의 반지와 팔찌, 목걸이가 있어서 똑같은 것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대충 그 브랜드의 제품이 어느 정도의 가격대인지는 알 수 있었다.

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일 년은 모아야 살 수 있는 금액.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해도 그런 귀금속을 선뜻 주고받는 일에 정당함을 부여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팔찌는 해민 씨 운전면허 합격을 축하하며 준 거잖아요.”

“…….”

“목걸이는 어머니 유품을 줬다가 다시 가져갔으니 그 대신이라고 해도 좋고. 사실 더 큰 이유도 있습니다.”

“네.”

운전면허 합격 축하라는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은 이상 또 어떤 이유를 대든 개소리에 가깝겠지만, 아무튼 한번 주절거려 보시라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얌전히 이환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이 해민 씨와 같이 살게 된 지 삼십삼 일 되는 날입니다. 삼이 두 번 반복되는 의미 깊은 숫자. 오늘을 기념하고 싶었는데, 마침 목걸이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게 바로 운명이구나 싶었습니다.”

이환에게 있어서 운명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처음 운명의 종소리가 어쩌고 할 때에는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감동에 젖어 꿈같은 소리를 하는 거라고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입주 삼십삼 일을 기념하는 건 아니지.

“실장님. 같이 사는 게 아니고, 숙식 제공에 따른 입주 취업입니다.”

누가 들으면 동거한다고 오해할 법한 이야기를 정정해 주었다.

“하지만 같이 살고 있는 것도 맞지 않습니까.”

“…….”

“나는 해민 씨와 함께 한 모든 것들이 의미 있고, 그렇기에 기념하고 싶어요.”

입주 삼십삼 일로는 부족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와 함께한 모든 것들의 범위를 확실하게 알아 두어야 한다는 마음과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 외면하고 싶다는 마음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알아야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마음. 그 치열한 대립이 이어지며, 일단 이환을 부르긴 했으나 선뜻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장님.”

“감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목걸이는 앞으로 내가 해민 씨에게 해 줄 것들 중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니까요.”

“감동 아닌데.”

“네?”

“아닙니다. 잠시 말이 헛나왔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 타인의 과한 동심과 감수성을 지켜 주기가 힘겨웠다. 가끔 통제를 벗어난 주둥이가 이환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려는 시도를 해서 긴장이 필요했다.

“내가…… 해 줘도 될까요.”

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환이 내 등 뒤로 다가왔다. 목걸이를 들어 내 목에 걸어 주는 이환의 손에서 미약한 떨림이 전해졌다.

이환은 가끔 천진했고, 가끔은 뻔뻔했으며, 또 가끔은 지금처럼 수줍어했다.

서른네 살의 어른 남자보다 첫사랑을 앓는 청소년기 사내아이처럼 느껴졌다. 첫사랑이 피어나려다가도 죽어 버릴, 불모지처럼 메마른 감정을 지닌 스무 살의 시선으로 보는 이환은 그래서 참 낯설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몇 날 며칠을 알몸으로 같이 뒹굴었는데. 가끔 시선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다가, 의도치 않게 손이 스칠 때마다, 또는 왜인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종종 저렇게 수줍어했다.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발갛게 뺨을 붉히면서도 칭찬을 한다. 안타깝게도 그 수줍음과 설렘을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목에 걸린 펜던트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 ∞ ∞

“해민 씨, 정말 나 혼자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제발 혼자 가 주세요, 라는 애원 대신 최대한 의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사님과 집에 있을게요. 편히 다녀오세요.”

한 달에 한 번 모인다는 이환의 가족 식사 자리. 지난번의 동석으로 얼마나 불편하고 뻘쭘하고 갑갑한 자리인지를 확실하게 체감했다. 근무 조건이 변경되어 이환을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니, 거절할 명분이 생겨 다행이었다.

그에 반해 이환은 나와 동행하지 못하는 점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가족들끼리 모여 밥 먹는 자리에 왜 자꾸만 나를 데려가려 하는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이해보다 거절이 먼저였다.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다 한들 마음이 불편해서 입에 뭐가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쌀밥에 간장을 찍어 먹어도 마음 편하게 먹는 밥이 최고다.

“일찍 오겠습니다. 여사님이랑 맛있는 거 먹어요.”

아쉬움이 철철 넘쳐흐르는 얼굴로 말하며 이환이 겉옷을 챙겨 들었다. 미적미적한 움직임이 오늘도 그의 지각을 암시하고 있었다.

“얼른 출발하셔야죠. 늦으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집을 나서는 남자를 배웅하고 막혀 있던 숨을 토해 냈다.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먹고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긴장을 했는데, 얌전히 출발해서 다행이다.

“고생했어요.”

내 마음을 이해한다며 여사님이 등을 토닥토닥 쓸어 주었다.

“옷 갈아입고 내려와요. 우리도 얼른 나가야지.”

이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여사님과 나는 오늘 저녁을 밖에 나가 먹기로 했다.

집밥 말고 가끔은 밖에서 파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여사님의 제안도 있었고, 지금까지의 외출은 대부분 이환을 따라다니는 일이었기에 여사님과의 외출이 기대되기도 했다.

특별한 준비도 필요 없어서 옷만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내려오자, 미리 화장과 헤어 세팅을 해 두셨던 여사님 역시 빠르게 환복을 하고 나와 계셨다.

“빨리, 빨리.”

왜인지 약간 들뜬 여사님을 보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해민 씨가 운전할래요? 요즘 도련님이랑 운전 연습도 한다며.”

“아뇨! 아직 이 차선도 정복하지 못해서 안 돼요.”

기겁하며 손을 내젓자 여사님이 웃으며 운전석에 올랐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운전을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예의 찾느라 목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전도 해 봐야 늘어.”

“사고 날까 봐 무서워서요.”

몸 다치는 것도 무섭지만, 사고 처리에 들어갈 비용도 만만치 않게 무서웠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옆에서 다른 차들은 쌩쌩 달리지, 무서워서 속력을 못 내니까 마구잡이로 끼어들지, 차선 변경 한번 하고 싶어도 도통 틈을 안 주잖아.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배려도 없고 인내심도 없나, 엄청 한탄스러웠다니까.”

“맞아요.”

게다가 운전대만 잡으면 인성이 터지는 옵션이 따라붙는지, 욕설에 고함은 기본이고 보복 운전과 주먹다짐도 가끔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운전 학원에서 도로 주행할 때도, 이환과 운전 연습을 할 때도 그런 일은 겪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옆에서 빵, 하고 클랙슨만 울려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초보 운전자에게 주말 저녁의 서울 도로는 너무나 고난도의 코스였다.

“게다가 나만 조심한다고 사고가 안 나는 게 아니거든. 뒤에서 누가 냅다 처박을 수도 있고. 그래서 차 사고가 무섭지.”

“네.”

“그래도 운전하는 걸 무서워하면 안 돼요. 조심은 하되, 겁먹지는 말아야지. 겁먹으면 오히려 사고가 더 나. 내가 이 도로의 주인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니까.”

그건 도로의 무법자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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